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가입하기
▲ 광개토태왕의 동상과 태왕비 구리시 교문동 미관광장에 서 있는 세계 유일의 광개토태왕 동상과 그 옆에 세워질 태왕비(이미지 합성)
ⓒ 구리시

관련사진보기


우리 민족 사상 최고의 국운 융성기가 어느 때였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배달민족의 상무정신을 드높인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시대를 꼽을 것이다. 반도의 몇 배나 되는 드넓은 만주벌을 손안에 넣고 민족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영락 永樂)를 쓴 태왕의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고 능은 국내성(집안)에 있다.

구리시 광개토태왕 동상 옆에 완벽복원

태왕의 능 옆에 서 있는 태왕비(碑)는 서기 414년 장수왕 3년에 세워진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l.53m의 거대한 사면석비(四面石碑)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인 중국에서도 광개토태왕비를 가장 큰 석비로 인정하고 있다.

중국에 다녀온 분들은 알겠지만 태왕비를 민족의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참배를 가는 우리와는 달리 중국 사람들은 태왕비를 돈 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개토태왕 동상을 세운 경기도 구리시는 동상 옆에 실물크기의 광개토태왕비를 오는 4월 말까지 복원하기로 하고 지난 28일 비문의 첫 문장인 '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중 첫 글자인 유(惟)자를 비석에 새겼다. 

남한에서는 제일 많은 1500여점의 고구려 유물이 나온 구리시는 고구려가 4~5세기 초 아차산 일대에 보루성을 쌓고 백제와 대치했던 곳으로 태왕비 비문에 "영락 6년, 태왕이 아단성(구리시 아차산)을 얻고 아리수(한강)를 건넜다"는 문구가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 비문의 첫 글자인 '유(惟)'자 광개토태왕비문의 첫자인 '생각할 유(惟)'자를 시각했다.
ⓒ 송영한

관련사진보기


태왕비에 미쳐 산 전홍규 전각가가 비문 새겨

태왕비에 새겨진 글자는 총 1804자, 이중 판독이 가능한 1775자를 새길 한국 금석문 각자예술 연구원의 향석(香石) 전홍규(59) 원장은 "이번 태왕비 복원의 고비마다 태왕의 영령이 도와주셨음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까지 붓을 들고 서예의 길을 가던 서예가였던 그는 70년대 중반 태왕비의 위조 문제로 동양 삼국이 들끓자 붓 대신 정을 잡고 초정 권창윤 선생께 사사 받아 금석학의 외길을 걸어왔다.

전 원장은 20여 년 전부터 실물크기의 태왕비를 복원하기로 작정하고 백방으로 돌을 구해봤지만 마땅한 돌을 구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돌 구하기에 골몰했던지, 한 번은 자다가 현몽해 남한강가에서 태왕비와 똑같은 모양의 한자 남짓한 청오석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100여개의 태왕비를 복원한 전 원장은 돌가루와 시멘트를 섞어 실물크기의 태왕비를 만들기도 했다. MBC <태왕사신기> 마지막 회에 나온 태왕비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전 원장은 전국 각 청오석 채석장마다 태왕비의 실물크기만 한 돌을 찾아 헤매 인 지 20여 년 만에 올해 초 보령의 한 채석장에서 100여 톤의 청오석이 발견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돌을 인수하자마자 구리시에서 "태왕비를 복원하겠다"는 부탁이 왔다니, 태왕의 영령이 도와주셨다는 말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윽고 자문위원회의 고증을 거쳐 100여 톤의 원석을 이 고장에 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이재순 석장(石匠)이 다듬고 다듬어 50여 톤의 비신(碑身)을 완성했다. 집안시에 있는 원 비석의 재질은 응회암으로 같은 화강암 계통이지만 밀도가 청오석보다 낮아 10여 톤의 무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 태왕비의 위용 6.3m에 50톤이 넘는 태왕비 전면에 복각할 탁본을 붙힌 모습
ⓒ 송영한

관련사진보기


일본인 위조 이전 탁본 구해, 진실까지 복각

태왕비에 새겨진 글씨체는 전서·해서·예서·행서·초서 등 적게는 5체, 많게는 7개의 글씨체가 섞여있다. 전 원장은 "금석학계에서 5개 이상의 글씨체가 복합된 비석은 태왕비가 유일하다"며 "태왕비의 글씨 크기는 사방10~15cm로 평균 13cm인데 이 같은 오차는 종이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돌 위에 직접 먹줄을 치고 글씨를 새겼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돌가루와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실물크기 모형에 글씨를 새길 때 두 사람이 먹줄을 튕겨보니 정말 똑같이 오차가 나더라는 것이다.

이번 태왕비 복원에 사용한 탁본은 일본 강점기 때 일본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위 사코 가케노부(酒勾景信)등이 석회를 발라 위조한 선명한 탁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중국에서 뜬 탁본을 구해 위조 이전의 모양을 완벽하게 복원할 예정이며 중국인들이 때운 비의 굴절부분도 원래대로 복원할 생각이다.

전 원장은 "복원할 태왕비는 글씨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풍화돼 마모된 부분까지 탁본대로 복원할 것이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일본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신]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부분도 위조 이전의 모습을 찾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 시각하는 전홍규 원장과 박영순 시장 박영순 구리시장(왼쪽)이 전홍규 한국 금석문 각자예술 연구원장의 도움으로 시각하고 있다.
ⓒ 송영한

관련사진보기


동상, 태왕비, 고구려역사기념관에 이어 테마공원까지

민선 2기 때 광개토태왕 동상을 세우고 4기 들어 태왕비를 복원하게 된 박영순 구리시장은 "재임 시에 호태왕의 동상과 비를 세우게 돼 영광"이라며 "이미 국민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고구려역사기념관과 고구려 테마공원까지 완성해 중국에 빼앗긴 고구려 역사를 되찾아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시장은 "고구려가 망할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았다고 알려진 보장왕의 둘째 아들 약광(若光)의 60대손인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의 코마(高麗)신사의 궁주(宮主)를 비롯한 약광의 후손들이 태왕비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더욱 뜻 깊은 제막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태왕비가 세워질 구리시 교문동 미관광장 바로 옆에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유적지와 <태왕사신기>의 세트장인 '고구려 대장간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찬란했던 문화를 이어받아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우뚝 설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구리넷(www.gurinet.org)에도 보냈습니다.


좋은기사 후원하고 응원글 남겨주세요!

좋은기사 원고료주기

저는 경기도 구리에서 활동하는 경기인터넷뉴스 기자입니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시작으로 2011년 조선왕실의궤와 2013년 문정왕후 어보 환수를 주도한 (사)문화재제자리찾기 이사로 혜문스님과 함께 해외 ...더보기

시민기자 가입하기

© 2016 OhmyNews오탈자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