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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승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5일 당산동 당사에서 열린 공천심사위원회 회의에서 공천 신청자의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를 포함한 모든 형사범죄와 관련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 공천에서 배제하는 기준을 확정하여 심사하겠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재승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5일 당산동 당사에서 열린 공천심사위원회 회의에서 공천 신청자의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를 포함한 모든 형사범죄와 관련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 공천에서 배제하는 기준을 확정하여 심사하겠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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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승 위원장이 ‘대형사고’를 칠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온다.
"어떤 측면에선, 지금 민주당이 총선에서 살아남으려면 '대형사고'가 필요한 것 아니에요?"

얼마 전에 사석에서 기자가 강금실 통합민주당 최고의원에게 '정치 문외한'인 박재승 위원장이 칼을 휘두르다보면 '대형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때 보인 반응이다.

박재승 전 대한변협 회장은 지난 1월 30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강금실 최고위원을 빼고는 정치권에선 그와 친분이 있는 인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에서 그는 늘 '도꼬다이'(단독)였다. 오죽했으면 당에서는 "박 위원장은 수행비서도 없는 완전 독립체여서 만약 본인이 연락을 끊는다면 우리도 찾을 길이 없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혈혈단신 입성 한 달여만에 '대형사고'

박 위원장은 강 최고위원이 법무부장관 당시에 대한변협 회장을 지냈다. 그래서 당에서는 강 최고위원이 그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천거했다는 얘기가 그럴 듯하게 돌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강 최고위원은 "그분과 함께 일했지만 추천한 것은 아니다"면서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분을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 최고는 이어 "잊고 있었지만 그분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 당이 '최고의 적임자'를 모셨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혈혈단신으로 칼 한 자루만 차고 당에 들어와 '공천특검'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한 달여만에 대형사고를 쳤다. 누구나 입으로는 얘기하지만 아무도 감히 실행하지 못했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것이다. 그것도 전격적으로.

그는 3월 4일 공천심사위원가 열리자마자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비리전력자를 예외없이 공천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개해 국민의 눈과 귀를 단숨에 끌어당겼다. 이렇게 '국민 여론 배수진'을 치고는 이 원칙을 끝내 민주당의 공천 배제 기준으로 관철시켰다.

정치 9단 당대표들도 속수무책

벽창호 같은 그의 '쇠고집' 앞에서는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정치9단의 당대표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불과 '정당 출입 1개월차'의 정치 문외한인 그의 이런 내공과 뚝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의 살아온 내력을 보면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박재승(69). 전남 강진 출신으로 광주고와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71년에 사법시험(13회)에 합격해 73년부터 서울형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판사 5년차에 겁 없이 중앙정보부의 민원 청탁을 거절했다가 유신 정권에 찍혀 제주지법으로 쫓겨난 전력이 있다.

그는 10·26사태 이후에야 수원지법으로 올라올 수 있었고 81년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를 끝으로 옷을 벗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부터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맡았으며, 노무현 정부 출범 하루 전인 2003년 2월 24일 대한변협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변협 회장 취임 일성은 '법의 공평한 적용'이었다. 그는 취임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법을 지키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만연돼 있는데 이는 정권과 일부 힘있는 사람들의 권력 남용으로 생긴 것"이라며 "과거 정권에서의 대통령의 사면권 남발이 권력 남용의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법조인으로서 대통령의 정치인에 대한 사면권 남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이번 박재승의 '3·4 공천대란'으로 표출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박 위원장은 이미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았을 때 이미 이런 결심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취임 일성 "공심위 외부인사 인선 전권 넘겨달라"

박 위원장은 공심위원장 취임 일성으로 손학규 대표에게 '공심위 외부인사 인선 전권을 넘겨달라'며 이미 배수진을 쳤다. 그는 또 지난 2월 14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서도 이미 공천 쇄신을 통한 '대형사고'를 예고했다.

"어떻게 보면 대형사고가 될 것이고, (공천 탈락자들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겠지만 행운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 설마설마 하며 정치권만 대형사고의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심지어 2월 11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통합민주당으로 통합선언을 할 당시만 해도 박상천 대표는 통합 전에 임명된 공심위원장과 관련, "박 변호사를 손 대표가 공심위원장으로 추천하고 내가 내락해 구성됐다"면서 "박 위원장은 쇄신공천을 통해 우리 정치풍토를 개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박 대표는 '원칙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논리적이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원칙론자이다. 박 대표가 박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한 공심위 구성에 '내락'한 것은 그가 신뢰할 만한 원칙주의자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 대표도 그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원칙을 적용할지는 몰랐던 듯하다.

사상 처음으로 당대표도 공심위에서 면접

고향인 전남 고흥․보성에 공천을 신청한 박 대표는 지난 3일 오후 한국 정당정치 사상 처음으로 공천을 받기 위해 공심위에서 면접을 받은 정당 대표가 되었다.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한 이상 정당 대표도 예외없이 면접을 봐야 한다는 박재승 위원장의 지침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박 대표측에선 "어떻게 대표가 면접을 보냐"며 불참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가 면접에 온 박 대표를 나름대로 예우한 것은 면접이 끝나고 박 대표를 승강기 앞까지 배웅한 것뿐이었다. 박 위원장은 오히려 다음날 '금고 이상 전력자 공천 배제 기준'을 전격 발표해 버렸다.

손학규 대표는 다음날 최고위원 회의에서 "당대표도 면접을 봤다. 박상천 대표께서는 마음속으로 곤혹스러운 점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모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통합민주당의 모습을 보이는데 앞장서셨다"면서 "이 모든 목표는, 공천 쇄신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통합민주당, 민주개혁세력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라고 위로했다.

박상천 대표와 박재승 위원장은 광주고 1년 선후배 사이다. 박 대표가 54년 입학이고 박 위원장이 55년 입학이니 2년을 함께 다녔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아는 사이다.

당의 총선기획단장으로 공심위를 지원하고 있는 신계륜 사무총장은 70년에 광주고에 입학한 15년 후배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정치자금법 위반 전력이 있는 신 총장도 예외없이 공천 배제기준에 걸렸다. '공천특검'의 칼 앞에서는 광주고 1년 선배(박상천 대표)나 15년 후배(신계륜 총장)나 예외가 없었다. 

광주고 1년 선배 박상천, 15년 후배 신계륜도 예외없이 단칼

당의 총선기획단장이자 사무총장을 공천에서 배제시킨 것은 사실상 손학규 대표의 '수족'을 자른 것이나 다름없다. 신 총장도 "손학규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며 "억울한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공천이 아니라 사람 잡는 공천이 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관련 박 위원장은 "공천에서 배제된 사람 중에는 사랑하는 후배도 있다, 나도 가슴이 아프다"면서 "사심 없는 결단으로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박 위원장은 3·4 공천대란의 대의명분을 이렇게 설파했다.

"제 기준을 놓고 보면 물론 희생자 나온다. 억울한 사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대의를 놓고 나갈 때는 항상 억울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큰일이 있을 때에는 억울한 사람의 희생을 갖고 가는 것이 우리의 역사다. 그 희생을 자기가 몸소 나와서 희생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억울한 사람이 분위기에 밀려 희생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은 개인사정과 달리 별도로 모두 대의를 위한 희생은 나중에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 받는다."

박경철 공심위원은 이번 공천 기준의 대의명분을 '대의멸친'(大義滅親)으로 풀이했다. "억울한 한 마리의 양이 생길 수 있지만 큰 뜻을 위해서는 가족까지 희생할 수 있다는 '대의멸친'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때 아닌 양들의 전쟁과 대의멸친(大義滅親)

손 대표는 이에 대해 "99마리 양을 놔두고 1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이 법의 정신이고, 정의구현의 모습이다"면서 "억울한 희생양이 여론몰이에 휩쓸려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완곡하게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박 위원장은 "99마리의 양을 살리기 위해 1마리의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맞섰다.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때 아닌 '양들의 전쟁'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 문화에서는 낯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에서 비롯된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전쟁과 같은 총체적 난국에 처했을 때, 국민 통합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핵심 기제로 거론된다.

이를테면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가운데 2천여 명이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6·25전쟁 때는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K1(경기고)이니 K2(경복고)니 하는 영문 이니셜로 통하는 세칭 최고의 명문고 출신 가운데 6·25 전쟁 당시 희생자가 많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병역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발표되는 각종 조사에 따르면,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의 병역면제 비율은 일반국민의 그것보다 2~3배 가량이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박재승 발 공천혁명은 'K고의 반란'

유독 끈끈한 고등학교 동문 문화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K고 공화국'이라고 부를 만큼 명문 K고들이 줄비하게 많다. 경기고, 경복고, 경북고, 경남고, 광주고 등…. 정치판이든, 관료사회건  K고생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요직을 차지해온 것이 한국 사회의 오랜 풍속도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박재승발(發) '공천혁명'은 'K고의 반란'인 셈이다. 그리고 더 많은 K고의 반란과 대의멸친이 계속될 때 한국 사회에서도 비로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구현되지 않을까 싶다.

사족(蛇足) 하나. 그의 상훈 기록을 보면, 그는 광주고 동창회로부터 95년과 2005년에 걸쳐 두 번이나 '자랑스런 광고인'(光高人) 상을 받았다. 이번 공천혁명이 '선거혁명'으로 이어지면 그는 어쩌면 세 번이나 '자랑스런 광고인' 상을 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태그:#박재승, #공천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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