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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에 얽힌 어린 날의 추억

 

3·1절엔 가까운 보물 제209호 동춘당과 송준길 선생이 살았던 고택을 거닐었다. 얼마 전 지리산 등반 때 다친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고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내·외벽 옆에 우뚝 선 굴뚝이다. 3·1절이라서 그런지 벽돌로 연출한 태극 문양이 매우 이채로웠다.

 

나는 굴뚝을 좋아한다. 어디 암자나 사찰에 가게 되면 빼놓지 않고 둘러보고 나온다. 어쩌면 내가 굴뚝을 좋아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려서 난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따라서 5일장이 열리는 광주 말바우장에 가곤 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해발 400여 m가량으로 추정되는 가내미 고개를 넘고, 금단동 고개를 지나 각화재 마루에 올라서면 광주 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숭악헌 촌놈인 내게 도회의 거대한 풍경은 얼마나 가슴 뛰는 설렘이었던가.

 

그중에서도 전남 제사공장의 거대한 굴뚝이야말로 내겐 가장 커다란 경이였다. 전남 제사공장은 1975년 <겨울공화국> 필화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해직된 양성우 시인이 재직했던 광주 중앙여고 옆에 있었다. 세상에서 저보다 더 높은 굴뚝은 없을 것 같았다. 전남 제사공장의 굴뚝이 세상에서 제일 높으리라는 내 예단이 무너진 것은 중학교 때였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이사 간 군산에서였다. 월명공원에 올라서 금강 건너 장항읍 전망산 돌산 위에 올라앉은 높이 250m나 되는 장항 제련소(현 LG 금속 장항 공장) 굴뚝은 마치 한 마리 괴물 같았다. 그 거대한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몽실몽실한 연기가 아득히 흩어져 가는 광경은 먼곳에 대한 내 막연한 동경을 부추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들으니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간다고 했다.

 

장항제련소 연기는 내게 먼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심어 주었다. 그 동경이란 게 할머니·할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집을 향한 것이었을까. 방학이 되면 서둘러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닿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해서 들머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초가집 굴뚝에서 뭉실뭉실 피어 오르는 저녁연기였다. 그 저녁연기는 내 어린 가슴을 얼마나 뭉클하게 만들었던가. 지금도 그 감정의 실체를 움켜쥘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어쩌면 "마음이 굴뚝같다"라는 말은 그런 상황이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동화적인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아미산 굴뚝

 

그때까지 내가 보았던 굴뚝들이 단순히 친근감을 자아내는 데 그쳤다면 1980년대 중반에 처음 보았던 경복궁 교태전 뒤 아미산에 있는 굴뚝(보물 제811호)들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아미산은 왕비가 기거하던 교태전의 후원이다. 조선 태종 때 경회루와 인공연못을 만들면서 연못의 흙을 옮겨다 뒷동산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는 아름다운 4개의 굴뚝이 서 있다.

 

굴뚝의 붉은 벽돌 빛깔은 언제 보아도 고혹적이다. 굴뚝 맨 위에는 질그릇으로 구워 만든 집채 모양의 연가(煙家)를 얹어 굴뚝각시가 살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동화적인 상상력마저 불러 일으킨다

 

아미산에 모란·앵두·매화·철쭉·영산홍 등 갖은 꽃들이 피어나는 봄날이 오면 굴뚝의 아름다움은 절정을 구가한다.

 

굴뚝 -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정신의 궁극

 

이러한 굴뚝에 대한 내 정서적 접근과는 달리 굴뚝을 일약 정신의 표상으로까지 끌어올린 시인이 있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 졸업한 후,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고진하 시인이다.

 

저 나지막한 함석집, 저녁밥을 짓는지 포르스름한 연기를

굳게 피워올리며 하늘과 내통(內通)하는

굴뚝을 보고 내심 반가웠다

거미줄과 그을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창틀에

올망졸망 매달린 함석집 아이들이 부르는

피리 소리, 그 단음(單音)의 구슬픈 피리 소리도

곧장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울어도 울어도 천진한 동심(童心)은

목이 쉬지 않고

저처럼 쉽게 하늘과 연통(連通)하는구나!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으려면!

괄게 지핀 욕망의 불 아궁이 속으로

지지지 타들어가는, 본래 내 것 아닌 살, 하얀 뼈들

지지지 다 타고 난 하얀 재마저 쏟아버리지 못하고

다만 무심천변(無心川邊)에 우두커니 서서

저녁밥 짓는 포르스름한 연기 피어오르는

저 우뚝한 굴뚝을 바라만 보고 있는

- 고진하 시 '굴뚝의 정신' 전문

 

시인은 현재는 원주 치악산 자락에서 자연과 세속적 삶의 교감을 나누면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으로는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등이 있다.

 

그가 즐겨 쓰는 시의 소재는 썩고 있는 문명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문명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 유혹에 끌려들어가는 척하면서 문명이 가진 함정을 드러낸다.

 

이 시는 1993년에 나온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에 실려 있다. 무심천변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이 시를 잉태한 장소는 충북 청주 어름으로 짐작된다. 시인은 창틀에 올망졸망 매달린 함석집 아이들이 부르는 피리소리를 듣는다. 피리소리와 굴뚝은 다 하늘과 연통한다. 그가 보기에 그것들이 하늘과 내통 내지 연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정신적 경지를 지녔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울어도 울어도 천진한 동심은 목이 쉬지 않고 저처럼 쉽게 하늘과 연통하는구나!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으려면! 괄게 지핀 욕망의 불아궁이 속으로 지지지지 타들어가는, 본래 내 것 아닌 살, 하얀 뼈를 지지지 다 타고 난 하얀 재마저 쏟아 버리지 못하고 다만 무심천에 우두커니 서서 저녁밥 짓는 포르스름한 연기 피어오르는 저 우뚝한 굴뚝을 바라만 보고 있는 <자연과 자유 사이의 균형잡기> - '나의 시, 나의 시쓰기' 중

 

이렇듯 시인의 태도가 자기반성으로 결연한 것은 그 자신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도 할 테지만, 이 시가 태어났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시인이 부르짖어 마지 않는 굴뚝의 정신은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점이다. 그러나 때론 사물이나 현상에 너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제 스스로를 옥죄는 억압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을….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지 않으면 집이 아니다

 

 

세월은 흘렀고, 초가집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집이란 집은 죄다 아파트라는 하나의 건축 양식에 목매다는 중이다. 내가 굴뚝에서 느꼈던 따스한 정감들은 멀리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렇지만, 낯선 땅에서 오래도록 헤매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이 어느 때 가장 쓸쓸함에 사무치는지를. 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멀리 송이버섯처럼 돋아난 초가지붕 위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때야말로 아마 육친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장 절실해지는 순간이리라.

 

객지에서 저녁연기 솟아오를 때마다 하염없이 집 생각에 사로잡혀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지금도 저녁 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집이 아니라는 지독한 편견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태그:#고진하 , #굴뚝 ,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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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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