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갈매기가 나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찬란한 햇빛이 해안을 감싸는 맑은 날의 이야기이고, 만약 그 반대의 경우처럼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잡아먹을 듯이 밀려올 때면 바다는 거대한 공포의 현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먼 바닷길로 무역을 하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비바람은 반드시 넘어야만 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늘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는 않는 듯 그렇게 바다로 떠난 사람들이 영영 못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무슨 무슨 표류기처럼 풍랑에 좌초된 후 깨어나 보니 딴 세상이었다는 이야기와 그곳의 경험담은 어릴 적 탐험가를 꿈꿨던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슴 설레게 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기구한 표류인의 이야기가 있으니 한번 그 험난한 여정을 함께 가보실까요.
도대체 그 말이 뭔 말인지...1807년, 순조 7년 8월 어느 날, 제주목사 한정운이 보내는 서신이 임금께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표류했던 여송국(呂宋國 : 필리핀)의 사람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6년 전에 제주도에 난파당한 배에 이끌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필리핀인들은 5명이 제주도로 떠내려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통하지 않자 비변사의 회의에서 청나라의 성경(盛京)으로 압송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후 죽을 고생 끝에 청나라에 도착한 그들은 다시 청나라에서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며 떠밀자 다시 제주도로 험난한 길을 다시 걸어와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 한 사람이 죽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난민 생활을 하던 중 또다시 한 사람이 풍토병으로 죽고 나머지 세 사람만이 가족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람들의 언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느 나라로 보내줘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 여송국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한참을 말하다가 그 나라의 모습을 땅바닥에 그리고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사람 어느 누구도 '막가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한동안 그들은 제주도에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상황 판단이 안 된 제주목사는 우선 근처의 목장에 머무르게 하고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식량을 계속 대주면서 조선의 언어를 익히라고 명령하였고, 이후 이들의 고달픈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군사적 사항이 아니면 조선시대 당시에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에 표류했지만 대부분 일정한 조사를 마치면 본국으로 보내 줬습니다. 특히 명이나 청나라의 사람들은 정말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배 굶지 말라고 식량과 여비까지 두둑이 챙겨줘서 보내 주곤 했습니다.
또 만약 배가 부서졌을 경우 배를 고치는 장비를 빌려 주거나 중요한 부품을 만들어서 스스로 떠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는 표류한 뱃사람들에게 원래 실었던 양의 쌀을 내려 주고 음식까지 잘 챙겨 먹여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 필리핀 방언에 능통하다그런데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그 뜻이 하늘에 통한다고 하듯이 몇 년 후 드디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조선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이었습니다. 문순득은 한 번에 그 사람들의 외모와 복장을 보고 여송국의 사람인 것을 알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송국의 언어로 서로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렇듯 조선에서 자신들의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미친 듯이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며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이후 그들이 줄기차게 외쳤던 "막가외(莫可外)"가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여송국인이라는 것을 문순득이 보증하자 표류인들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그마치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무도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몰랐는데, 홍어 장수 문순득이 짠∼ 하고 나타나 통역을 해주니 어찌 아니 기뻤겠습니까. 이후 이들 여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라감사 이면응과 제주목사 이현택이 상세히 기록해서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여송국으로 송환하라고 답변을 내렸습니다.
필리핀 사람들보다 더 기구했던 문순득의 표류기그런데 흑산도 홍어장수인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배우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 또한 이들처럼 배를 타고 무역을 하던 중 표류당해 필리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순득의 기구한 표류기는 <표해록(漂海錄)>이라는 문집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표해록>하면 탐진 출신의 최부가 남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 이외에도 몇 가지의 표류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순득의 이야기가 담긴 문순득표 <표해록>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전라도 섬으로 유배 간 후 수많은 날을 바다를 보고 살다가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정약전은 전라도 바닷가의 해양 수산생물들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인 <자산어보>를 편찬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는데, 이 <표해록>도 바다에 나가 표류한 이야기라서 한 꼭지를 골라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홍어장수 문순득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섬 모양이 소의 뒤 귀 모양과 비슷하다고 붙여진 전라남도 신안군의 우이도(牛耳島)에서 살던 상인입니다. 조선시대 당시에도 흑산도 홍어는 요즘처럼 최고의 맛으로 인정받았기에 문순득은 시큼한 냄새가 폴폴나는 홍어를 짊어지고 홍어장사를 다녔습니다.
당시 우이도는 일명 소흑산도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기착지인 나주 영산포에 홍어를 실어 나르며 돈을 만지던 문순득은 1801년 12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바다에서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이후 돛대가 부러진 채로 바다에 표류하던 배는 이윽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을 연출했던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구국은 조선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던 곳이라서 그곳의 사신은 조선에서 3품의 항렬을 내려 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곳이라 표류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현종대 바다에 표류해 유구국으로 떠내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삭발하거나 장발 차림이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북 하나를 가지고 앞에 와서 손으로 가리키며 고무(鼓舞)하는 모양을 지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채고 노래를 부르며 북춤을 추자, 그때에서야 그 사람들이 고려인(高麗人)이라고 부르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는가 하면 쌀을 주어 밥을 지어먹게 하는 등 자주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 <현종실록 5권, 3년 7월 28일> 이처럼 조선에서 표류한 사람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유구국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문순득의 일행들 또한 유구국에서 일정한 휴식을 취하고 배를 구해 다시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그해 10월 초에 드디어 여송국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인 연경 진공사(燕京進貢使)일행과 함께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십여 일 후 하늘이 또다시 이들에게 시련을 주는 듯 고향을 향해 힘차게 항해하던 문순득 일행의 배는 풍랑을 만나 기약 없는 표류를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이 바로 여송국이었습니다. 정말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문순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여송국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생활모습과 언어를 빠르게 습득한 문순득 일행은 소주(蘇州)상인들의 쌀 무역을 돕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해 일정한 여비를 만들었고, 드디어 청나라를 거쳐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와 함께 표류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문호겸(文好謙)ㆍ박양신(朴亮信)ㆍ이백근(李百根)ㆍ이중태(李重泰)ㆍ김옥문(金玉文) 등 총 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쳐간 나라를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데, 유구국(琉球國)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ㆍ일록국(日鹿國)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조선으로 온 것입니다. 당시의 교통편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엄청난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운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는 정약전을 통해서 통해 글로 남게 되었고, 동생인 정약용과의 편지왕래를 통해 정약용 또한 문순득의 이야기를 잘 알게 됩니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을 위해 쓴 책인 <경세유표>에 동전의 크기를 변화시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과 은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펼치게 됩니다.
이해응, 표류인들을 위해 시를 남기다조선 순조 때의 문신인 이해응이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에 갔을 때의 견문을 기록한 책인 <계산기정>을 살펴보면, 우연히 연경의 객사에서 문순득 일행을 만나 그들과 나눈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조선 표류인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며 그 수많은 내용을 글로 모두 남기지 못한 것을 못내 서운해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술 한 잔을 듬뿍 부어 주며 그들을 위해 시를 적었습니다.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 黑山民俗太蠢蠢
바다에서 이익을 쫓느라니 대부분 곤궁하구려 / 濱海逐利多困窘석우풍(石尤風)이 어찌 다니는 사람 사랑할 리 있나 / 石尤何曾愛行人
만경의 사나운 물결 한없이 이네 / 萬頃惡浪吹不盡일엽편주 아득히 가는 대로 놓아두니 / 一葦茫然縱所之
떠가는 배 문득 허루신과 같구나 / 泛泛忽如噓樓蜃길은 강절의 하늘 아득한 데로 통하였고 / 道通江浙天浩渺
돛대는 오초의 산 높은 데에 떨어졌네 / 帆落吳楚山嶾嶙일록국 사람 가죽으로 옷해 입고 / 日鹿國人皮爲衣
가을바람에 새 쫓는 매처럼 용맹스럽네 / 猛如逐雀秋風隼해동의 여아는 공연히 한이 맺혀 / 海東女兒空結恨
누굴 위해 다시 공후인을 짓는고 / 爲誰更作箜篌引네 만약 문장의 안목 갖추었다면 / 使汝若具文章眼
닿은 곳마다 시로써 번민 잊을 수 있었을걸 / 觸境有詩能排憫원하노니 네 고향엘 가거들랑 / 願汝鄕山歸去日
농가에 안식해서 농사나 힘쓰게나 / 安息田家服畦畛그는 험한 바다를 통해 먹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이제는 농사를 지으며 육지에서 안전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시를 통해 읊었습니다.
홍어장수 문순득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람이처럼 모진 시련을 거쳐 조선에 돌아온 문순득은 이후에도 계속 흑산도 홍어장사로 이름을 날렸고, 현재 우이도에는 그의 자손들이 선조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표류를 두 번이나 당해 망망한 바다에 맡겼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는 또 다른 희망 만들기일 것입니다.
절망의 시대라 울부짖으며 한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 가는 문순득과 같은 삶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젠 그를 표류인 문순득이 아니라 삶의 개척자 문순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전쟁사/무예사 전공)를 수료하고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예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를 운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