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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간다.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 코발트빛이다. 머리 위가 쪽빛으로 물들면 마음 속도 파란 피가 흘러야 하는 법인데 그렇지 못하다. 몸이 무겁고 기분이 우울해서다.

 

내 지갑 속이 허전하다. 이 좋은 계절에 어쩌다가 마이너스 인생이 되었다. 플러스 인생을 살아도 시원찮은 판에 영점 아래 나락 속을 헤매며 허덕이다니 참 딱한 노릇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대책이 없다.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한 날은 산으로 간다. 산 속엔 용담 꽃이 한창이다. 며칠 전 내린 첫서리 한 방에 나무와 풀잎들의 물이 빠져 시들거린다. 그러나  서리를 맞으면 색이 더 선명해지는 들꽃이 있다. 용담이다. 용담만큼 쪽빛하늘을 닮은 가을꽃은 없다.

 

 

용담은 8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10월말까지 계속된다. 꽃들은 줄기와 잎 사이에서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피어난다. 작은 종을 닮아 조금만 건드려도 달랑거리고, 바람이라도 불면 금세 애절하고 가녀린 나팔 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요즘처럼 하늘색이 파랗게 물들 때가 가장 요염하고 아름답다.

 

새벽이면 입술을 벌리고 찬이슬을 받아먹으며 시리게 피어난다. 물기가 빠져나간 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보라색을 보고 있으면 뼈가 저려올 정도다. 키에 비해 줄기는 가늘어 바람이 불 때마다 쓰러질 듯하다가도 줄기차게 버티고 일어난다. 잎 가장자리는 밋밋하여 달걀처럼 원만하고 물결 모양을 하고 있다.

 

 

꽃잎이 일렁일 때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당신이 우울해 하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하고 말을 걸어온다. 또 어떤 녀석은 한 술 더 떠 “슬픔에 잠긴 당신모습을 사랑해요”하기도 한다. 얄미워 죽을 판이다.

 

산 입구에서부터 ‘우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과 자살은 미련한 자들이 저지르는 사치인 줄만 알았다. 신경증에 시달리다 주머니에 돌을 가득 담고 강에 몸을 던진 버지니아 울프, 엽총으로 세상을 마감한 헤밍웨이, 남편 배신에 시달리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은 실비아 플라스 등이 남의 일이 아님에 새삼 몸이 오싹해 온다.
 


내 인생이 어디쯤에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정리를 해본다. 오늘의 마이너스 인생이 거쳐 가야 할 응보라면 달게 받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혈압은 한 번 올라가면 떨어질 줄 모르고, 간(肝)의 열을 내고 태워봐야 자신만 속이 쓰릴 뿐이다.

 

가을을 누가 우수(憂愁)의 계절이라 했던가. 스산하고 우울한 순간을 벗어날 정답은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산을 오르다 보니 벌써 정상이다. 바위에 앉아 밑을 내려다본다. 용담 한 송이 바위틈에 피어나 가을을 닮아가고 있다. 견고하면서도 부드러운 들꽃을 피워내는 바위, 그리고 꽃 내움, 작은 들꽃 한 송이가 우울한 가을 남자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예부터 ‘용담 맛은 쓰고 성질은 차며, 혈압을 낮추고 간의 열을 내린다’ 했다. 용담 뿌리를 조금 캐어내 씹어본다. 좋은 약일수록 입에선 쓰고 몸에는 이롭다더니 금세 쓴맛이 입안 가득 돌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자신을 어찌 담금질했으면 뿌리가 이리 쓸까. 이슬만 먹고 살아도 내공을 단단히 다스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한 송이 들꽃.

 

얼마나 찬 서리를 더 맞아야 야물 찬 야생화로 피어날 수 있을까. 아직은 바위 밑 용담(龍膽)을 한참 더 씹어야 할까 보다. 하산을 하는데 싸한 풀꽃 향기가 자꾸만 따라 내려오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북한강 이야기'나 윤희경 수필방을 방문하면 고향과 시골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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