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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랫도리가 움찔거릴 만큼 아프다. 얼마를 두들겨 맞았는지 모르겠다.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지만 뼈가 웅웅 울리고, 살점이 뭉그러지며 흐물흐물 해지며 뭔가가 흘러내리는 듯 축축한 느낌이 들 때쯤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한참을 그렇게 맞다보니 몽둥이를 치켜 올리는 듯한 느낌만으로도 전신이 움츠려 들었다. 숨이 찰 정도로 몽둥이질을 하고 어딘가를 다녀온 고참이 뭉그러진 허벅지에 살코기를 붙여주면서 "넌 마 영창은 안 갈겨"하고 한마디 했다. 천하의 졸병이 엄청난 짓을 했으니 찍소리 못하고 맞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봐도 그건 나를 살리는 인생의 매였다.

안 했어도 될 전무후무한 경험이지만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상처에 얇게 저민 고깃덩이를 올려놓으면 쉽게 멍이 풀린다는 민간요법(?)도 그 때 알게 되었다.

1980년 12월, 서귀포 동쪽 해안초소

필자는 1980년도에 전투경찰 70대 후반 기수로 자원입대 해 제주도에서 근무 했다.
 필자는 1980년도에 전투경찰 70대 후반 기수로 자원입대 해 제주도에서 근무 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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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의경은 생기기도 전인 1980년도 8월에 전투경찰 70대 후반기수로 자원입대했다.

얼마 후에는 재수 없이 차출된 병력이 들어오는 곳이 전투경찰이었지만 1980년도 말까지의 전투경찰은 자원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제주도에 있는 2XXX 전경부대에서 다시 2주간의 기본교육을 받고 서귀포 동쪽에 있는 해안초소로 발령을 받았다.

10여명이 근무하는 해안초소로 발령을 받은 졸병이 피해갈 수 없는 역할은 분대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장(?). 입대를 하기 전에 자취를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제한된 여건 하에서 까다로운 고참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는 애초부터 난공불락이었는지도 모른다. 끼니때마다 핀잔 아닌 핀잔, 고참들의 반찬투정을 들으며 그럭저럭 일주일쯤을 지내다보니 회식을 한다고 한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근무했던 당시의 해안초소에는 저녁이 되면 지형지물에 밝은 서너 명의 방위병들이 초계근무를 나왔다. 집안일을 했든 빈둥빈둥 뒹굴며 낮잠을 잤든 낮에는 집에 있던 지역민들 중 방위병이 된 젊은이들이 저녁만 되면 얼룩덜룩한 방위복을 입고 파출소에서 지급하는 총을 메고 근무를 나왔다.

밥하고 설거지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신입 졸병과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뜻으로 방위병들이 생닭 한 마리와 대병들이 소주를 두 병이나 사들고 왔다. 해안초소라는 특성상 낮보다는 밤 근무에 주력을 해야 했으니 저녁 식사를 하면서 새로 들어온 졸개를 위해 고참들과 방위병들이 환영식을 겸한 회식을 마련한 것이다. 

졸개를 위한 회식자리가 마련되다

의무경찰이 생기기 전인 그때는 전투경찰이 해안초소 근무는 물론 교통정리와 같은 경찰 역할도 하였었다.
 의무경찰이 생기기 전인 그때는 전투경찰이 해안초소 근무는 물론 교통정리와 같은 경찰 역할도 하였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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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자리는 좋았다. 끼니 때마다 까탈을 부리던 고참도 트집을 잡지 않았고, 수십일 쯤이 지나면 후배 졸병이 들어와 주방장 자리를 면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격려와 근무에 이상이 없을 정도로 주량껏만 마시라는 주의를 빠트리지는 않으며 이 고참 저 고참이 술잔을 채워줬다. 그렇게 분위기 좋았던 회식이 다음날 몽둥이찜질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원체 술을 좋아했던 필자에게 훈련기간은 본의 아닌 금주기간이 되었었고, 그런 금주 기간 끝에 맛보는 술이니 빳빳했던 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날이 생일이었고, 그날이 잔칫날이었다.

몸을 돌리고 마셔야 하는 불편한 자세였으나 목구멍으로 탁 털어 넣은 첫 잔은 뱃속까지 짜르르하도록 신선했고, 둘째 잔부터는 달달하기만 했다. 한잔 한잔이 갈증을 달래주는 감로수였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달달하기만 하니 고참들이 따라주는 대로 더끔더끔 받아 마셨다.

적잖이 마셨건만 하늘같은 고참들 앞이라서 그런지 마음도 동작도 흐트러트리지 않고 말짱한 자세로 총과 실탄을 챙겨 잠복호로 근무를 나갔다. '잠복호', 원칙대로야 교대 군무를 서야하겠지만 밤낮없이 밥하고 상황실 전화를 받아야 하는 졸병을 위해 밤잠이라도 편하게 자라는 듯 '잠을 복되게 자는 호'라는 명분을 붙여 지형지물에 밝은 방위병과 말뚝 근무를 서야하는 그런 형태였다.  

군기 때문인지 초소에서는 말짱했지만 초소를 나서면서부터는 기억에 없다.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초소로 돌아가기 위해 벌떡 몸을 일으키니 왠지 허리가 허전하다. 허리에 채워져 있어야 할 탄대, 240발의 실탄과 조명탄을 담고 있는 탄대가 보이지 않는다.

잠복호로 출발을 한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부터는 기억이 없으니 답답했지만 내심으로는 술을 마신 졸병이 걱정되어 고참들이 일부러 탄대를 주지 않았나보다 라고 최면을 걸며 초소로 돌아왔다.

초소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나니 여느 때와 같이 고참들은 취침을 하러 내무반으로 들어갔으나, 특경(하사)계급장을 달고 있던 분대장은 역할을 다하겠다는 듯 실탄과 무기를 점검하더니 임 이경의 탄대가 없다며 확인을 한다.

여기저기, 이사람 저 사람에게 확인을 했지만 찾을 수 없게 되자 분대장은 본부로 보고를 하려고 한다. 그러자 분대장보다 훨씬 군대생활을 오래한 고참이 보고를 잠시 늦추라고 했다.

졸개가 잃어버린 '탄대'를 찾아라

경찰서 정문을 지키는 것도 전투경찰들의 몫이었다.
 경찰서 정문을 지키는 것도 전투경찰들의 몫이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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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비상이 걸렸다. 잠자리에 누웠던 고참들이 모두 다  일어나 초소에서 잠복호까지 가는 바윗길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라도 떨어져 있을지 모를 탄대를 찾고 있었다.

전날  밤에 함께 근무를 나갔던 방위병, 해안가 돌멩이 하나까지도 낱낱이 기억할 정도로 지형지물에 밝은 방위병에게 연락을 하면 쉬울 수도 있었겠지만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분대원 10명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게 늘어서 꼼꼼하게 찾았지만 잠복호까지 갈 때는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바꿔 잠복호에서 초소로 돌아오는 길을 살피던 중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에 걸린 탄대가 발견되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바윗길을 걷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키작은 나무에 탄대가 걸려 벗겨졌지만 술에 취해 그 무거운 것이 벗겨져 나가는 줄도 몰랐던 거다.

벗겨진 탄대는 그렇게 회수되어 다행이었지만 뒷일이 문제였다. 얼마간의 얼차렷으로 끝날듯한 분위기였으나 특경(전투경찰에서는 하사계급을 특경이라고 하였음)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군 생활을 훨씬 오래한 수경(병장)들과 함께 생활하느라 지금껏 큰소리 한번 못치고 있었던 분대장이 이런 기회에 계급장 끗발을 부려보겠다는 심산으로 자꾸 보고를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니 모두를 집합시킨 거다.

분대장이 질려서 신고할 엄두를 못내도록 흠씬 몽둥이질

모두를 세워 놓고, 물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생나무로 기수별로 줄빳따를 치더니 마지막으로 필자를 불러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는 엉덩이 쪽에 몽둥이질을 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서른 대쯤까지는 악을 써가며 수를 셌지만 그 다음부터는 목청까지 움츠려들어 셀 수가 없었다.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고, 엉덩이와 허벅지 살이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맞고 나서야 몽둥이질은 멈췄다. 집합을 해산시키고 몽둥이질을 하던 최고참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어디론가 나갔다.

반쯤은 초죽음이 되어 엉금엉금 기어 취사장 한구석에 놓여있는 송판으로 된 장의자에 엎드려 있으려니 매질을 하였던 고참이 한손에 뭔가를 들고 들어와서는 바지를 홀딱 벗으라고 한다. 

바지를 벗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치켜들고 엎드리니 "넌 마 이렇게 안하면 분대장이 본부에 보고하고, 본부에 보고되면 영창 가고, 영창 갔다 오면 니 병적기록부에 빨간 줄 남을 것 같아 몸으로 때우라고 그런 거야"하며 손에 들고 있던 얇게 썬 살코기를 꺼내 엉덩이와 허벅지에 척척 붙여 준다.

보는 사람이 질리도록 몽둥이질을 하는 것으로 책임을 물어 분대장이 보고를 하지 못하게끔 선수를 친 것이다. 열흘이 넘도록 엉거주춤하게 걷고, 잠을 잘 때도 엎드려 자야 했지만 그 때의 매(구타)는 술을 자제하게 하고, 술을 마시더라도 몇 번씩은 물건을 챙기게 하는 가르침의 계기가 되었다. 

분대장이 보고를 하면 탄대를 분실하였던 필자만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함께 술을 마신 고참들까지 문책을 당할 듯 하니 그런 처방(?)을 썼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때의 몽둥이질은 필자의 인생에 양분의 매가 되었다.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던 군생활의 부끄러움을 지우는 예방의 지우개였고, 어떻게 타락하거나 방치되었을지도 모를 술에 대한 탐욕을 자제시키는 채찍질이 되는 계기의 아픔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는 대퇴부가 욱신거릴 만큼 아픈 순간이지만 졸병의 인생에 따라다닐 신상명세서를 염려해 준 고참의 마음이 몽둥이로 표현된 '사랑의 매'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유 모르며 당한 구타, 악감정으로 남아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는 1983년, 이때도 술은 마셨겠지만 졸병 때 얻은 교훈, 탄대를 잃어버려 엉덩이가 뭉그러지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었으니 챙기고 또 챙겼을 거다.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는 1983년, 이때도 술은 마셨겠지만 졸병 때 얻은 교훈, 탄대를 잃어버려 엉덩이가 뭉그러지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었으니 챙기고 또 챙겼을 거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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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을 하는 동안 이렇듯 이유 있고 도움이 되는 구타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80년 11월 7일, 훈련을 마치고 막 도착한 부대에서의 첫날밤, 제주시에 있는 2XXX 전경부대에 도착해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 불침번을 서다 이유 없이 당한 구타는 만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그 날짜를 기억할 정도로 악감정으로 남아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입에 게거품을 물고 정말 개 패듯이 발길질을 해대던 조XX 경장(직업경찰이었음)의 구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거릴 만큼 화나고, 복수를 하고 싶을 만큼 원한으로 남는 감정적인 폭력이었다.

왜 맞았는지를 알 수 없는 폭력,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복수를 하고 싶을 정도로 감정으로 남게 되는 폭력은 이렇듯 추억조차도 살벌하게 하니 슬프고도 잔혹한 과거다.

군 생활을 하면서 이래저래 맞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지만, 맞을 당시에는 물론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감정이 생기지 않는 매(구타)라면 '군대 다녀와 사람(인간)됐다'는 소리를 낳게 하는 필요악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더구나 필자의 경우처럼 인생의 굴레가 될 수도 있었던 전과(?)를 막아 주는 매라면 개개인의 인생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감정으로 남지 않고, 후유증이 없는 매라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군부대 내에서의 구타를 옹호하거나 찬성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경우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야기 하는 것임.



태그:#전투경찰, #구타, #탄대, #잠복호, #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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