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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아는 이가 없을 테지만 사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배웠고, 교단에서 30여 년 국어를 가르친 훈장으로,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다. 더욱이 독립운동사에 대해서는 까막눈으로 내 고장 출신의 허위 의병장을 쉰이 넘은 뒤, 그것도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가서 동북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그제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가.  

 

귀국한 뒤 사학자 강만길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무지를 이실직고하였더니, 선생은 "그것은 박 선생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셨다.

 

"남의 강제 지배에서 벗어난 민족 사회는 당연히 전체 교육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사'를 따로 가르쳐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해방 후 우리 교육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몇 해 전, 내가 교단에 섰을 때 한 학생이 대학 수시 입학시험을 치른 다음날 등교하였는데 표정이 밝지 못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구두면접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물었는데 답변을 제대로 못하였다면서 아무래도 시험에 떨어질 것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순간 '너 그것도 몰랐니?'라는 생각이 들다가 이내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50여 년을 학교 울타리에서 한결같이 배우고 가르쳐 온 나는 독립운동사를, 독립지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런 부끄러움이 뒤늦게나마 무식한 내가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지사 후손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때의 일들을 배우고 들으면서, 그 사실들을 가능한 알기 쉽게 가다듬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징검다리의 한 돌멩이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과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은 경북 구미 임은동 태생이다. 그리고 임은동에서 철길 하나 건너면 박정희 대통령 생가인 상모동이다.

 

두 마을은 서로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 지금 당장 구미 시민 100인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허형식 장군을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박정희 대통령은 100사람이 거의 다 알겠지만, 만주벌판에서 가장 순결하게 일제와 싸우다가 순국한 항일전사 허형식 장군을 아는 이는 한 사람이라도 나오겠는가.

 

나는 몇 해 전 이런 사실을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환기시키며,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앞서 쓰레기장이 된 왕산 생가부터 먼저 정화하라는 탄원서를 보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2005년 7월 8일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 초대받고 가 보았더니, 왕산 생가 터에 왕산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건너편 산기슭에다가 왕산기념관을 짓는다는 청사진을 펼쳐보였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호남의병유적지 답사기를 쓸 사람이 못 된다. 호남의병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감히 붓을 든 것은 이 시대의 글쓴이로서 사명감이랄까 소명감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이미 역사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사실에다가, 현장을 더듬으며 후손들을 만나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를 덧보태어 땅속에 묻힌 분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역할, 곧 역사의 시내를 건너는데 징검다리의 한 돌멩이 역할만 하겠다는 열정으로 감히 답사 길에 나섰다.

 

다행히 여러분께서 내 뜻에 공명하여 소매를 걷고 도와주시고 있다. 길 안내를 자청한 녹천 후손 고영준 선생, 자문을 맡아주신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 의병정신선양회 윤우 회장, 조세현 부회장, 우당기념관 이종찬 대표 등이시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선열 공훈 순서를 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

 

녹천 고광순 의병장 전적지 답사에 이어, 다음 전적지를 가고자 하였으나 승용차의 접촉사고와 고영준 선생의 몸살로 한 보름 쉰 뒤 2007년 11월 4일 다시 호남으로 갔다. 우리 문화의 장점이자 단점은 "남대문 지게꾼도 순서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답사에 앞서 여러분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대상 인물은 쉽게 정했으나 그 순서문제를 고심하다가 내린 결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열 공훈 순서를 정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어느 한 목숨 귀하지 않으랴. 그래서 대원칙은 전라남도에 이어 전라북도로, 후손 연락이 가능하고 사정이 괜찮은 곳부터 먼저 찾기로 하였다.  

 

그런 뒤 이미 선정한 의병장에 대한 사전 공부를 한 바, 맹인 백낙구 의병장의 기록을 보고는 적잖은 의문에 싸였다. 보통사람의 경우 팔이나 다리 한쪽을 상해도, 아니 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아예 병역의 면제를 받고 군 복무나 전투 중 그런 부상을 당하면 의가사 제대나 상이군인으로 명예제대를 한다. 

 

실제로 내가 전방에서 소대장을 할 때 소대원 가운데 야맹증 병사가 있어서 지휘 계통을 밟아 그를 의가사 제대시킨 바가 있었다. 그런데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의병, 그것도 용맹한 의병장으로, 끝내 일군의 총탄을 맞고 산화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할 프로에 나올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답사지 순서를 고영준 선생에게 일임하였지만, 그 기록을 보고 백낙구 의병장을 먼저 취재하자고 부탁드렸다. 고 선생도 좋다고 동의하여 그곳을 먼저 답사할 채비를 갖췄는데 강원도 내 집으로 전화가 왔다. 고 선생은 전남 광복회 등 여러 의병 후손에게 사방 수소문했으나 백낙구 의병장 후손은 끝내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국가보훈처 민족정기선양센터 공훈심사과 당당자에게 전화로 문의하였더니, 담당자는 상급 책임자를 바꿔주는데, 국가보훈처에도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에게 문의하였더니, 홍 교수 역시 후손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였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광복회 특별위원이요, 의병정신선양회 조세현 부회장의 말씀에 따르면, 2007년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분은 모두 1만972분으로 이 가운데 약 2000여 분이 훈장 미전수라고 했다. 곧 서훈 대상자의 후손이 끊어졌거나 아니면 행방불명으로 훈장도 전하지 못할뿐더러,  국가의 보훈 혜택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참 세상 고르지 못한 것은 역사를 왜곡하여 훈장을 받는 이나 그 후손이 있는가 하면, 족보나 서류를 조작하여 남의 훈장을 가로채는 이도 있고, 분명히 훈장도 받고 국가의 보훈 혜택도 받아야 할 분이나 그 후손은 광복 60년이 지나도 그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은 언론에서 이런 분의 후손 찾아주기 운동을 벌이는 것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한 방안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애초의 계획대로 맹인 백낙구 의병장을 취재하기로 하였다. 사실 이런 분을 더 심층 취재해야 되지 않는가. 그게 기자정신이요, 작가정신이 아닐까. 하나밖에 없는 그 귀한 생명을 두 눈의 시력도 잃은 장애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누가 그분의 의로운 희생을 보상해 줄 것인가. 의병을 연구한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일제에 거세게 항쟁한 의병일수록 대가 끊어지거나 친척조차도 화를 입은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은가.

 

나는 그 방법을 곰곰 생각하다가 취재의 한 방안으로, 백낙구 의병장을 연구한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와 백낙구 의병장 생애를 대담한 뒤, 그 내용을 기사로 담기로 하였다. 이 기사가 나가면 백낙구 의병장 후손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혹 연락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담을 것이다.

 

이태 전, 나는 고1 때 목 자른 군화를 준 짝을 찾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내보내자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닌, 그것도 뉴욕에서 외롭게 운명한 친구까지 누리꾼들의 도움으로 찾고는 그의 영혼을 진혼하고자 미국까지 간 전력이 있지 않은가.

 

홍 교수에게 나의 이런 제의를 전화로 말씀 드리자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우리는 2007년 11월 5일 11시 정각, 순천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2호관  514호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누가 이 맹인 의병장이나 그 후손을 모르시나요?

 

성명 백낙구(白樂九), 출생지 전북 전주, 출생년도는 모르나 1907년 12월에 일군의 총탄에 순국함. 순천 광양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함. 백낙구 의병장의 후손이나 친지 분은 제 쪽지함이나 메일(parkdo5555@naver.com)로 보내주시면 꼭 찾아뵙고 추가 취재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기사에 잘못이나 첨삭할 것이 있으면 댓글이나 쪽지함으로 보내주십시오. 확인한 다음 고치겠습니다.


태그:#백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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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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