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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씨, 부탁이 있어요."

개강 첫날(3월 3일) 윤미씨의 표정은 절박해 보였다. 윤미씨와 나는 작년에 여성학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알게 된 사이다.

"현진씨, 이번에는 여성학 수업 안 들어요? 지금 여성학과 수업들이 수강생이 없어서 폐강되게 생겼어요. 저 이번에 여성학 수업 4개 못 들으면 졸업 못해요…. 그럼, 저 어쩌면 여성학 연계전공 포기해야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시간 되면 여성학 수업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요?"

여성학 연계전공 2001년부터 시작, 졸업생 단 한 명

여성학 연계전공 안내
 여성학 연계전공 안내
ⓒ 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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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작년에 친구에게 "같이 여성학 수업 듣는 사람 중에 여성학 연계전공자가 있다"고 말 하자 "여성학 연계전공자가 있다고? 한 명도 없는 줄 알았는데"라며 의아해 하던 기억이 났다.

"아는 언니 중에 여성학 연계전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정말 겨우겨우 졸업했어. 여성학 수업이 몇 개 개설되지도 않는 데다가 그마저도 폐강되니까 졸업 이수학점을 채울 수가 없잖아. 그래서 교수님 찾아가서 폐강 안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랬대. 아마 그래서 지금까지 여성학 연계전공으로 졸업한 사람은 그 언니밖에 없을 걸."

친구는 자신의 주위에도 여성학에 관심 있어서 전공했다가 졸업 때문에 포기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여성학 연계전공 과정이 2001년부터 시작됐는데, 졸업생은 단 한 명뿐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여성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여성학 연계전공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 여성학 연계전공자가 윤미씨밖에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윤미씨가 그 언니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꼭 전공이 아니더라도 교양차원에서 여성학 수업을 듣는 사람은 많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미씨에게 "시간표 확인해 보고 연락주겠다"고 말하고는 수강신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윤미씨가 저토록 절박해 하는 것일까. 여성학 연계전공 수강 인원이 화면에 뜨는 순간, 한숨이 푹 나왔다.

여성학 연계전공 개설 과목 5개 중 4개 수강생 없어 폐강 위기

3월 6일 현재, 여성학 연계전공 개설 과목과 수강생 현황
 3월 6일 현재, 여성학 연계전공 개설 과목과 수강생 현황
ⓒ 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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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여성학 연계전공에는 총 5개의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그 중 '교육과 인간자원개발'은 여성학과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가족사회학'에는 6명, '여성학 입문' 3명, '몸과 정체성' 1명, '여성과 정치활동' 1명이 수강 신청을 한 상태였다(3월 3일 당시).

'가족 사회학'을 그나마(?) 많은 학생이 듣는 것은 이 과목이 소비자 가족학, 사회학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5명은 들어야 폐강을 면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윤미씨가 들어야만 하는 4과목 중 가족 사회학을 제외한 3과목이 폐강이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윤미씨는 제2 전공으로 여성학 연계전공을 택했다. 그녀는 4학년 1학기 현재까지 12학점의 여성학 수업을 들었고, 졸업 이수 학점인 36학점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은 2학기 동안 총 24학점의 여성학 수업을 더 들어야 한다.

경영학과 친구가 보낸 문자, 인기학과에서 수강신청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경영학과 친구가 보낸 문자, 인기학과에서 수강신청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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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라면,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업 수도 많고, 소수의 수업을 제외하고는 폐강되는 일도 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6학기째 학교에 다니면서 듣고 싶은데 자리가 없어서 못들은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수업이 폐강돼서 못들은 적은 없었다(나는 영문학과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 하고 있다). 또 만약에 폐강된다고 해도 다른 수업을 들으면 되니까 문제 될 게 없었다.

윤미씨의 사정이 안타깝기도 하고 또 평소 여성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4개의 여성학 수업 중 한 과목을 듣기로 결심했다. 어떤 걸 들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경영학과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이러니컬했다. 누군가는 수강생이 한 명이라도 늘어났으면 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수강생이 한 명이라도 줄었으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친구는 "350만원이나 내고 수업 듣는데 수강신청은 운으로 해야 한다니…"라며 한탄했다.

경영학과 수강신청 화면, 모든 정원이 꽉 차있다.
 경영학과 수강신청 화면, 모든 정원이 꽉 차있다.
ⓒ 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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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까지 수강생 늘지 않으면, 여성학 전공 포기해야 할 상황

문과대에서 보낸 문자
 문과대에서 보낸 문자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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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현재, 문과대에서 '여성학 연계전공 강좌 수강 요망'이라는 문자도 왔고, 내 나름대로도 지난번에 같이 여성학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과 주위 친구들에게 윤미씨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여성학 수업 들을 생각 없냐"고 말하고 다녔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한 친구는 "지금 취업준비 해야지, 여성학 수업 듣고 있게 생겼냐"며 나를 답답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번에 여성학 연계전공을 하게 된, 그리고 곧 하게 될 윤미씨의 친구 2명이 수강신청을 해서 '여성학 입문'에는 4명(윤미씨, 윤미씨 친구 둘, 나), '몸과 정체성'과 '여성과 정치활동'에는 각각 3명(윤미씨, 윤미씨 친구 둘)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윤미씨는 "어차피 4과목을 다 듣지 못하면 졸업이 어렵기 때문에 전공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만일을 대비해서 다른 전공으로 시간표는 다 짜놓긴 했지만, 정말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어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학교 게시판에 여성학과 강좌 홍보 전단지를 붙이기도 했다.

여성학, 어렵고 부담스러운 학문으로 인식

작년에 내가 여성학 수업을 들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다.

"언니, 저도 지난번에 여성학 수업 들었는데요. 여성학 하는 애들, 다들 똑똑한 데다가 '입심'이 장난이 아니에요. 학점 받기 힘들어요. 잘 생각해봐요."

사실 나 역시 처음 여성학 수업을 듣기 전에는 그런 고민이 없지 않았다. 왠지 '여성학 하는 애들'하면 '투사'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경직된 얼굴에 현란한 말솜씨로 단번에 나를 제압할 것만 같았다. 여성학이라는 학문이 가진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름지기 교양수업은 전공수업과는 달리 부담스럽지 않아야 할 텐데 여성학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학문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작년에 들었던 권김현영 선생님의 '성과 대중문화' 수업은 내가 들었던 수업 중 단연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나는 이 수업을 통해 내가 얼마나 무지했고, 또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약자와 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기득권층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과는 180도 달랐고, 또 다양했다.

지금까지 남성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다면, 여성학은 내게 여태껏 보지 못했던 절반의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남성중심적 사회에 사는 한 여성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지식들이 당장 내가 취업하는 데 도움을 줄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조선일보> 기사대로 '실생활 도움 안 되고 고리타분한' 학문일까?

윤미씨가 붙인 홍보전단
 윤미씨가 붙인 홍보전단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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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남은 3개의 여성학 수업이 폐강되면 윤미씨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과대 행정실에서는 "안타깝지만, 1학기에는 못 듣는 거고 2학기에 수업을 더 들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해왔다.

여성학 연계전공 전담교수님께 인터뷰 요청을 하자 "학생들에게 여성학과 수업을 홍보하고 있는 상황이고 아직 폐강된 게 아니라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1월 <조선일보>는 '정작 여성들은 여성학 외면'이라는 기사에서 여성학 수업 수강생들이 줄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면서 “예전에 비해 여성인권도 많이 신장된 것 같고, 그 이전에나 적용되던 여성학 강의는 지금 현실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는 한 학생의 인터뷰를 실었다.

<조선일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성학은 '실생활에 도움 안 되고 고리타분'한 학문일까. 정말로 여성학은 학생들에게 외면받는, 더이상 필요 없는 과목이 되어버린 걸까.

윤미씨는 "한두 과목씩 폐강되는 건 늘 있어왔던 일이지만, 이렇게 몇 과목 개설 안 되고, 그마저도 폐강 되게 생긴 건 처음"이라며 착잡해 했다.

내일(7일) 저녁 7시까지 각 수업의 수강생이 5명이 되지 않으면 여성학 수업 3개는 폐강되고, 윤미씨는 대학원 진학 전까지 여성학 공부를 당분간 포기해야 한다. 윤미씨는 여성학 연계전공의 두 번째 졸업생이 될 수 있을까. "피가 마른다"는 윤미씨의 문자를 보니 내 마음도 씁쓸해진다.


태그:#여성학 , #여성학 연계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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