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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갯츠비>의 주인공 갯츠비(MC몽)는 친구에게 '빈대 붙어' 사는 백수 신세지만 여전히 '순진한 열정'을 품고 산다.
ⓒ tvN
한때 백수를 타이틀 정면에 내건 '파격적'일 듯싶었던 TV 드라마가 있었다. 2003년 봄부터 여름까지 방영한 SBS 주말드라마 <백수탈출>. 드라마는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서 백수 신세를 면해보려고 애쓰는 한 가족을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로 담고 있었다.

백수 가족의 면면은 이랬다.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직업이 없고, 아버지는 말실수로 강제 퇴직했으며, 농구선수인 주인공 아들은 연습 중 부상으로 백수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백수탈출>에 등장한 백수 이미지는 아주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불과 4년 전인 당시는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였고 그 정부가 '청년실업종합대책'이란 것을 발표한 때였다.

그러나 <백수탈출>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이후 고용 없는 성장을 추구해온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실업 양상과 백수 문화를 반영하고 있지 못했다. <백수탈출>의 백수는 한 사회의 정책적이고 구조적인 배척으로 인해 양산되는 백수가 아니라, 개인적인 실수나 사고 때문에 운 없이 직장을 잃은 백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막 출범한 정부가 부랴부랴 '청년실업종합대책'을 발표해야 할 만큼 백수 문제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의제가 되어 있던 당시에 타이밍을 잘 맞춰서 <백수탈출>이라고 타이틀을 내걸었으나, 내용은 백수 문제를 개인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는지라 '파격적' 타이틀은 뒷맛이 찝찝했다.

청년실업자 100만 시대... 웰빙 백수? 문화 백수?

알다시피 IMF 구제금융 이후 우리 사회가 겪는 백수 문화는 '완전고용'과 '평생직장'의 산업화 시대가 조종을 울리며 비롯된 새로운 성격의 실업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청년실업자는 개인의 무능력, 게으름, 운과는 독자적으로 이 사회의 경제ㆍ정치체제가 청년들에게 덮어씌운 '희생양 게임'의 다수 피해자로 강제 배출되고 있는 사태이다.

해서 백수란 이제 청년이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이 배경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자발적 백수'니 '웰빙 백수'니 '문화 백수'니 하는 신조어들을 접할 때 중년 이상의 기성세대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고 비난할 수도 있다.

통계만 보아도 청년실업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었고 청년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2배를 넘었다. 대졸자 10명 중 4명이 백수이고 20대 절반 이상은 취직난에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설문조사도 있다. 우리는 이미 1998년 이후 그런 사회 체제에서 10년 가까이 살아온 것이다.

때문에 청년 실업을 둘러싸고 경제, 사회, 정치 차원의 진단은 그것대로 심각하게 경종을 울려왔으나, 문화 차원에서는 일상이 된 백수의 달라진 문화와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더듬이를 활발히 놀렸다. 그 영향이 TV 드라마에도 끼쳤을 터여서 사극을 뺀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백수는 갈수록 그 새로운 모습을 더욱 자주 내보이고 있다.

▲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주인공 황메리와 강대구 역의 이하나와 지현우.
ⓒ MBC
지난 7월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메리 대구 공방전>의 20대 청춘 남녀 주인공과, 같은 달 종영한 KBS 월화드라마 <꽃 찾으러 왔단다>의 남성 주인공은 다 백수다. 얼마 전 종영한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선 40대 남성 가장과 20대 돌아온 싱글 여성도 백수다.

방영중인 tvN <위대한 캣츠비>의 20대 남성 주인공도 백수다. 9월 3일 방영 예정인 KBS 일일연속극 <미우나 고우나>의 남성 주인공도 백수고, 9월 7일 방영될 tvN 다큐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2도 대학 졸업생들의 백수 문제를 소재로 다룬다고 한다.

이렇듯 최근 TV 드라마에 등장한 백수는 양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역할도 주인공으로 비중이 중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던 이들 드라마가 다루는 백수의 이미지가 매우 새롭다는 점이다. 거두절미하고 과거의 전형적인 백수상과 비교해 최근 드라마에 나오는 신(新) 백수 이미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나 지금이나 백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과 대접은 곱지 않으나 이들 신 백수 캐릭터들은 ▲주눅 들어 있지 않고 발랄하며 ▲당장은 못 이룰 꿈과 사랑이라도 열정을 잃지 않고 있으며 ▲'방콕 생활'이나 '면식 수행' 하지 않고 활발하게 거리를 쏘다니고 ▲나아가 주변 이들에게 웃음과 따듯함을 준다.

신문ㆍ방송이 전하는 청년실업 이야기는 온통 잿빛인데 TV드라마의 청년 백수는 그처럼 당당하고 낙관적이며 능청스럽고 지혜로워 보인다. 드라마는 드라마지, 드라마에서 9시 뉴스 접할 것 있냐, 재미로 보고 웃으면 되는 거지, 이렇게 생각해도 물론 그만이다.

TV드라마의 청년 백수들이 더 다양해졌으면...

나는 좀 나아가서 TV드라마의 청년 백수 캐릭터들이 더 다양해졌으면 하고(이제는 백수라고 다 똑같은 백수가 아니기 때문에), 20대 청년의 장래가 90%는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캐릭터도 덩달아 늘어났으면 바라며(백수와 비정규직은 수시로 넘나드니까), 그 이미지들이 9시 뉴스와 다르게 나름대로 '오늘의 행복'을 누리고 있으면 좋겠다.

그 '오늘의 행복'을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풀고 가야 할 몫은 그것대로 주목하면서 비판하고 주장하되, 한편으로는 그날그날의 '오늘의 행복'을 먼 미래나 억울한 과거와 비교하는 대신 바로 지금 여기 내 발밑에서 찾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일도 빼 놓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철학자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백수란 원래 '맨손' 또는 '빈손'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백수고 마지막에도 백수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백수란 결코 부끄러운 처지를 가리키는 나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담긴 말이다."

아울러 중년 이상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청년 백수를 바라보면서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것들!", "저러니 젊은 것들이 안 되는 거야!" 하며 질책하는 일은 자제하고 자중했으면 하고 바란다. 최소한 기성세대는 학점이 엉망이고 토플이니 토익은 보지 않았고 대학 생활 내내 딴 짓을 했다 해도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기업에 턱하니 입사하고 시즌 따라 승진하는 삶을 살며 차도 사고 집도 샀던 그런 호시절을 10~30년씩은 살아보았다. 이에 비하면 요즘 청년은 이 나라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죽어라 공부하고 시험보고 자격증 따도 처음부터 90%는 비정규직과 실업의 광장으로 내쫓기게 되어 있다.

해서 TV 드라마에 급증하고 있는 백수 캐릭터와 그 높아지는 비중을 보면서, 작가와 피디와 출연하는 연예인들 그리고 드라마의 백수를 보며 씁쓸하게 웃을 시청자들에게 2권의 책을 권하고 싶다. 우석훈ㆍ박권일의 <88만원 세대>(레디앙)가 하나이고 후타카미 노우키의 <일하지 않는 사람들 일 할 수 없는 사람들>(홍익출판사)이 다른 하나이다.

희망이 없어진 시대라도 어쨌든 살아야 하고 그 삶조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겠기에, TV드라마에 나와 웃고 있는 백수 연기를 보면서 우리 모두 현실의 백수로 살아가는 진짜 청년 백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았으면 해서다.

태그:#드라마, #백수, #메리 대구 공방전, #위대한 갯츠비, #막돼먹은 영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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