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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세종>의 경녕군.
 <대왕세종>의 경녕군.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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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황실 잔존세력’ 같은 파격적 설정으로 많은 관심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KBS 1-TV <대왕세종>. 이 드라마에는 ‘고려황실 잔존세력’에 버금갈 만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녕군(1458년 사망)이라는 또 하나의 ‘대권 예비주자’다.

후궁인 효빈 김씨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언제나 적자들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경녕군.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정치적 야심은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어 세상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홍길동전>의 주인공처럼, 그런 그에게도 아직 정치적 기회는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드라마 <대왕세종>의 이야기다.

사극이란 본래 결론이 사전에 알려져 있는 것이긴 하지만, <대왕세종>을 보면서 ‘경녕군도 잘만 했으면 혹시?’라고 생각했을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한층 더 부추기는 것이 바로 효빈 김씨의 ‘치맛바람’이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이숙번과 이종무를 포섭하려고 노력하는, ‘미모’와 ‘야심’을 겸비한 효빈 김씨의 존재 때문에 경녕군의 대권 가도는 ‘아직은 파란 불’인 것처럼 보인다.

효빈 김씨의 '치맛바람'과 경녕군

이처럼 <대왕세종>에서 세자(양녕대군)와 충녕대군 못지않게 꽤 상당한 정치적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경녕군. 그는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실제로도 정치적 야심을 품은 인물이었을까?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 아니냐?”며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사료에는 그런 내용이 없을 테니까”라는 게 그런 추측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료에 없다고 하여 실제로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게다가 세자마저 ‘헷갈리는’ 행동만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경녕군이라 하여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세자의 지위가 계속 흔들리던 상황 속에서, 그와 그의 어머니가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녕군과 관련한 <대왕세종>의 설정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황실 잔존세력’이라는 설정은 좀 지나친 비약이지만, 그것과 비교할 때에 경녕군의 경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사료를 통해 그 개연성의 정도를 실제로 측정해보기로 한다. 사료 자체가 한계가 있다는 점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과연 경녕군이 대권에 욕심을 품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사료를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분석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경녕군은, 이방원의 서자이기는 하지만 적자들과도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었다. 충녕대군 같은 적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그런 상황이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경녕군의 어머니인 효빈 김씨.
 경녕군의 어머니인 효빈 김씨.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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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출생 시에 옥상에 백룡의 형상이 도사리고 있는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말도 있었지만, 경녕군은 자신의 ‘분수’를 비교적 잘 지킨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왕실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무역관계를 잘 해결하기도 하는 등, 그는 ‘시키는 일’을 잘해낸 그런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세종은 즉위 후에 형인 양녕대군을 보호하듯이 배다른 형제인 경녕군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일타홍이라는 기생과의 스캔들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바 있는 경녕군은 세종의 적극적인 비호가 없었다면 쉽게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이방원의 적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었다.

경녕군,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까?

‘그럼, 경녕군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었던 게 아니냐?’며 이 논의의 결론을 내리려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급한 태도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싶게 만드는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시호에 관한 <세조실록>의 기록이다.

경녕군이 죽은 해인 1458년의 일을 기록한 <세조실록> 세조 4년 9월 9일자 기사에서 그의 시호인 제간(齊簡)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시호를 제간이라 하였다. 마음을 다잡아(執心) 씩씩함을 자제하는 것을 제(齊)라 하고, 공경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물론 시호에는 가급적 좋은 표현을 넣는다. 하지만, 시호에는 망자에 대한 당대의 일반적 평가를 담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왕자의 시호를 정하면서 그 인물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이 도리어 현실적 상황에 배치되는 판단일 것이다.

경녕군의 시호인 제간에서 제(齊)라는 표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제’란 일반적으로 ‘가지런히 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경녕군의 시호를 제정하면서 ‘제’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마음을 다잡아 씩씩함을 자제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제’를 붙인다고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부분에 나타나는 경녕군의 이미지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자기의 분수를 잘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시호에서는 그와 다른 또 다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씩씩함’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경녕군에게 시호를 부여한 사람들은 그가 강성(强性)의 인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강성은 ‘자제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자제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제1왕자가 아닌 왕자가 강성 기질을 표출해도 위험한데, 하물며 서자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호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잘해냈다. 그가 마음을 다잡아 자신의 강성을 잘 자제했다는 것이 세조 당시 조선정부의 평가였다. 그런 일반적인 평가가 ‘제간’이라는 시호에 일정 정도 담겨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시호 하나를 갖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위의 기록을 통해 경녕군도 양녕대군 못지않은 강성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기질이 후천적 노력에 의해 억제되었을 뿐이지, 그는 분명히 ‘자제될 필요가 있는 내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경녕군, 정치적 야심 품었을 가능성 있지만...

‘자제될 필요가 있는 내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 왕자의 자리에 있었다면, 적자이든 서자이든 간에 자신의 처지에 관계없이 분명히 저 ‘청와대’를 향해 모종의 기대를 품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충녕대군 등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그는 단지 강한 인물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학문적 능력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한번쯤 야심을 품어봄직 했을 것이다. 만약 경녕군이 좀 더 빨리 태어났다면, 왕실의 권력지도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할 때,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은 강한 기질과 학문적 능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한번쯤 대권을 꿈꾸었을 봄직도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고 스스로를 잘 억제함으로써 왕실에서 신뢰를 얻은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도 분명히 ‘야심’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설령 있었다 해도 그것이 후천적 노력에 의해 잘 억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극에서 경녕군을 묘사할 때에는, 자격과 능력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구를 스스로 억제할 줄 아는, 그리고 그런 갈등과 번민 속에서 정신적 만족을 얻을 줄 아는 인격자의 이미지를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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