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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들머리에 서 있는  정자나무와 정자. 정자 앞 공터에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있다.
 마을 들머리에 서 있는 정자나무와 정자. 정자 앞 공터에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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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 옛집에서 나와 29번 국도를 따라간다. 고택을 나올 적엔 가루비였던 비가 어느새 작달비로 변해 마구 퍼붓는다. 고부면 입석리에서 꺾어져 5리가량 들어가자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과 동학혁명 모의탑이 있는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이른다.

본래는 '대뫼'라는 우리말 지명으로 불렸던 마을인데 일본 강점기 때 주산으로 멋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마을의 정기를 죽이려고 '배처럼 떠돌아다니라'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꾸었다니 마을 이름에서 어쩐지 설익은 저주의 냄새가 풍기는 듯하다.

마을 입구에는 팽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바로 옆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말끔하게 생긴 정자가 묵묵히 앉아 있고 그 앞 공터에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서 있다.

무명 동학농민군을 기리는 최초의 조형물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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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부조.
 무명용사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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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기념비. 정읍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인 최현식 선생이 글을 지었다.
 건립 기념비. 정읍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인 최현식 선생이 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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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은 1994년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발족한 후 100주년 기념사업 가운데 하나로 세운 것이다. 무명 동학농민군을 위한 조형물로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이라 한다.

위령탑은 5m 높이의 주탑을 중심으로 사발통문 모양으로 된 둘레석과 주탑을 둘러싼 32개의 보조탑으로 이뤄져 있다. 주탑엔 보국안민을 외치는 농민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농민군의 원(寃)을 극복하고 힘차게 전진하는 역사를 형상화한 것인가 보다.

보조탑에는 농민군들의 얼굴이 부조돼 있다. 울분, 비탄, 강개 등 갖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들이 궂은 비에 젖고 있다. 그 얼굴 하나하나가 100여 전 이 땅에 피어났다 덧없이 스러졌던 한 송이 녹두꽃이다.

오늘날 내가 누리는 자유 혹은 삶은 얼마간 저 무명용사들에게 빚진 것이다.  비에 젖는 저 녹두꽃들에게 묻는다. 이름 없이 스러진 게 상기도 그리 안타까우냐고. 부조상들은 살래살래 고개를 젓는다. 거름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졸렬하게 이름 있음과 없음을 따지지 않는 법이다. 평생을 농사지으며 살던 무명 용사들이 어찌 그러한 거름의 속성을 익히 알지 못하겠는가.

진위 논란에 휩쌓인 사발통문

동학혁명모의탑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동학혁명모의탑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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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이 발견됐다는 송기태 씨의 집.
 사발통문이 발견됐다는 송기태 씨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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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모의탑
 동학혁명모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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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탑에 새겨넣은 사발통문 형태. 네모 안에 써진 것이 전봉준의 이름이다.
 모의탑에 새겨넣은 사발통문 형태. 네모 안에 써진 것이 전봉준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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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을 나와 동학혁명 모의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마을 중간으로 난 길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거기 동학혁명 모의탑이 서 있다. 1969년 4월에 세운 것이다. 안내문에는 탑을 세운 주체가 동학농민혁명 모의탑 건립추진위원회라고 밝히고 있다. '건립 추진위원회'라 하니 좀 거창한 듯 싶다. 그냥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웠다 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을.

만일 사발통문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탑이 세워졌을까. 사발통문이란 만석보 수세 징수로 고부군 사람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가던 1893년 11월 초순, 송두호의 집에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모여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 감영을 함락 시킨 후 서울로 올라가자는 모의를 하고 나서 사발을 엎어놓은 둥근 원 형태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써 넣은 통문을 말한다. 순서대로 이름을 쓰게 되면 주모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서명한 것이다.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4일, 이 마을 송기태씨 집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사발통문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김상기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하였다고 한다. 서울대 박물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고 김상기 박사는 동학혁명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서라 할 수 있는 <동학과 동학란>(1947년 대성출판사)을 펴낸 분이다. 동학란이라 불리던 것을 동학혁명이라 정리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김상기 박사는 서명자의 필적이 모두 같다는 점, 지질과 먹색으로 보나 발견경위로 보나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던 모양이다. 사발통문의 진위와 관련해선 서울대 신용하 교수의 주장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게 최근의 추세이다.

사발통문이 모의 당시의 원본이 아니며, 고부 민란에 대한 회고록 일부를 필사해 놓은 데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일들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발통문의 진위에 대한 이러한 논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이것이 진본이라면, 동학혁명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부 봉기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계획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발통문이 동학혁명의 성격을 단순한 봉기냐, 의도적인 혁명이냐로 가르는 척도가 되는 셈이다. 사발통문은 처음에 동학혁명 모의탑 안에 넣어졌다고 하는 데 탑을 수리할 때 다시 꺼내서 현재는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어둠에 묻혀버린 역사를 호명하기 위하여

동학혁명 모의탑이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니 저만치 사발통문을 작성했다는 송두호의 집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 전창혁이 수세를 감면해달라고 소장을 냈다가 몰매를 맞고 돌아와 치료를 했던 곳도 그 집 안방이라 한다.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가운데 송씨들이 가장 많은 걸 보니 이 마을은 송씨들이 가장 많이 살았나 보다.

이 마을은 고부 봉기 이후 역적의 소굴이라 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람들은 잡혀가고 집은 불질러져 마을이 초토화되었다 한다. 그런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을 때 후손들이 느낄 무의식적인 공포감을 계산에 넣으면 이 마을 사람들이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일자무식인 고조할아버지가
일자무식인 증조할아버지를 낳았고
일자무식인 증조할아버지가
일자무식인 할아버지를 낳았다
녹두밭 곁에서 아버지는 가짜로 족보를 만들었지만
나는 그 족보를 태워버렸다
주자서절요보다도 먼저 나는 녹두꽃이었다

- 안수환 시 '녹두꽃' 전문

여기에 동학혁명 모의탑을 세운 뜻은 조상에 대한 긍지를 살리고 싶은 뜻과 함께 억울하게 숨진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는 진혼의 뜻도 담고 있을 것이다. 볼품없는 탑일 망정 이렇게라도 어둠에 파묻힌 역사를 복권시키고 싶었던 것인가. 자칫 무명으로 사라질는지도 모르는 자신들의 조상을 역사 속으로 호명하고 싶었던가.

사발통문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1969년이라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이러한 탑을 세웠다는 것으로 주산마을 사람들의 기백과 용기만은 크게 평가해줘도 무방하리라. 마을이야말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유기물이다. 흠뻑 비에 젖고 있는 주산마을에 경의를 표한 뒤 서서히 언덕을 내려간다.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16일(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동학혁명모의탑, #주산마을, #동학혁명, #동학농민군위령탑,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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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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