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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령련 기자는 충남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컴퓨터를 켰다. 언제나 그랬듯 바탕화면 가족사진이 맨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아빠가 한국에 오시면서 가지고 온 가족사진을 디카로 다시 찍은 어설픈 화질의 사진이다. 자상한 내 부모님과 내가 제일 아끼는 남동생의 해맑은 미소, 내가 그 속에 같이 설 수 없었음이 너무 안타깝지만 내가 없는 빈자리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이 더 느껴지는 사진이다.


엄마랑 동생을 못 본지도 정확히 1년하고 2개월 29일(총455일)이 지났다. 아빠는 한국에서 늘 혼자였던 내 뒷바라지를 위해 직장생활을 접으시고 얼마 전 입국하셨고 엄마는 중국에서 곧 대학생이 되어가는 남동생을 든든히 지켜주고 계신다. 혼자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아빠와 엄마는 둘 사이 잠시 동안의 이별을 감수하며 기꺼이 자식들의 외로움을 반반씩 채워주고 계신 것이다.

 

 

중국에서는 왜 가족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몰랐던 것일까? 스무 살이 되도록 남동생과 같이 방을 쓰는 게 싫어서 집 투정, 방 투정을 부렸던 나였고 아침마다 어린 동생이불을 개 줘야 하는 것도, 방 정리를 누나인 내가 꼭 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도 너무 싫었다.

 

하루빨리 언니 오빠들처럼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생활을 해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꿈에도 그리던 기숙사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자유를 너무나도 갈망했던 나에게 대학은 천국과 다름이 없었다. 늦잠을 자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유흥거리를 누비며 돈을 써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용돈만 떨어지면 아무런 미안한 마음도 없이 뻔뻔하게 아빠 엄마한테 손 내밀기 일쑤였다.


그렇게 철부지였던 나를 크게 해 준건 한국에서의 나날들이었다. 난생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아르바이트 체험은 부모님들이 돈을 얼마나 힘들게 버는지에 대해 실감나게 해주었고 낯선 환경, 낯선 침대에서의 불면증은 동생과 함께 쓰던 아담한 방과 침대를 사무치게 생각나게 만들었다. 더욱이 몸이 아플 때 그 외로움은 몇 배로 침입해왔다. 그때면 옆에서 약 챙겨주시던 엄마도, 쫑알대던 동생도 뼈저리게 그리웠다. 


가족은 내게 옆에 항상 있었기에 그 소중함을 느낄 수 없었던 무언의 사랑과 힘을 가지고 있는 헌신적인 존재였다. 멀지 않은 시간 뒤에 네 식구가 상봉하면 그땐 두 번 다시 가족의 소중함을 저버리지 않으련다. 내가 한 가족의 딸로서의, 한 동생의 누나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사랑과 정성을 베풀 것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내가 없는 가족사진, 그 빈자리에는 이제 우리 가족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한 소녀가 해맑은 미소로 서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 너무 보고싶습니다. 우리 가족 사랑합니다.


태그:#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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