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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메가톤급 폭로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대한민국이 ‘뇌물 공화국’이라는 점은 새삼스럽고도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번 폭로는 권부를 향한 재벌그룹의 뇌물공세가 어느 정도의 수위에 이르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관료사회에 정책결정권이 집중되고 또 관료제에 대한 견제가 취약한 나라일수록, 정부 관료들에 대한 뇌물공세가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이 점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대형 뇌물 스캔들이 종종 터지곤 하지만, 한국의 뇌물 문제에는 좀 색다른 측면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뇌물과 선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때때로 뇌물 공여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뇌물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정부가 청나라 관리들을 상대로 벌인 ‘낯 뜨거운’ 뇌물공세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정부의 '뇌물공세'

다음에 소개하는 사료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조선 국왕과 대신들이 너무나 이상스러울 정도로 뇌물을 당연시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사관(史官) 역시 뇌물에 관한 위정자들의 코멘트를 별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제2차 조선-청나라 국경조사에 나선 청나라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은 숙종 38년(1712) 4월 11일 백두산정계비에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유명한 글귀를 ‘시원스럽게’ 새긴 뒤에 내려왔다. 사냥꾼 출신으로서 평소 ‘생각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목극등은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끝내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위에서 “목극등이 ‘시원스럽게’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돌아갔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한 표현은, 목극등이 돌아간 뒤에 조선정부가 내부적으로 보인 반응에 근거한 것이다. 목극등의 ‘시원스러운’ 태도가 조선 위정자들에게는 모종의 ‘감동’을 준 모양이다. 

목극등이 돌아가고 나서 6개월이 지난 그 해 10월 10일, 조선정부에서는 숙종의 주재 하에 참으로 해괴한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생’하고 돌아간 청나라 대표단에게 뇌물을 얼마나 줄 것인가가 회의의 의제였다.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10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대신과 비변사 관리들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영의정 이유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꺼냈다.

“목극등 사신이 왔을 때에 대통관(大通官) 홍이가(洪二哥) 쪽에 주기로 한 은화를, 지금 액수를 정해서 보내줘야 합니다. 작년에 조사(1차 조사, 인용자 주)할 때에도 대통관 측에 천 냥을 준 일이 있으니,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선물을 준다면 만사를 잘 주선해준 뜻에 대해 사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의정 이유의 제안은 청나라 통역관인 홍이가에게 은화 천 냥을 주자는 것이었다. 홍이가라는 사람은 목극등과 함께 파견된 6품 통사(통역관)였다. 목극등이 파견되었을 때에 조선정부에서는 “잘 도와달라”며 홍이가에 뇌물을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현행 한국 법률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형법 제129조의 사전수뢰죄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유의 말에 따르면, 전년도인 1711년의 제1차 조사 때에도 조선측은 청나라 대표단에게 뇌물 공세를 벌인 바 있다. 조선측은 청나라 통역관들에게 뇌물을 주어 목극등의 조사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하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회의에서 청나라 통역관에게 줄 뇌물의 액수를 정해

여기서, 이런 우려를 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간도문제가 아직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마당에, 한국측에 불리한 사료를 이처럼 공개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지난날 조선정부가 뇌물공세를 벌인 점은 향후 터질지도 모르는 간도분쟁에서 결코 한국을 불리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1880년대에 있었던 조선-청나라 국경분쟁에서도 청나라 측은 “청나라 관리들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백두산정계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점은 간도분쟁의 핵심 쟁점과 무관한 사항이다.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간도분쟁에서 이것이 혹시라도 문제가 된다면, 창피를 당하는 쪽은 조선 숙종보다는 청나라 강희제일 것이다.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황제 중 하나인 강희제가 조선측의 뇌물공세에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중국인들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할 것이다.

다시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청나라 통역관에게 뇌물로 은화 천 냥을 주자는 영의정 이유의 제안에 대한 다른 참석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한다.

형조판서 박권 : 천 냥은 너무 과합니다.
병조판서 조태채 : 다른 나라 역관에게 은화를 뇌물로 주는 것은 사안이 심히 불가합니다.
영의정 이유 : 조태채의 말이 참으로 옳기는 하지만, 이미 중간에서 힘을 쏟은 일이 있으니 작년의 예에 따라 선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차통관(次通官) 쪽에도 약간의 물건을 들여보내야 합니다.
공조판서 조태구 : 조정에서 선물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는 나라의 체통이 아닐 것입니다. 사신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나누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기서, 영의정 이유의 코멘트에 나오는 ‘차통관’은 홍이가 밑에 있던 통역관인 무품통사(無品通事) 여수(余殊)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 대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느 대신도 영의정 이유의 뇌물공여 제안에 대해 반대의 뜻을 피력하지 않았다. “어찌 조정의 공식 석상에서 뇌물을 운운합니까? 그런 문제는 사석에서 논의합시다”라고 말한 대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들 “너무 과하다, 은 대신 다른 것을 주자, 조정에서 주는 거라고 말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대신들의 뇌물논의에 임금은 어떤 반응을?

그럼, 이러한 대신들의 논의에 대해 숙종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경들은 어찌 그런 일을 공석에서 논한단 말입니까?”라고 했을까? “그런 이야기는 침전에서 합시다”라고 했을까? 숙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600냥을 보내되, 500냥은 대통관에게 주고 100냥은 차통관에게 주는 것이 옳겠다.”

이로써 조선정부의 어전회의에서는 청나라 대표단에게 감사의 뇌물을 보내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일국의 어전회의에서 ‘불법적’ 사안이 ‘합법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선물’이라고 하는데도 병조판서 조태채가 눈치 없게 ‘뇌물’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아무도 이 표현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숙종도 조태채의 표현을 나무라지 않고 은화 600냥을 보내주라는 말만 했다.

흥미로운 것은, 누구누구에게 각각 얼마씩의 뇌물을 주라면서 구체적 액수까지 정했다는 점이다. 대통관 홍이가가 뇌물을 받아 하급자에게 얼마를 떼어주도록 하는 게 자연스러울 법도 한데, 조선정부의 어전회의에서는 아예 구체적 액수까지 정해 버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재미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사관이 이런 진풍경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역사에 기록했다는 점이다. 숙종이 주재한 그 날의 회의에 참석한 사관도 이 광경을 기록했고, 숙종 사후인 경종 연간에 그 기록을 토대로 실록을 편찬한 사관 역시 조선정부의 치부를 숨김없이 기록했다.

어찌 보면, 꽤 솔직한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뇌물공여를 결정한 위정자들이나 이런 광경을 빠짐없이 기록한 사관들이나 모두 다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목극등이 돌아간 뒤에 모종의 성과를 자축하는 고양된 분위기라서 “뇌물을 주는 게 어떠냐? 그래! 뇌물을 주자”는 등의 대담한 말들이 부지불식간에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처럼 자연스럽게 뇌물 운운할 수 있는 것은 평소에 조선 위정자들이 뇌물의 불법성에 대해 무감각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공식 역사에 뇌물공여 사실이 버젓이 기록될 수 있었던 데에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지금이나 그때나 한국인들이 뇌물과 선물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뇌물공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

영의정 이유의 말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선의 위정자들은 ‘중간에서 힘을 써준’ 청나라 통역관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불법이건 합법이건 간에 나 혹은 우리에게 고맙게 해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조선의 위정자들도 정적을 숙청할 때에는 뇌물문제를 걸고 넘어졌지만, 막상 나 혹은 우리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위와 같이 뇌물과 선물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나 혹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뇌물공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풍경을 보면, 조선 후기의 과거 시험장에까지 밀어닥친 뇌물 풍조의 진원지가 어디였는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층조차 뇌물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점에 대해 무감각했으니, 일반인들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더 이상 부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조선도 ‘뇌물 공화국’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뇌물공세가 부득이하거나 혹은 옳다고 여겨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위의 사례에서처럼 뇌물공여를 공식적·합법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공식 역사서에까지 버젓이 남기는 것은 솔직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뇌물에 대한 관대함의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같이 나 혹은 우리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뇌물공여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전통이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뇌물 공화국’으로 만드는 요인은 아닐까.


태그:#뇌물, #김용철, #백두산정계비,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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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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