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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트마 간디
ⓒ 한길사
요게시 차다의 <마하트마 간디>를 읽었다. 문득 생각난 사람이 있었다. 김선일씨이다. 그가 살려다라고 외치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프가니스탄에 우리나라 사람 19명이 인질로 잡혀 있다. 2명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렸다.

<마하트마 간디>를 읽으면서 왜 이들이 생각났을까? 우리는 간디를 그저 '비폭력주의자'로 칭송을 하고 있지만 그가 비폭력주의자의 삶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간 비폭력의 삶을 왜 우리들의 삶에는 적용하지 못하지는 관심을 잘 두지 않는다.

간디는 누구인가?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길이란 어떤 길인가?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른 대로 그것은 사티아그라하다. 진리파지(眞理把持)이다. 참을 지킴이다. 또 세상이 보통 일컫는 대로 비폭력운동이다. 사나운 힘을 쓰지 않음이다. 혹 무저항주의란 말을 쓰는 수도 있으나 그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이름이다. 간디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죽어도 저항해 싸우자는 주의다. 다만 폭력, 곧 사나운 힘을 쓰지 말자는 주의다." (본문 35쪽 인용).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그는 불의 항거했다. 항거의 방법, 총과 칼, 인간의 생명을 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와 진리 그 자체로 저항했다. 간디가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저항주의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불의에 항거했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은 간디의 삶의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요게시 차다의 <마하트마 간디>를 통하여 본 간디라는 한 인간의 삶의 결론 '지독한 신념'으로 살아온 여정이었다.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으로 그를 단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너무 '비폭력'이라는 말을 쓴다. 자신이 갈 수 없는 길이면 쉽게 말하면 안 된다. 간디의 삶의 여정을 존경한다는 말 한마디 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사적 이익의 도구로 사용한다.

간디는 인도의 힌두 계급의 카스트 중 제3의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바이샤 출신이다. 인도라는 국가는 사상 속의 국가는 존재하였지만 정치, 행정체제로서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현실의 문제는 그가 영국 유학을 끝내고 남아프라카로 가기 전까지는 얼마나 자기를 노예화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남아프리카에서 경험된 인도와 인도인의 문제는 사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이었다. 브리마 차리아, 사티아그라하는 그를 지독한 신념을 통하여 현실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향을 설정하게 되며 자신의 삶이었고, 자신이 된다.

"우리는 폭력도, 유혈도, 사람들이 요즘 이해하고 있는 방식의 외교도 채택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진리와 비폭력만 채택했습니다. 무혈 혁명을 이루려는 이러한 시도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계는 유혈로 인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세계는 탈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탈출구를 열망하는 세상에 탈출구를 보여주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인도의 특권일 것이라는 믿음에 자부심을 자기고 있습니다." (본문 538쪽 인용)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레바논에서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입에서 정의와 평화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간디의 이 말이 그들에게는 어떤 뜻일까? 의미일까? 부시 미국대통령은 오늘도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철군하면 베트남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비폭력이나는 신념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될지라도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었고, 원수라는 인간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용납할 수 없게 한다. 인도로 돌아와서 그가 보여준 사타그라하 운동과 자치운동, 인도 독립을 향한 열정을 무엇으로 담을 수 없는 그릇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원래 종교란 근원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기에 이슬람과 힌두종교의 하나를 위하여 싸웠지만 현실 사회가 추구하는 정치성이 결국 분열의 씨앗이 되게 하는 안타까움을 경험하게 된다.

비폭력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도 결국은 '폭력'의 이름으로 죽었다. 중심에는 종교가 있었다. 종교만큼 평화를 외치는 것도 없지만 종교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음을 비폭력주의자 간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또 지구상에 벌어지는 모든 전쟁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인류의 비극이 종교에서 싹트고, 잉태되고, 만들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간 길을 우리는 왜 가지 못할까? 그러니 그를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비폭력주의자'라고, 치열한 비폭력의 삶의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간디를 입에 담는 것은 간디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지음 | 정영목 옮김


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한길사(2001)


태그:#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정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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