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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 왕의 자리.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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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태종 이방원의 소망과 두려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는 4남 4녀가 있었다.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 아들 4형제와 정순공주를 비롯한 딸 넷이다. 합 9명을 낳은 신빈 신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자녀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 민씨가 정비이므로 신빈 신씨의 소생은 서자다. 아버지 이성계의 제2부인 강씨 소생 방석의 세자책봉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겪은 태종은 후손에게 그와 같은 불행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굳게 다짐했다.

만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버지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이후, 비틀어진 물길을 바로 잡기 위하여 벌였던 형제간의 골육상쟁은 이방원 개인사에도 오점이 되었지만 국가발전에도 정체를 가져온 불행한 일이었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은 오로지 장자 승계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은 태종은 왕통을 확립하고 세세손손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건국 20여년. 고려의 유민들이 아직도 저항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백성들도 고려 왕씨에 심정적인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현실에서 후사가 부실하면 만고의 역적으로 내몰린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물려받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자신이 역사에 오롯이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후대가 똑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튼튼한 반석 위에 차세대가 똑바로 선 모습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뇌리에는 자신의 사후 차기 왕의 등극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자에게 전위하고 2선으로 물러나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나?

세자 나이 12살에 빚어진 전위(傳位) 파동 역시 공연한 소동은 아니었다. 전위 문제를 슬쩍 띄워보아 신하들이 호응하면 2선으로 물러나 어린 왕을 돌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허나, 신하들의 벌떼 같은 반대에 부딪혀 전위를 거두어들이면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재는 척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재위 9년에 터진 두 번째 전위파동은 임금의 계획과 신하의 계략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첫 번째 전위파동에서 민무구, 민무질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한 신하들은 임금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여 전전긍긍했다. 일부 세력은 이 기회를 정적 제거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태종은 진심으로 전위에 뜻을 두고 있었다. 어린 세자에게 궐위를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나 외교와 군정(軍政)을 직접 챙기기 위하여 병조에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했다. 찬성사(贊成事) 이천우로 도진무(都鎭撫)를 삼고 도총제(都摠制)에 박자청, 상진무(上鎭撫)에 심귀령, 부진무(副鎭撫)에 상호군(上護軍) 차지남 등 27인을 진무(鎭撫)로 하는 조직체계였다. 병조판서를 뛰어넘는 임금 직할체재다.

이 때 편전에서 이숙번과 면대했다.

"내가 어찌 만기(萬機)를 싫어하는 것인가? 천재(天災)가 심하니 하는 일이 천의(天意)에 합하지 않을까 두렵다."

"마땅히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셔야 합니다. 전위하여 재앙(災殃)을 물리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이 내세운 전위의 명분은 가뭄이었다.

"그러면 어느 때나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50 이 되어야 비로소 혈기가 쇠(衰)하니 나이 50이 되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임금님의 말씀은 늑대소년의 말'이라는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태종은 이숙번의 청을 받아들여 전위를 철회했다. 이숙번의 주청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숙번의 속내가 드러난다. 전위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위를 늦추어 달라는 것이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세자 양녕대군은 희망이며 신앙의 대상이었다

하륜이 세상을 떠나고 이숙번이 한양을 떠난 지금 현재에도 전위는 유효하다. 살아생전에 전위하고 새로 등극한 왕을 지켜보고 싶다는 것이 태종의 희망이었다. 이러한 태종의 신앙과 소망과 희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 세자 이제(李禔). 양녕대군이었다.

원자(元子) 나이 열 살에 세자로 책봉한 태종은 세자 양녕대군이 성군의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세자 교육기관으로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한 태종은 성석린, 하륜, 변계량 등 당대의 석학들을 세자사(世子師)로 임명하여 세자교육에 장래를 걸었다. 임금은 태어나지만 성군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태종은 나이 어린 양녕에게 혹독한 세자 교육을 시키는 한편 군왕 수업을 병행했다. 자질과 인성교육이다. 태종이 끔찍이 받들어 모시는 문소전(文昭殿) 망제를 섭행(攝行)시키고 종묘 배알을 의도적으로 대행시켰다. 명나라에 진표사(進表使)로 보내어 시야를 넓혀주고 국내에 들어오는 사신을 접대하고 환송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세자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마치고 내조계청(內朝啓廳)에 나와 계사(啓事)에 참여할 정도로 성장하자 아첨배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세자 등극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소인배들이 아첨을 떨고 줄을 선 것이다. 대학연의는 조선 역대 왕들의 제왕학 교과서다. 계사라 함은 세자가 외교 국방문제를 제외한 인사와 국내문제에 재량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놀기 좋아하는 세자가 공부를 멀리하고 세자궁 환자(宦者-내시)들과 어울려 놀다가 내시 노분이 볼기를 맞는가하면 세자에게 철과 자석을 갖다 바친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유한우가 파직되기도 했다. 식사예절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기도 했다.

조직적인 음모, 드디어 터진 성 상납사건

세자에게 활을 갖다 바치고 매(鷹)를 갖다 바치는 자가 속출했다.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박신과 풍해도 도절제사(豐海道都節制使) 김계지가 세자에게 활과 화살을 갖다 바쳤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무렵 청소년기 사내들에게 최고의 기호품은 활과 화살 그리고 사냥용 매였다.

세자의 공부에 방해가 되는 물품을 바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특별지시를 내린 태종은 세자궁 숙위를 3교대로 편성하고 경계를 강화했으나 구멍은 뚫려있었다. 미리 세자의 환심을 사두고 눈도장을 받아두어 후일을 기약하려는 자들의 물밑 공작은 집요했다. 세자궁 내시들을 매수하여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대책이 없었다.

세자궁에 몰래 드나들며 가야금을 타고 피리를 연주하던 악공(樂工) 이오방과 이법화가 마침내 해주 기생 초궁장(楚宮粧)을 끌어들여 질펀하게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우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세자의 기호가 장난감에서 활과 화살로 바뀌더니만 음악과 여자로 바뀐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성 상납사건이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김한로의 딸에게 장가든 세자가 성년이 되고 서서히 여자를 알아 갈 무렵 어리(於里) 사건이 터졌다. 예전에도 평양기생 사건, 해주 기생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일회성 유희였다. 그러나 어리 사건은 성격이 달랐다. 조직적인 음모가 있었다.

이 사건은 태종이 폐세자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숙번은 재기불능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태그:#세자, #양녕, #이방원, #이성계, #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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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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