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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중화상을 입은 이후 39살까지 32년 동안 ‘괴물’처럼 살아왔다. 도무지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던 그녀는 동화처럼 다가온 한 한국인 의료봉사대에 의해 구원돼 새 삶을 눈앞에 두고 있어 화제다.

 

특히, 최근 경기도 이천의 냉동창고 화재사고로 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돼 후진타오 국가주석까지 나서는 등 한중관계가 먹구름이 끼는 상황에서 이 같은 위홍씨의 사연은 양국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지난 1975년 심양 지진으로 얼굴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중화상을 입었던 중국인 위홍씨는 지난 2007년 8월 부산의 국제재난구호단체인 재단법인 그린닥터스의 도움으로 한국에 와 지금까지 서울백병원과 부산센텀병원, 서면메디칼정근안과 등에서 얼굴 성형재건술, 손가락 미세수술 등을 받았다.

 

현재 서면메디칼정근안과(원장 정근·그린닥터스 상임공동대표)에서 6개월째 한국 병원생활을 하고 있는 위홍씨는 매사 적극적이고 무척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서면메디칼정근안과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때론 장난기까지 보여 중화상 환자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라고.

 

한국 입국 이후 남편 진언원씨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부부간의 애정도 각별하다. 남편 진씨는 처음 선보던 날 위홍씨를 보고 놀랐으나, 이내 동정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진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배필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 듣고 이해를 했으나, 삼촌들이 극구 반대했다. 삼촌들은 위홍씨 집에서 열린 이들 부부의 결혼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로의 깊은 신뢰 속에 맺어진 배필이어서인지 한국에서도 늘 붙어 다닌다.

 

이들 부부는 서면메디칼정근안과 3층 병실에서 다복하게 지내고 있다. 매일 남편이 손수 지어준 밥으로 식사를 하고, 남편의 보호 속에 외출을 한다. 위홍씨에 대한 진씨의 사랑은 그들의 생활 속에 잘 묻어있는 것이다. 통역자를 통해 나중에 안 내용이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진씨는 아내 위홍씨를 사랑하고 있고, 심지어 존경한다고 표현했다. 본인보다 더 현명하고 똑똑한 아내, 자식교육에도 열정적이고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내를 보면 존경심이 생겨난다고 했다. 서면메디칼정근안과 간호사들은 이들 부부를 잉꼬부부라고 부르며, 친자매처럼 따르고 있다. 그래서 조만간 귀국할 위홍씨와의 이별을 앞두고 서운해 하고 있다.

 

서울백병원에서 한달간 입원한 이후 2007년 9월 중순부터 부산 서면메디칼정근안과에서 수술 회복과정을 보내고 있는 위홍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구경을 했다. 지난해 추석 전에 해운대와 광안리해수욕장을 찾은 위홍씨는 푸른 바다를 보고는 어린 아이처럼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해 추석 땐 부산에 거주하는 한 중국인 부부의 도움으로 경주 나들이도 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매주 일요일이면 서면메디칼정근안과 지하 1층 아트홀에서 열리는 ‘중국인 유학생 예배’에 참석해 동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처럼 쾌활하고 장난기 있는 위홍씨에게 불행이 찾아든 때는 지난 1975년. 1969년 2월3일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위홍씨는 처음엔 해바라기씨처럼 가냘프고 곱상한 얼굴로, 동네에서 꽤 예쁜 소녀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계란형 얼굴이라고 표현하는 얼굴형을 중국 심양에서는 해바라기씨를 비유해서 표현한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위홍씨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5년 2월 4일 작은 설날 저녁 7시 36분경 리히터 규모 7.3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당시 지진 피해지역만 760㎢, 사망자 2041명에 이를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만일 예보를 제 때 하지 않았다면 인명피해만 해도 10만명에 달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중국 당국의 설명이었다.

 

온 마을은 지진경보로 긴장상태가 되었고 위홍씨 가족들도 볏짚으로 만든 임시대피소에 들어가 숨었다. 내부가 캄캄했으므로 우홍씨의 아버지는 양초를 준비해서 실내를 밝혔다. 약 2시간 정도 대피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루한 나머지 볏짚에서 나왔다.

 

그 때였다. 온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보되었던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우홍씨의 아버지는 재빨리 볏짚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볏짚 안을 보고 기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면서 켜놓았던 양초가 넘어지고 볏짚도 넘어지면서 불이 붙었고 마른 볏짚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영문을 모르던 7살의 어린 소녀 위홍은 불이 붙은 볏짚에서 동생을 살리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위홍씨와 그녀의 동생 몸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붙어 있었고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급히 그들 둘의 불길을 끄고 보니 이미 동생은 숨져있었고 위홍은 사경을 헤매며 심한 화상으로 고통 속에 빠져 들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하였으나, 귀엽고 사랑스럽던 어린 위홍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화상으로 온 얼굴은 괴물처럼 흉측하게 변했고, 눈 주변의 살이 익어 상처가 아물면서 눈을 덮어버렸고 더 이상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손의 형태도 없어지고, 귀도 사라지고 겨우 귓구멍만 남게 되었다. 코도 입도 모두 더 이상 사람의 형태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되어버렸다.

 

 

그런 위홍씨에게 1991년 새로운 삶이 찾아온다. 그 주인공은 바로 지금의 남편 진언원씨(43)였다. 위홍씨와 진언원씨는 진씨의 친척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앞을 볼 수 없었던 그녀는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남편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 만나서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참 고운 남자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그들은 결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날려버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1993년도 첫 번째 눈 수술을 시도할 때도 늘 남편이 함께 해주었고 지금도 매일 매일 남편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살아가고 있다. 매일 남편이 손수 지어준 밥으로 식사를 하고, 남편의 보호 속에 외출을 한다. 위홍씨에 대한 진씨의 사랑은 그들의 생활 속에 잘 묻어있는 것이다.

 

그린닥터스가 위홍씨를 만나게 된 것은 지난 2007년 7월 중국 요동을 목적지로 한 고구려 의료대장정이었다.

 

그 당시 중국 심양시 동릉구 만융촌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데, 특이한 환자가 산부인과 진료실을 찾아왔다. 화상으로 몰골이 일그러진 환자였다. 그린닥터스 대원들은 대부분 충격적인 그녀의 모습에 전율했다. 파키스탄 대지진, 인도네시아 대지진, 스리랑카 쓰나미, 러시아, 인도, 중국의 다른 여러 지역, 필리핀 등 세계 수많은 지역을 의료봉사활동을 해 온 그린닥터스 대원들이었지만 그런 끔찍한 모습의 환자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머리뒤쪽에 약간 남아 있었고, 왼쪽 눈은 눈 형태는 있었으나 검은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눈은 피부로 덮인 채 조그마한 구멍만 양쪽으로 두개가 나 있었다. 귀는 보이지 않았으나 자세히 보니 구멍만 있었고, 입은 닫힌 채 열리지 않고 앞니만 네 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코는 형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콧구멍만 두개가 보였다. 피부는 화상흉터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손도 양쪽모두 없었다.

 

그린닥터스 대원들은 즉시 회의를 하고, 인도주의와 함께 한중 우호협력 증진에 보탬이 되고자 위홍씨를 한국으로 초청해 화상 재건수술을 통해 제2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2007년 8월경 그린닥터스는 위홍씨를 데려오기 위해 정근 상임공동대표 일행을 중국 심양에 보냈다. 생각대로 위홍씨 가족은 무척 가난했다. 한 달에 한국 돈으로 1만5천원 정도의 국가 지원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가난에 힘겨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중국 땅에서 흔치 않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 말고도 그들 부부를 지탱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잘생긴 15살 중학생(심양45중학교) 아들이었다. 무척 총명하게 생긴 학생이었다. 공부도 잘해서 반에서 최상위급이라고 한다. 위홍씨는 아들을 강하게 키워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아빠가 한국으로 수술을 받으러 떠난다는데 전혀 눈물도 흘리지 않고 잘 견뎠다. 엄마 위홍씨에게는 “엄마가 회복돼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겠다”며 안심시키는 든든한 모습도 보였다.

 

귀국 즉시 위홍씨는 얼굴 재건성형을 위해 서울백병원에 입원했다. 그린닥터스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는 백낙환 인제학원 이사장의 배려로 가능했다. 각종 검사를 거쳐 수술에 들어갔다. 일단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수술이 입을 좀 더 벌려 음식물 섭취를 좀 더 용이하게 해줌으로써 입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수술이었다.

 

X-RAY상의 사진으로 보아 생각보다는 위턱과 아래턱이 벌어져 있어서 더 나아보였다. 턱관절과 위턱, 아래턱 구조가 퇴행해서 움직임이 어려우면 정말 힘든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입을 벌리는 수술을 해도 별 효과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점이 많이 들어났다. 피부구조가 너무 빈약해서 입 위쪽의 피부를 아래로 더 내려줄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마취가 문제였다. 마취는 생명과 바로 연관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먼저 입을 통해서 호스를 입을 통해 넣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고, 코로 호스를 넣을 수 있을지 등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비인후과에서는 위홍씨의 상태를 보고 마지막 수단으로는 목에 구멍을 내야한다고 했다. 또 치과에서는 앞니를 호스가 지나간다 하더라도 아래 치아가 가로막고 있으므로 호스를 직선으로는 삽입할 수 없고 굴곡을 주어서 삽입해야 한다고 했다. 일단 수술을 하면서 입을 조금 더 벌려주고 바로 호스를 삽입해서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의료진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위홍씨의 얼굴 재건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성형을 통해 그녀는 눈꺼풀이 열렸고, 입도 벌어졌다. 제대로 쓸 수 없는 손과 감긴 눈도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특히, 눈의 경우 시력회복이 가능한지 여부가 핵심이었다. 일단 감겨 있는 오른쪽 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어떤 의사는 일단 1차 수술에서 왼쪽 눈에 인공각막을 이식해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오른쪽 눈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부산에 온 위홍씨는 2007년 9월말경 부산 수영구 부산센텀병원에 가 미세접합수술을 받았다. 2, 3번째 손가락의 마디를 떼 내 엄지와 약지에 각각 붙이는 수술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위홍씨는 요즘 고향 중국 심양시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고마운 이들과 이별을 하자니 너무 아쉽고 싫지만, 고향에 홀로 두고 온 외아들 생각에 더 있을 수가 없다. 긴 한국생활 동안 수차례 아들과 통화를 했지만, 그래도 늘 허전하기만 한 그녀였다. 몸이 성치 않은 상황에서 키운 아이였기에 소중하기는 더 했다. 아이를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기도 했다. 화상으로 손가락이 녹아 없어진 손으로 아이의 기저귀를 간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우랴.

 

위홍씨는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까지 시켜준 그린닥터스 관계자들이 너무 고맙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면서도, “손가락이 회복되면 아이와 함께 컴퓨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따라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진한 아들 사랑을 보여줬다.


태그:#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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