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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봉우리가 '피츠로이'(아르헨티나 샬텐)
▲ 아! 파타고니아 보이는 봉우리가 '피츠로이'(아르헨티나 샬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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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호수(피츠로이 트래킹에서)
▲ 빙하의 맛! 빙하호수(피츠로이 트래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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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돌고래다!”

재빨리 뱃머리로 달려갔다. 돌고래 두 마리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슈슉 슈슉’ 물살을 뚫고 수면 위로 날아올랐다가 바다 속으로 미끄러졌다.

녀석들은 투명한 햇살을 넘나들며 바다 속 세상과 바깥세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흔들어놓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뱃길을 안내라도 하겠다는 걸까….

우린 마젤란 해협을 건너는 중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때까지 파타고니아 지방을 한 달 가까이 여행하고 있었다. 파타고니아 곳곳에 흩뿌려진 빙하호는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빙하는 이곳이 남극으로 가는 길목임을 말해 주었고, 안데스는 대륙을 종단한 마지막 기운으로 나그네를 땅 끝까지 인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남위 55도 남미대륙 최남단의 도시 우수아이아에 도착했을 때 아내와 난 곧바로 항구로 달려 나갔다. ‘Fin del Mundo!(세상의 끝)’이라고 적힌 큼직한 입간판이 서 있었고, 남극을 오가는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때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난간 위에 앉았다. 주둥이가 빨간 녀석이었다.

“안녕 친구야! 난 여행자야. 넌 날 수 있으니까 남극에도 가봤겠구나?”

하지만 갈매기는 지구반대편에서 온 이방인이 귀찮았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쳇! 그렇게 성가셔 할 것까진 없잖아? 여기까지 오는데 2년이나 걸렸단 말이야! 난 갈매기에게 투정까지 부릴 만큼 감상에 젖어들었다. 오후의 햇살 때문이었을까. 갈매기가 날아간 뒷자리에서 하얀 여객선들이 눈부셨다.

(우수아이아)
▲ 남극으로 가는 항구 (우수아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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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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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배를 타고 곧장 700km만 가면 남극인데….”
“물론이지! 1인당 최소 4000달러만 낸다면!”


아내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아니 남극에서 흘러온 빙하 물이었을지도. 그녀는 쯧쯧 가엾다는 인상을 지어보였다. 그랬다. 남극은 가난한 여행자에겐 여전히 멀리 있었다.

감상을 털어내고자 이 땅 끝에 살고 있다는 한국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Textil Corea’라는 간판이 걸린 옷가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우수아이아에도 한국 사람이 산다는 얘길 처음 들었을 때부터 꼭 만나보고 싶었었다. 무슨 사연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두 분 한국에서 오셨나 봐요?”

인사도 잠시, 지긋한 나이의 아주머니는 가게 안쪽에 빈 방이 하나 있다며 호텔에서 지낼 것 없이 배낭을 들고 오라 하신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뜻 방을 내주고, 또 오란다고 바로 짐을 꾸려서 떠나는 우리들. 호스텔의 서양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남미에서는 한국인들이 옷가게를 하는 경우가 많아 도심을 걷다 보면 가끔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열이면 열 반갑게 맞아주고 선뜻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그리하여 여행자는 굶주린 김치냄새에 여독을 달래고 이민자들은 여행자가 실어온 고국 냄새에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다.

(우수아이아)
▲ 카드놀이 나는 펭귄가족 (우수아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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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 이민가정은 한국드라마를 쌓아두고 산다는 거다. 이곳 아주머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우리 부부가 집 떠난 지 2년이라는 말을 들으시더니 그날 저녁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가지고 오셨다.

“아니, 아주머니! 여기까지 비디오가 배달되나요?”
“지난달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일 있어 갔다가 빌려왔어요. 여기 살면 이것도 낙(樂)이라니까요.”


어찌 그 맛을 모르겠는가! 타국에서의 한국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다. 모국어에 대한 허기를 달래는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익혀도 현지 언어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는 어떤 느낌을 드라마를 통해 나누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여행자 부부는 이틀 동안 두문불출 ‘금순이’와 씨름해야 했다. 세계 최남단의 땅 우수아이아에서, 남극으로 항해하는 여객선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한국 발 ‘금순이’와 이틀 밤을 샐 줄이야, 우린들 어찌 알았으랴! 그때 우리 부부는 한국드라마에 대한 목마름만으로는 거의 이민자 수준이었다고 해야 할까?

우수아이아에는 한국인이 한 가정 더 살고 있었다. 2대째 뿌리박고 ‘Vivero los Coreanos(한국인들의 농장)’을 운영하는 문병경씨 부부. 농장은 우수아이아에서는 꽤 유명해서 길을 물어보면 누구나 알려줄 정도였다.

(아르헨티나 칼라파테)
▲ 파타고니아의 자랑! 모레노 빙하 (아르헨티나 칼라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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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은 눈 덮인 산 아래에 있었는데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체구가 작고 침착해 보이시는 할머니가 단번에 우릴 한국 사람으로 알아보고 반기셨다. 문병경씨의 어머님이다.

“그 양반이 살았을 땐 시내에서 한국여행객을 만나면 죄다 데려다가 재워주곤 했지요.”

10월 말이면 남반구 여름의 시작인데 비닐하우스 안은 난로가 타고 있었다. 그리고 난로 뒤편으로 각양각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할머니께서 차를 타 주시며 오랜만에 찾아온 고국여행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신다.

“1970년이었지요. 그 양반이 여기로 여행 왔다가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본 거예요. 옳아, 이 동토에도 꽃이 피네, 하시고는 채소농장을 하겠다는 거예요. 주변에서 미쳤다고 그랬지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꽃이나 채소는 비행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실어다 먹는 걸로만 알았거든요. 다행히 군부대에서 땅을 빌려줬어요. 이 추운 땅에서 처음으로 채소를 길러보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기특하기도 했겠지요. 그렇게 우린 땅 일구는 일부터 시작했지요.”

고 문병희 할아버지는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는 교사를 하셨다고 한다. 농사를 짓던 분도 아니었는데 얼마나 힘드셨을까. 마침내 두 분은 몇 년의 실패 끝에 채소를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곧 화초까지 키울 수 있었다.

그 후 우수아이아 주민들은 싼 가격에 싱싱한 채소를 맘껏 먹고 화초까지 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농장’이 유명한 이유였다.

우수아이아 '한국인들의 농장'
▲ 땅끝에 사는 한국사람들 우수아이아 '한국인들의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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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화초를 사러오는 주민들은 끊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나 봐요, 라는 내 말에 이번에는 문병경씨의 부인인 임씨 아주머니가 대답한다.

“그래서 쉬지를 못해요. 어쩌다 쉬기로 한 날에도 마음이 영 불편해서 오후에라도 나와 보면 꼭 몇 사람씩 서성대고 있거든요.”

그리곤 돌아가신 아버님 자랑이 이어진다.

“우리 아버님 상 많이 받으셨어요. 87년엔 (한국) 대통령표장두요. 여기뿐만 아니라 한국 신문에도 많이 나고 그러셨는데, 젊은 분들이라 잘 모르시나 봐요?”

그리고 남편 자랑으로 이어진다. 여러 번 상을 받았는데 다음 주에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서 ‘올해의 농업인’상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조금 실례인 줄 알면서도 굳이 짓궂은 질문을 하고야 만다.

“그런데 아주머니, 아저씨는 아버님의 가업이니까 그렇다지만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시집을 오셨어요?”


“그러게요. (웃으며)그 땐 왜 그랬는지 몰라요. 언니 소개로 한 번 만나보고는 한국에서 바로 이곳까지 시집을 왔으니까요. 처음엔 춥고 낯설었는데 지내다보니 여기가 좋아졌어요. 크게 욕심내지 않으면 이만한 곳도 없어요. 두 분도 가시지 말고 우리랑 농장하면서 살아요. 네?”

(아르헨티나 샬텐)
▲ 파타고니아, 안데스의 끝자락 (아르헨티나 샬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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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농장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문씨 아저씨는 남자들끼리 따로 볼일이 있다며 차를 타라고 했다. 그가 나를 태우고 간 곳은 다운타운의 생맥주 바(bar)였다. 단골인지 바텐더에 앉아 있는 친구들과 요란스럽게 인사를 나누고서 자리에 앉았다.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응, 매일. 여기가 내 지정석이야. 일 끝나고 한 잔하는 맛에 사는 거지.”


그는 상파울로에서 사고로 죽은 형님 얘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그가 가업을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두 아들 자랑도 했다. 학교공부뿐 아니라 한국말도 잘 하며, 아버님 살아계실 때는 한문도 배웠었다고.

그는 또 예전에는 인근의 석유 때문에 한국대기업의 파견근무자가 오기도 했었는데, 최근 들어 한국여행자는 참 오랜만이라고 했다. 내가 이곳에 사는 게 어떠시냐고 물어보자 그는 조금 뜸들이다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리곤 그는 말이 없었다. 천천히 맥주잔만 기울였다. 조금 그가 쓸쓸해 보였던 것 같다. 나도 말없이 창 밖을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농장에서 기른 상추와 삼겹살에 총각김치까지 초호화 저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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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 최남단의 도시, 우수아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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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푼타 아레나스)
▲ 호수 같은 바다 (칠레, 푼타 아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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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무척 밝고 귀여웠다. 아저씨 자랑처럼 한국말 발음이 완벽했다. 아저씨는 삼겹살에 다시 맥주를 따랐다. 아주머니의 술 좀 그만 드시라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할머니는 밥 먹으라고 손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그네 부부는 포식을 했다.

그날 난 동토의 땅에서 삼겹살을 싱싱한 상추쌈에 싸먹으며, 아저씨의 말처럼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수아이아를 떠나기 전날이었다. 옷가게 아주머니와 호수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3번 도로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마지막 기차역’을 지나 바다가 가로막을 때까지. 그곳에 ‘도로이정표’가 하나 서 있었다.

‘Alaska 17,848km / Buenos Aires 3,063km’

그건 아내와 내가 1년이 걸려 달려온 길이었다. 더 이상 도로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 달려가야 할 것이다. 여태껏 고향 땅과 멀어져만 왔는데, 이제부터는 점점 고향 땅이 가까워지리라는 생각에 아내와 난 묘한 감동이 일었다.

“참 멀리도 왔네!” 
“그런데, 우린 왜 그토록 여기까지 오고 싶어 했던 걸까?”


(우수아이아 3번도로)
▲ 아메리카, 그 도로 끝에서 (우수아이아 3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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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말처럼 무엇이 그리 간절했을까. 이 땅 끝에도 대형슈퍼가 있고, 밤마다 붐비는 식당가도 있고, 일요일이면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노동조합도 있는데 말이다. 세상 여느 곳과 별 다름 없이 사람 살아가는 땅이건만…, 이곳만은 다를 거라고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땅 끝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걸까.

덧붙이는 글 |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남미여행, #파타고니아, #우수아이아, #남극,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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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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