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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왕과 나>는 아예 '왕후 천하'다.
 SBS 드라마 <왕과 나>는 아예 '왕후 천하'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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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던 김은영(37)씨는 문득 뭔가 이상했다. 사극 바람 때문인지 드라마에서도 '왕후'만 실컷 봤는데, 드라마가 끝나자 나온 CF에서도 도도하기 그지없는 여자가 고개를 치켜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왕후의 자리를 내놓으시지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당한 커리어 우먼의 대명사 같던 이영애마저 CF에서 '왕후'가 돼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도도했다. 그런데 그 도도함이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도 CF도 TV는 온통 매력적인 '왕후'시대

TV 드라마와 CF에서 '왕후' 바람이 거세다. TV만 틀면 '왕후'들이 넘쳐난다. 가히 '왕후 신드롬'이라 할만하다. 그냥 넘쳐나는 게 아니다. '왕후'야 말로 여자들이 꿈꾸는 매력적인 인물로 TV를 점령했다.

가진 것 없는 여자가 돈 많은 왕자를 만난다는 '신데렐라 신드롬'보다 '왕후 신드롬'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무래도 불안한 미래를 기약하는 왕자비보다 현실에서 권력을 쥐락펴락 하는 '왕후'가 매력적이기 때문일까? TV를 켜면 당당한 '왕후'가 시종일관 미소 짓는 중이다.

CF 원조 왕후는 이영애다. LG생활건강이 만든 화장품 '후(后)'에서 이영애는 그가 지닌 전매특허 이미지인 '커리어 우먼'이 아니다. 아예 '왕후'다. 이 화장품은 브랜드 이름부터 아예 '왕후'를 가리키는 '후'다.

이 '후'는 엘지생활건강이 옛날 왕후나 왕녀들이 썼던 궁중비방을 브랜드 콘셉트로 2003년 출시한 화장품이다. 지금껏 '인현왕후 편' '소서노 편' '명성왕후 편'까지 이어지는 '왕후 열전'을 CF로 내보냈다. 현재 이 '후' CF가 내보내는 건 '왕후수업 제1강, 왕후의 기본'이다.

실제 이 화장품은 쓰는 순간 '왕후'가 되는 착각을 일으킬 장치로 가득하다. 패키지도 왕실 여인들이 사용한 보석함 모양을 패키지로 썼다. 고가 화장품이지만 소비자들 반응도 뜨겁다. 엘지생활건강 관계자는 "'후'는 궁중 한방으로 차별화를 시켜 탄생한 화장품"이라며 "런칭 뒤 매년 평균 40% 이상 성장한다"라고 말했다.

'왕후'의 유행을 예감한 걸까? CF에서 왕후는 또 있다. 소망화장품의 '다나한'도 '왕후'를 내세웠다. 모델도 <왕과 나>에서 훗날 폐비가 되지만, 여하튼 성종의 사랑을 듬뿍 받는 왕후로 예정된 구혜선이다.

"기회가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런 카피가 흐른 뒤, CF에서 구혜선은 한껏 도도한 눈빛으로 말한다. "왕후의 자리를 내놓으시죠." 그리고 카피가 이어진다. "여자의 피부는 권력이다."

여성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읽은 걸까? 화장품 CF들마저 이 화장품을 쓰면 '아름답다'가 아니라, 도도한 '왕후'가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화장품 CF에서 이영애는 '왕후의 기본'을 설파한다.
 화장품 CF에서 이영애는 '왕후의 기본'을 설파한다.
ⓒ LG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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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왕자비'보다 확실한 '왕후'가 낫다?

월화수목, 그리고 토일까지 주6일 사극시대를 이끄는 드라마는 한 술 더 뜬다. 시청률 돌풍을 일으키는 MBC SBS KBS 사극들 모두 무대가 궁궐이다. 당연히 '왕후'가 빠질 수 없다. 더구나 왕후는 이 드라마들에서 '뒷방 마님'이 아니다. 갈등의 핵이다. 더구나 왕후답게 비굴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드라마야말로 '왕후 신드롬'의 전파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MBC <이산>은 아예 초라한 왕자비로부터 시작했다. 왕자인 사도세자는 왕인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이 때 왕자비인 혜경궁 홍씨(견미리)의 신세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행여 영조의 진노를 같이 사서 죽임을 당할까, 자식인 세손마저 죽임을 당할라 전전긍긍하느라 바쁘다.

초라하고 미래 불투명해 비굴한 왕자비 신세의 절정이다. 반면에 '왕후'들의 처지는 다르다. 서슬 퍼런 영조 치하에서도 어린 나이에 영조의 왕후가 된 정순 왕후(김여진)는 당당하다. 사도세자의 죽음 뒤에 그가 있다. 정순왕후는 판세를 움직이는 자다.

SBS <왕과 나>는 아예 '왕후 천하'다. 다양한 '왕후'들의 파노라마다. 실제 조선 최초 수렴청정을 한 왕후가 등장한다. 바로 정희 왕후(양미경)다. 이어서 아들이 왕이 되자 함께 궁에 입궐한 인수대비(전인화)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인수대비는 원래 소혜왕후였다. 훗날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기까지 기세를 떨쳤던 인물이다.

MBC <이산>에서 영조의 왕후인 정순 왕후(김여진).
 MBC <이산>에서 영조의 왕후인 정순 왕후(김여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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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과 혼인한 '왕후'들은 어떤가? 성종의 첫째 왕후인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다. 그 뒤를 성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제헌왕후(폐비 윤씨)가 이을 예정이다. 바로 윤소화, 훗날 폐비 윤씨다. 그가 낳은 연산군이 훗날 폐위되면서, 제헌왕후란 이름도 박탈당했다. 그 뒤를 이은 왕후가 정현왕후(이진)다. SBS 월화 드라마 <왕과 나>는 그야말로 다양한 왕후들의 백화점이다.

KBS <대조영>은 아예 '왕후 신드롬'의 '원조'다. 그것도 한 술 더 뜬다. 고구려 멸망 뒤 발해를 건국하려 애쓰는 대조영(최수종)을 괴롭힌 게 바로 측천무후(양금석)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다.

그는 원래 당태종의 후궁, 이어서 고종의 왕후였다. 하지만 '왕후'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여자다. 권력이 다가옴을 피부로 느끼다 못해, 폐부로 획득한 여자다. 대조영 주변도 만만찮다. 대조영의 왕후 자리를 놓고 두 여자가 다투다, 급기야 숙영(홍수현)이 발해의 첫 왕후가 된다.

MBC 수목드라마 <태왕사신기>도 광개토대왕(배용준)의 왕후 자리를 놓고 수지니(이지아)와 기하(문소리)가 다툰다. 누가 되던 지고지순한 왕후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비굴한 신데렐라 외면, 당당한 왕후에 열광


TV에 왜 이렇게 '왕후'가 넘쳐날까? 단지 궁중 사극의 홍수 때문일까? 한때 드라마엔 재벌 2세 만나 결혼하는 신데렐라가 넘쳐났다. 알다시피 신데렐라는 어려서 엄마를 잃고,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을 받으며 하녀처럼 자랐다. 하지만 커서 왕자 만나, 왕자비가 됐다.

남편을 잘 만나 급 출세한 여자 이야기의 대명사다. <파리의 연인>처럼, 한때 드라마는 그 '신델레라' 스토리의 온갖 변주극이었다. 인기도 높았다. 신데렐라는 왕자와 만나 잘 살았다. 믿거나 말거나. 드라마는 거기서 끝났다.

그런데 만약에 신데렐라와 결혼한 왕자가 곧이어 터진 전쟁에 나가 전사하거나, 숲 속에서 말 달리다 갑자기 뛰어나온 토끼에 놀라 앞발을 번쩍 치켜든 말 때문에 말에서 내동댕이쳐져 사망한다면?

"띠링띠링. 왕자가 사망하면 언제든지 천억 원. 옵션으로 새 왕자도 찾아드립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왕자비 특급 보험'을 든 것도 아니라면? 현재로 따지면, 재벌 회장이 되지 않은 재벌 3세가 고작 건물 한 채 달랑 주겠다며 이혼을 요구한다면? 말이 좋아 왕자비지, 양도받은 주식 하나 없는데?

서울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강혜란 소장은 "신데렐라가 '줌마렐라'로 변신한 것처럼 '왕후'도 하나의 트렌드"라며 "이런 트렌드를 만드는 배경에 여성 시청자, 여성 소비자의 욕구나 욕망의 고급화 이런 게 내재해 있다"고 덧붙였다.

'왕후 신드롬'도 결국 세태 반영인 셈이다. 당당하고 자기 주관 확실한 알파걸 혹은 '알파 아줌마'들의 등장이 현실에서 TV로 이어진달까? 실제 TV는 지금 청순하다 못해 지고지순한 여자들을 퇴출 중이다. 시청자들의 외면 때문이다. 왕자를 기다리던 소극적이고 청순한 여성들을 그린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시청자로부터 처절하게 외면당했다.

9년 만에 TV드라마에 복귀하며 <푸른 물고기>에서 청순가련한 여인을 연기했던 고소영은 4.9%란 시청률(TNS 미디어 코리아)로 현실과 맞닥뜨렸다. 반면에 청순함의 또 다른 대명사였던 최지우와 수애는 <에어시티>와 <9회말 2아웃>에서 '청순가련' 이미지와 결별하고 씩씩한 여자로 변신해 성공했다.

사극도 다르지 않다. 청순한 예진 아씨나 비련의 가련한 혜경궁 홍씨 같은 인물은 이제 주인공이 아니다. 도도한 '왕후'들이 판을 짜고 판을 이끈다. 그런 드라마들이 뜨고 있다.

TNS 미디어 코리아 집계결과 <대조영>은 평균 시청률 35% 내외를 넘나들고 있다. <왕과 나>는 방송 4회 만에 25%를 넘겼고, <태왕사신기>는 방송 4회 만에 30%를 넘겼다. 뒤늦게 출발한 <이산>도 <왕과 나>와 맞서, 시청률 15%를 넘기며 상승세다.

TV는 지금 비굴한 '신데렐라' 대신, 도도한 '왕후'들과 연애 중이다. 신데렐라 신드롬이 아니라 '왕후 신드롬'이다. 다소곳한 왕자비가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당당한 '왕후'들이 TV를 장악했다. 이들을 향한 시청자들의 환호 소리도 높다.

"왕후의 자리를 내놓으시지요"라고 말하는 소망화장품 CF.
 "왕후의 자리를 내놓으시지요"라고 말하는 소망화장품 CF.
ⓒ 소망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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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왕후, #신드롬, #사극, #왕과 나,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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