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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이산>.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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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제48회(3월 3일 방영분)에서 홍국영은 정조에게 “전하의 군대를 가지셔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즉위 이듬해인 정조 1년(1777)에 숙위소가 설치되고 그 대장에 홍국영이 임명되었다. 창덕궁 건양문 동쪽에 설치된 숙위소는 창덕궁·창경궁 같은 동궐(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의 수비를 담당했다. 

그런데 숙위소는 ‘전하의 군대’가 아닌 ‘홍국영의 군대’로 사실상 변질되고 말았다. 홍국영의 국정 전횡을 상징하는 기구가 되고 만 것이다. 왜냐하면, 주요 행정문서가 숙위대장인 홍국영의 손을 거치는 기형적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숙위소는 1780년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폐지되고 말았다.

그럼, 이제 무엇이 ‘전하의 군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숙위소 혁파 후에 창경궁 명정전 서월랑에서 동궐 수비를 담당한 것은 30명의 호위무사들이었다. 정조가 주로 창경궁에 거처했기 때문에 그곳을 중심으로 궁궐 수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서월랑에 입직한 무사들이 금군의 기능을 수행했다.

홍국영은 이미 1781년에 사망했지만, “전하의 군대를 가지셔야 한다”는 홍국영의 말마따나 그 후에도 정조는 ‘자기만의 군대’를 가질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였다. 장용영에 관한 보다 세부적인 내용은 신명호가 쓴 ‘순조대의 장용영 혁파와 동궐 숙위체제’를 비롯한 여러 논문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조의 군대 '장용영'

장용영은 처음에는 장용위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정조 8년(1784)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꾼 일을 기념해서 열린 경과(慶科)라는 무과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을 중심으로 국왕의 호위부대인 장용위가 출범했고, 이것이 정조 17년(1793)에 독립적인 군영으로 발전하면서 장용영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장용영은 그 후 금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용호영에서 인력을 차출하거나 혹은 호위청을 흡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기존의 5군영을 능가하는 위세를 가지게 되면서, 이 조직은 규장각과 더불어 정조의 왕권을 상징하는 주요 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규장각이 정조 시대의 ‘붓’을 상징한다면, 장용영은 정조 시대의 ‘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가 ‘자기만의 군대’인 친위군을, 그것도 강력한 친위군을 보유했다는 사실. 이 사실은 정조가 상당히 불리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24년 동안 비교적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조 임금의 주된 거처였던 창경궁.
 정조 임금의 주된 거처였던 창경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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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 묘사된 세손 이산 그리고 정조 이산의 입지는 상당히 불리한 편이다. 명색은 국왕이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그의 입지가 상당히 불리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에 근접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는 점, 수구세력에 맞서 싸운 군주였다는 점 때문에 세손 이산 그리고 정조 이산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같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임금이었다. 그는 결코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한 군주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의 묘호에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그의 묘호는 사망 직후인 순조 때에는 정종(正宗)이었다가 고종 때에 정조(正祖)로 바뀌었다. 순조 때에는 어떤 이유에서 묘호에 ‘정’자를 넣었고, 고종 때에는 또 어떤 이유에서 거기에 그 글자를 넣었을까?

두 시기에 그의 묘호에 ‘정’자를 넣은 이유는 동일했다. 그것은 그가 ‘안팎으로부터 복종을 받은 임금’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 점으로부터, 그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한 임금이었다는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묘호에 '정'자가 들어가 이유

묘호에는 언제나 좋은 글자만 넣어주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복종을 전혀 받지 못한 군주를 두고 ‘안팎의 복종을 받은 임금’이라는 의미의 ‘정’자를 두 번씩이나 묘호에 넣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묘호의 제정 혹은 개정은 선왕에 대한 그 시대의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정조가 툭하면 상식에 어긋나는 정책으로 백성들의 비웃음을 사거나 혹은 군대 사열식에서 자신 있게 경례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시시한 군주였다면, 그가 죽은 뒤에 조선정부에서 그의 묘호에 ‘안팎의 복종을 받은 임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약점이나 수구세력의 압박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치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묘호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정조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점은 새삼스레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조 임금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느 정도는 국제적 요인도 작용했다. 같은 시기에 조선의 동맹국인 청나라에서 건륭제(재위 1735~1799년)의 치세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안정이 조선의 안정에 영향을 준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국내적 요인을 들라면, 정조 임금이 위와 같이 ‘자기만의 군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개인적 역량이 출중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강력한 친위군을 보유했다는 점이 그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독재라는 현대사의 아픈 기억 때문에 한국인들은 군주의 친위부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마오저뚱)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군대·경찰 같은 무력기구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한 통치자는 소신 있게 개혁 드라이브를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현대 한국인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통치자가 공식적인 정부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 정부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거나 혹은 통치자가 정부군을 통제하고 있다고 해도 그 정부군을 능가하는 외국군대가 국내에 주둔하고 있는 경우에는 개혁은커녕 일상적인 국정운영도 소신껏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열강에 의한 의화단운동(1900년) 진압 이후, 포탄으로 청나라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사거리 안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 이 점은 근대 중국이 서양열강(일본 포함)의 침탈에 시달리다가 결국 붕괴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인 중 하나였다.

이처럼 자기 통치영역 내의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에는 통치자 자신은 물론 국가 자체도 그 존망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그 군대를 갖고 5월 16일이나 12월 12일 같은 때에 ‘불법적 충동’을 느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통치자는 강력한 군대를 자기 휘하에 둘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전회의에서 통치자의 면모를 과시하는 정조 임금. <이산> 제48회 예고편.
 어전회의에서 통치자의 면모를 과시하는 정조 임금. <이산> 제48회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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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왕권강화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정조는 바로 그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기존의 5군영을 능가하는 강력한 친위군인 장용영을 만들어서 상당한 정도의 왕권강화에 활용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개혁적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당시는 대왕대비)가 장용영을 혁파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용영은 개혁군주 정조를 보좌하는 강력한 군대조직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산이 사후에 두 번씩이나 ‘안팎의 복종을 받은 임금’이라는 의미의 묘호를 받은 데에는 이처럼 강력한 친위군의 존재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정조 임금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친위군인 장용영을 기반으로 왕조의 군사력을 통제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최선책은, 친위군이 아닌 일반 정부군을 보다 더 확고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확실히 장악한 장용영은 어디까지나 ‘정조만의 군대’에 불과했다는 점, 그것이 결정적인 한계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장용영은 결국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에 의해 일거에 와해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정조가 일반 정부군을 보다 더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다면, 장용영 같은 강력한 친위군을 양성할 필요성을 ‘덜’ 느꼈을 것이다. 

정조가 죽자마자 그의 개혁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이처럼 정조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단도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정조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개혁이 실패했다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4년씩이나 통치하면서 그 ‘2%’를 결국 채우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조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강력한 군주는 자기 통치범위 안에 있는 ‘모든 군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자기 영역 안에 자기 국적의 군대만을 두어야 하고, 그 자기 국적의 군대 중에서도 정부군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정조는 자기 영역 안에 자기 국적의 군대만을 두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자기 국적의 군대 중에서도 정부군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에는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군을 능가할 만한 또 다른 친위군을 양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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