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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산맥에서의 사고를 추스른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계속 남하합니다. 원래는 550번 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빠른 지름길로 가기 위해 리즈웨이(Ridgway)에서 서편으로 꺾었어야했는데 경치 구경하며 마음을 놓는 사이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이요.

 

그런데 아침부터 제 옆으로 오토바이들이 많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무리 지어 달리는 바이크 족들이야 오면서 많이 봐 왔지만 오늘은 남달리 그 수가 과하다 싶습니다. 오전에만 백여명 이상의 바이크 족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 깊숙한 록키산맥의 고개를 넘어갔기 때문이죠.

 

궁금해서 물어보니 듀링고(Durango)에서 오토바이 축제를 한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이 총집합 한다고 하니 이거 소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은 격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때문에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나도 질세라 영차영차 따라갑니다. 한 이틀 달리면 저도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내가 더 신기한지 바라보면서 웃거나 휘파람을 불러 줍니다.

 

계속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다음 타운이 지도 상으로 24마일(38km) 정도 떨어졌었는데 이걸 우습게 본 것입니다. 평소 때면 두 시간이면 가는 거리지만 이건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산 길이었던 까닭에 속도가 거북이 걸음입니다. 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너무 자신만만했습니다.

 

14510피트(4422m)의 스네플(sneffels) 봉우리를 지나는 길은 그야말로 익스트림 여행입니다. 40kg이 넘는 자전거를 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6km 가는데 꼬박 3시간 가까이 걸렸네요. 그리곤 아니나 다를까 하루 한 번 꼭 찾아드는 로키산맥에서의 천둥과 비. 그러면서 연신 자조 섞인 독백을 내뱉습니다.

 

'이건 자전거 여행도 아니고 등산도 아니여~.'

 

 

오후 6시쯤, 우여곡절 끝에 해발 2800m에 위치한 실버톤(silverton)이라는 작은 타운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사방이 록키산맥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 마을입니다. 거리에는 술집과 레스토랑이 간간이 눈에 띄고 고스트 하우스도 적지 않게 보입니다. 한 때 광업으로 번영을 누린 곳이지만 이젠 도리어 폐광을 스키장과 함께 관광산업으로 변모시켜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단 마을에는 들어왔는데 숙소 찾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경찰도 안 보이고, 병원은 문이 닫혀있고…. 하긴 인구 400명도 안 되는 산골 마을에 모든 게 갖춰 있을꺼란 생각이 어리석은지도 모르겠습니다. 30분 동안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한 교회를 발견했습니다. 여러 교회가 있었지만 유독 그 교회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다행히 문을 잠그진 않은 모양입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은박지로 싸여진 무언가가 있습니다. 감춰져 있는 자태라도 여행자의 본능적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지요. 의심을 넘어선 확신은 빵이 아닐까 단언해 봅니다. 정말 아무런 사심없이 호기심에 의거해 호일을 열어 보니 역시나 아주 맛있게 보이는 쵸코 카스테라 있지 뭡니까? 군침이 꿀꺽 돕니다. 안 그래도 점심도 부실하게 먹고 저녁 식사도 못한 터.

 

위(胃)는 절규합니다.

 

'맛은 필요없다! 난 오직 포만감과 당분만을 원할 뿐이다! 자전거 여행 하면서 나를 혹사시키지 마라. 나를 혹사시키는 것은 곧 근육에 대한 심각한 노동착취 행위이다. 당장 배를 채워 넣어라!'

 

정말 당장 뭐라도 집어 넣지 않으면 섭취한 음식물을 산성으로 변화하게 하는 염산(鹽酸)을 함유한 위액으로 속쓰림을 유발시킬 도발 행각까지 준비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장발장이 될 수는 없는 법. '이 까짓 빵에게 흔들리다니!'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근엄하게 포기했습니다. 심정적 자아연민이라도 이성적 법률을 거부하면 후에 욕구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막심한 후회가 들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예배당에 온 이상 최소한 신 앞에 신고식은 치러야 하겠지요. 저 여기 왔다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참 이상하더랍니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이야 지나오면서 몇 번 봐왔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손님을 맞는 접대실도 개방이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접대실 넘어 복도를 구경하던 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게스트 룸마저 오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나?', '원래 개방된 거 아냐?', '이거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잇습니다.

 

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종잡을 수 없는 이 교회의 미스터리에 한참 고민했습니다. 이 때 한 가지 단서가 포착되었습니다. 바로 한 쪽 구석면에 오래된 듯한 작은 메모가 남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방에서 나올 땐 다음 사람을 위해 깨끗이 정리정돈하라는 얘기었습니다. 어디에도 룸을 사용하기 위해 접수하라거나 따로 요금을 지불하라거나 이곳으로 연락하라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30여분 고민하다 이웃집에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언덕 위에서 시끌벅적 파티를 열고 있는 이탈리아계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여유있게 대꾸합니다.

 

"빵이요? 아, 그거 누군가가 방문하면 먹으라고 놔 둔 것일 거에요. 그리고 그 교회 게스트 룸은 혹시나 들르게 되는 사람들이 그 곳에서 편히 쉬었다 가라고 하는 것이고요. 거기서 오늘 밤 자도 될 것 같은데요. 별 일은 없을 거에요.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을 질께요."

 

그러는 중에 한 여성이 다가왔습니다. 작은 마을에 응급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로이스(Rois)란 중년 여성입니다.

 

"음, 저 교회는 말 그대로 누구라도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문을 잠그지 않는 거죠. 하지만 혹시 당신이 불편하다면 오늘 우리집에서 자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이로써 교회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 풀어졌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에서 목사님을 만나 어찌된 연유인지 풀 스토리를 들어보기로 작정하고 일단 그녀의 제안에 따라 그녀의 집에 가서 하룻밤 묵기로 했습니다. 짐을 정리 한 후 그녀가 저녁 먹으러 다운타운에 가자고 합니다.

 

"그냥 있는 걸로 대충 먹어도 될 것 같아요. 굳이 다운타운까지."

"아니에요. 당신은 오늘 나의 손님이니 내가 책임을 지어야죠.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기운 차려야죠."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 맛있는 음식 앞에 사뿐히 즈려밟고 마을과 사람 구경도 할 겸 생기넘치는 발걸음으로 나갑니다. 시끄러운 듯 조용한 팝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어딜 가나 무난한 맛으로 제공되는 치킨메뉴를 주문합니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의사인 브로커링(brokering)이 우리 쪽으로 다가옵니다. 로이스와 친한 사이 같더군요. 브로커링은 로이스에게서 내 얘기를 듣더니 단번에 식사를 사겠다고 제안합니다. 오호~ 그대 쿨한 멋쟁이!

 

그 인연으로 나를 테이블에 초대해 와 즉석에서 세 팀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이들은 다들 의료진들인데 주말엔 이 마을에 와서 진료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전문적인 종합병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직업군에 있어서인지 다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브로커링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유머스럽고 참 자유분방합니다. 종업원이나 처음 본 손님과도 농담을 나누며 유쾌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손님과 손님끼리, 손님과 종업원끼리 처음 만나는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거리낌 없이 농담하고 신체 접촉을 합니다. 물론 친근감을 표시하는 투로 말입니다.

 

"이봐, 로이스 내게 '사.랑.해.요.'라고 말해 봐."

놀랍게도 브로커링이 정확하게 한국어발음을 합니다.

 

"싫어요."

그간 브로커링의 장난에 많이 당했던지 로이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괜찮아요. 그거 아주 아름답고 좋은 말이에요."

내가 옆에서 아주 순진한 얼굴로 바람을 넣습니다. 그러자 로이스는 내 눈치를 보더니 '사랑해요'라고 브로커링에게 대답합니다.

 

"와, 정말? 여러분, 로이스가 절 사랑한대요! 유후~."

"'사랑해요'라는 한국말은 영어로 'I LOVE U'라는 뜻이에요."

 

브로커링의 익살스런 장난과 내 설명이 이어지자 로이스는 또 당했다는 표정으로 기분 좋게 웃어 넘깁니다. 그는 시카고에서 일할 적에 같이 일하는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이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봐요 브로커링 씨. 혹시 '사랑해요'가 아니라 '사양해요' 아니었어요? 나는 당신을 사양합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인가요?"

발음이 비슷한 문장에 대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집니다.

 

"아마 제 생각엔 간호사들이 '난 당신을 사랑해요'가 아니라 '사양해요'라고 했을 것 같은데요? 사양해요는 뭐 '난 당신을 거부합니다' 이런 뜻이죠."

내가 던진 농담에 브로커링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립니다. 그리고는 다들 내 편이 되어줍니다.

 

"브로커링씨, 갈렙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요. 당신 착각한 거 아니에요? 호호."

브로커링은 절대 아니라며 우기면서도 이 분위기가 싫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맥주가 무료!' 가게 안에 광고가 시선을 확 잡아끕니다. 하지만 밑에 설명을 보고선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단, 80세 이상인 사람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함'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옆에는 또 '우리는 문제가 생겨도 절대 경찰을 부르지 않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씌여 있습니다. 그러면서 옆에 그림으로 '총'을 그려 넣었습니다. 미국 특유의 유머스러움이 이 작은 마을에도 넘쳐납니다.

 

"그런데 갈렙은 언제 여길 떠나요?"

"글쎄요. 제가 더 머물러야 할 공간이 없어서요. 로이스가 오늘은 도와주었지만 내일은 아마 산을 내려가지 않을까…."

"음, 그렇다면 우리 모텔로 와요. 제가 초대할께요. 하루 더 머무르면서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그래요."

 

함께 있던 테리(Terri)가 즉석에서 제안해 왔습니다. 이럴 땐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록키산맥 깊숙한 곳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산장 같은 모텔을 경영하고 있는 간호사입니다. 더군다나 내일은 모텔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하니 심히 기대가 됩니다.

 

"그럼 내일도 갈렙을 볼 수 있는 거로군.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내일 거기 갈 테니 갈렙도 와서 함께 즐겨요."

 

그가 산타클로스를 닮았다는 나의 말에 또 한 번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고, 장본인인 브로커링이 반갑게 파티 초대를 환영합니다.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두가 이 만남의 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계산서를 본 젊은 남자가 소리 소문없이 지갑을 꺼내 듭니다.

 

"아니, 왜 그래? 내가 낼게. 내가 갈렙 꺼까지 내려고 했던 참이야."

브로커링의 과장된 몸짓에 젊은 남자가 정색하며 대꾸합니다.

"아니 난 그냥 내 카드 잘 작동되는지 카운터에 체크해 보려구요."

또 한 번 웃음보가 터지고 결국 그 남자가 모두의 음식 값을 지불하며 즐거웠던 저녁 식사를 마무리 합니다.

 

예기치 않게 들른 작은 마을에서의 보게 된 오픈 마인드의 교회와 즐거운 저녁 식사 그리고 파티 초대. 당장 죽겠다고 입이 1m는 나올만큼 가는 길이 힘들긴 하지만 항상 풍선보다 더 부푼 가슴속에 이런 에피소드들로  짜릿한 감동을 안겨주는 록키산맥이 난 참 좋습니다.

 

"록키야, 격하게 사랑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문종성, #미국횡단, #자전거, #세계일주,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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