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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새정부의 국무위원들이 임명되었다. 너무 많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한꺼번에 쏟아낸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충 넘어간 사람들도 많다. 특히 이미 낙마한 후보자들이 있어서 철저한 검증을 피할 수 있었던 분들이 부지기수이다.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이중국적, 국가관 등 문제가 노출된 분들이 지난 정부에서라면 어떠했을까? 반드시 낙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해당업무를 담당하기에 부적합한 사고를 가진 경우이다. 김성이 복지부 장관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이미 언론을 통해서 적절하지 못한 복지정책에 대한 견해를 노출한 사람이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추진했던 생산적 복지는 성공을 거뒀고, 김대중 정부의 그것은 실패를 했다고 평가했다. 성패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으니 논외로 하자. 문제는 한국의 생산적 복지가 실패한 원인을 황당하게도 신앙심의 부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는 복지의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 가족의 중요성, 노동의 가치존중, 신앙심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정부의 복지정책은 사실상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가족의 상호간 사랑이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서 근면성실한 태도를 가지면 복지의 수요가 줄어들 수도 있다. 신앙의 깊이가 더해지면 그만큼 물질적 욕구가 감소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필요한 것일까? 더군다나 복지정책을 위해 장관급의 자리까지 있어야할까? 그저 가족간의 유대를 강조하는 교육을 하고, 노동은 심지어 착취를 당하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할 가치있는 것이라 주입시키고, 신앙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라고 권유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닐까?

 

특히 그가 중요한 방점을 둔 부분은 바로 신앙심이다. 미국의 생산적 복지가 신앙심 때문에 성공을 거뒀고,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의 복지정책은 신앙심이 모자라서 실패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아연실색을 할 정도이다.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러한 가사가 나온다. 그 가사에 충실하지 못해서 과연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은 실패하고, 이제 복지병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레이건 행정부의 생산적 복지를 성공한 것으로 자신있게 결말지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국민의 정부가 시작한 생산적 복지는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인가? 신앙심이 복지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면 김성이 장관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하나하나 좀 짚어보자.

 

첫째, 한국에서 복지병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할만한 근거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은 몰핀주사가 아니다. 정부의 복지가 없어도 신앙에 의존하여 행복을 찾으라는 식의 주장은 말도 안된다. 또 인간은 신앙의 대상인 신을 자기의 편의대로 부려먹어선 안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살아나가야 한다. 다만 신은 경외하고 존중받을 대상이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부리는 객체일 수가 없다. 그는 복지정책에 대한 사고는 물론 신앙관에도 상당한 의심을 받아 마땅하다.

 

둘째, 레이건 행정부가 미국인에게 신앙을 강요한 일은 없다. 물론 청교도적 프론티어 정신을 운운한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것이 레이건의 복지정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주장은 생경하기 이를 데 없다. 또 복지가 아닌 국가경제를 다시 부흥의 길로 이끌었다는 주장은 일부 있으나 그것은 정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전히 미국의 경제구조는 쌍둥이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세와 복지축소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미국의 기업들은 여전히 경쟁력을 점점 잃어갔을 뿐 회복되지 못했다. 복지의 축소가 양극화를 극심하게 만들었다. 누가 성공이라 하는가?

 

셋째, 국민의 정부는 지금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바탕위에 집권했었다. 미국과 달리 있던 복지를 축소하며 시작한 생산적 복지가 아니다. 전혀 없던 것을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그리 잘했다고 주장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실패로 보였다면 그 것은 외환위기를 초래한 정치세력이 비판받을 일이다. 소위 사회안전망이라며 도입한 것이 외환위기로 인하여 피할 수 없이 발생한 한계상황의 국민을 보호하고자 시작한 것이다. 그들을 방치하고 신앙심이나 가지라고 내몰았어야 한다는 것인가?

 

넷째, 이제 김성이 장관은 이명박 정권의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지론대로 가정, 노동, 신앙의 가치를 국민에게 고취시키는 역할을 할 것인가? 그런 노력을 한다고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온국민에게 매일 몰핀주사를 놓아서 말초적 행복감을 높여주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가정을 지키고, 노동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신앙심을 높이는 일은 정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그러면 김 장관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그나마 지난 10년동안 아주 미약한 수준으로 확충해온 복지예산을 줄이고, 경제부처의 감세정책에 발맞춰 국민을 설득할 자신은 있는가? 그래서 과연 복지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남아 있을까? 잘못된 사고로 업무를 접하면 분명 잘못된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미국의 생산적 복지가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국민의 정부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미국의 경우 있던 복지를 축소한 것이어서 기득권층의 환호를 받았고, 한국의 경우 없던 복지를 도입하자니 기득권층의 반발을 산 것일 뿐이다. 결코 신앙심으로 복지정책의 성패가 갈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하면 '종교는 마약이다'는 구호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요소요소에 부적합한 인물을 기용하여 구성된 행정부가 과연 무엇을 하려는지 답답할 뿐이다. 기업의 세부담을 완화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예산을 축소할 것이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고, 서민가계의 어려움을 신앙심으로 극복하라고 강요할 것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과 처우라도 감수하고 노동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핵심적 정책이 될 것이다. 부당함에 맞서서 항의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묵묵히 귀중한 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국민된 도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통일은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을 통일부 장관에 임명하려다 흠결로 낙마하고, 복지는 신앙으로 해결해야 하며 정부가 해줄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인물이 복지행정을 맡게 되었다. 도덕적 흠결도 흠결이거니와 자신이 맡게될 분야에 대한 근원적 사고방식조차 어긋난 인사는 이 정권의 정체성을 잘 대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과거나 도덕성을 불문하고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주장에서 능력이란 무엇일까? 여러가지 수단으로 재산을 모으고 불리는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국민에게 신앙에 의존하여 한계상황을 극복하라는 획기적인 논리창조를 능력이라 하는 걸까?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사를 신은 해결할 수 없다. 아니 해결할 수 있어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해결해준다면 아마도 그것은 악귀일 것이다. 인간사는 인간이 알아서 하고 제발 신은 좀 그만 부려먹었으면 좋겠다. 신앙심으로는 결코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더더욱 한계상황에 봉착한 국민에게 신이나 믿으라고 주장해서는 그들의 굶주림을 달랠 수도 없고, 목숨을 살릴 수도 없을 것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인사를 실시하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노사모에 함께 올립니다.


태그:#김성이, #복지정책, #신앙심, #생산적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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