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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에 발행된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과거에 비해 민족주체적 역사의식에 입각해서 기술된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정부(고종)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는 기존의 기술이 삭제되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일제가 남기고 간 식민사관이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같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학계에서도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바로세우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이러한 노력의 성과는 교과서 개정 등을 통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가 너무 지나쳐서 잘못된 역사까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면, 이는 한민족에게 득보다는 실이 될 것이다. 망국의 책임을 지고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역사바로세우기에 편승해서 단지 '우리 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면, 이는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1910년 망국에 대해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로 조선 제26대 군주 고종을 들 수 있다. 고종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있다는 점은, 동학농민전쟁(1894년) 당시 조선 정부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사실과 관련한 국사교과서 표현의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6차 교육과정 당시인 1996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 하권 86쪽에는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무능한 조선정부가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는 이러한 기술은, 결국 고종 임금이 외세를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자초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고종 무능론'을 강화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제7차(현행)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2002년에 발행된 현행 고등학교 <국사>에는 청일전쟁 개전과 관련하여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110쪽)와 "일본은 청·일 전쟁을 도발하면서 철도 부설권 등 이권 탈취에 앞장섰다"(176쪽)라는 부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행 교과서에서는 '무능한'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부분이 삭제된 채로,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는 기술만 나오고 있다. 결국 고종 임금이 책임을 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무능한 조선' '무능한 고종'의 이미지가 약화된 것은, 현행 국사교과서 서문에 언급된 것처럼 "본 교과서를 통하여 학생 여러분이 민족사에 대한 긍지를 가지는 한편, 건전한 역사 의식과 세계 시민 의식을 함께 높이기를 기대한다"는 교과서 집필진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필진의 '주체적 역사의식'에 더해, 고종의 '짐'을 덜어주는 데 기여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서 1996년판 교과서와 2002년판 교과서의 중간인 2000년 8월 15일에 발행된 이태진 교수(서울대 국사학과)의 <고종시대의 재조명>이라는 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 이태진 지음 <고종시대의 재조명>.
ⓒ 태학사
이 책은 고종에 대한 종래의 편견을 비판하고 근대화를 위한 그의 노력을 재조명함으로써 '무능한 고종'이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최근 한국에서 고종에 대한 시선이 따스해지도록 만든 데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며 위와 같은 국사교과서의 표현 변화에도 영향을 준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시대의 재조명>은 고종의 잠재의식 속에 외국군에 대한 의존심리가 없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1893년 보은집회(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 당시의 정부 대책회의에 관한 <일성록> 기록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논박하고 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당시 고종의 파병요청은 고종의 자의(自意)가 아니라 원세개(위안스카이)의 압력에 의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설명하면서, '고종은 1893년 보은집회 당시에도 외국군 파병요청을 검토한 적이 있다'는 기존의 통설이 틀렸다고 비판함으로써 고종의 잠재의식 속에는 그러한 의존심리가 없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참고로, 임금의 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일성록>은 영조 36년(1760)부터 1910년까지의 기록으로서 <조선왕조실록>을 보충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의 파병요청이 고종의 자의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의는 차후로 미루고, 여기서는 1893년 보은집회 당시 고종이 외국군 파병요청을 검토했느냐 여부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동학교도들이 보은에 집결했을 때 한성에서는 고종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에 정부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에 관한 기록이 고종 30년(1893년) 3월 25일자 <일성록>에 남아 있다. 대책회의에서 오고간 고종과 영의정 심순택 및 우의정 정범조의 대화 내용이 이태진 교수의 <고종시대의 재조명> 197쪽에 번역되어 있다.

▲ 보은집회 당시 정부의 대책회의에 관한 <일성록>의 기술이 번역되어 있는 <고종시대의 재조명> 197쪽. (가)~(아)의 대화 내용 중 여왈(予曰)은 고종의 코멘트를 가리킨다.
ⓒ 출처: <고종시대의 재조명>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올라올 경우에 강화도의 심영과 수원의 기영 병력을 배치하되 그것으로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경군을 투입해야 하는데, 경군은 한성 수비용으로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외국군대를 빌리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 위 논의의 쟁점이다.

대화 내용에 따르면, 고종이 동학교도들의 진압을 위해 세 차례(다, 마, 사)에 걸쳐 외국군 차병을 거론하자, 그때마다 신하들은 "옳지 않습니다"(라) "어찌 ……"(바, 아) 등등을 운운하면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피력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박종근, 김창수, 다보하시 교오시 등의 기존 학자들은 고종 임금이 보은집회 당시 외국군 파병요청을 검토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외세의존적 잠재의식이 1년 뒤인 청일전쟁 시기의 청나라 군대 파병요청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존의 학자들은 위 사료를 근거로 고종이 보은집회 당시 외국군 파병요청을 검토했다고 평가한 데 반해, 이태진 교수는 동일한 사료를 근거로 고종은 그러한 요청을 검토한 적이 없다는 상반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럼, 이태진 교수의 논거는 무엇일까?

첫째, 위 대화 내용을 볼 때에 고종은 대신들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이태진 교수의 해석이다. "문제는 이런 진언에 대한 국왕의 반응인데, 국왕은 기본적으로 대신들의 진언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198쪽)라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위 대화 내용 어디를 봐도, 고종 임금이 대신들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의 말(다)에 대해 심순택이 반대입장(라)을 피력하자 "중국이 일찍이 영국병을 차용한 일이 있다"(마)면서 자신의 입장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이에 대해 우의정 정범조가 반발하자 이번에는 "청병(청나라 군대, 인용자 주)은 쓸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사)이라면서 정범조의 반박을 재반박하였다. 참고로, '중국이 영국 군대를 차용한 일'이라는 것은 태평천국운동(1851~64년) 당시 영국 용병을 빌려 청나라 정부가 태평천국군을 진압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보다 더 결정적인 점은, 위 대책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자 고종이 이번에는 전 협판내무부사 박제순을 청나라 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에게 따로 보내서 파병요청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지난 1985년에 한국사연구회가 편집하고 일조각이 발행한 <청일전쟁과 한일관계>라는 책에 실린 김창수의 '청일전쟁 후 일본의 한반도 군사침략정책'이라는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태진 교수도 고종이 박제순을 시켜 원세개에게 파병을 요청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위와 같이 대책회의에서 나온 중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박제순을 원세개에게 따로 보내 파병을 요청한 고종을 두고 과연 '대신들의 진언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둘째, 위 (다)의 대화내용을 볼 때에 고종의 파병요청 의사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게 이태진 교수의 해석이다.

"첫 발언 (다)에서 왕은 타국병을 차용하는 것은 각국의 예가 있지만, '어찌 하필 차병을 할 것인가?'라고 각국에서 타국의 병력을 차용하는 예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그렇게 할 의사가 없는 것을 분명히 했다."(198쪽)

위의 (다)에서 고종이 "타국병을 차용하는 것도 각국의 예가 있다"고 한 뒤에 곧바로 "그러나 어찌 하필 차병을 할 것인가?"라고 말한 점을 근거로, 이태진 교수는 고종에게는 파병을 요청할 의사가 실제로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파병을 요청할 생각이 없었다면, 심순택이 반대의사를 표명(라)했을 때에 고종은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고종은 심순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후 두 번(마, 사)이나 더 자신의 입장을 강조했다. 그리고는 박제순을 원세개에게 따로 보내 파병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럼, 고종이 "그러나 어찌 하필 차병을 할 것인가?"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을 이해하려면 고종의 퍼스낼리티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 밑에서 조심스럽게 살아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고종의 성격 중 특징적인 것은, 중요한 순간에는 대개의 경우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주로 남을 앞세운다는 점이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기 위해 처족 민씨 세력을 앞장세우고, 늙은 원로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과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 고종이었다.

그리고 두 차례(1885·1886년)의 조선-러시아 밀약사건의 배후에 고종이 있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때마다 책임을 떠맡은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제1차 조·러 밀약사건 때에는 묄렌도르프가 파면되었고, 제2차 때에는 조존두·김하진 등이 책임을 지고 하옥되었다. 그때마다 고종이 보여준 태도는 이른바 '발뺌'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직접 나서기를 꺼리는 이 같은 성격을 볼 때에, 고종이 (다)에서 "타국병을 차용하는 것도 각국의 예가 있다"면서 파병요청 문제를 꺼냈다가 곧바로 "그러나 어찌 하필 차병을 할 것인가?"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한 것은,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파문을 우려해서 상대방의 반응을 미리 떠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종 특유의 화법인 셈이다.

만약 그 발언이 '나는 파병을 요청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면, 심순택과 정범조가 그토록 강력하게 파병 요청을 반대했을 리 없다. 그들은 평소 고종의 화법을 잘 알고 있기에, 또 고종의 진의가 파병요청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고종이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원세개가 고종의 파병요청을 거절한 것은 고종의 진의가 파병요청이 아니라는 사실을 원세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태진 교수의 주장이다.

"대신들의 반대로 논의가 철회된 뒤 고종이 박제순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내 의사를 타진해 보게 한 것도 자신의 그런 의향을 전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방문에 접한 위안스카이의 답변이 이런 해석을 입증해 준다. 그는 왕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듯이 그런 일은 조선정부가 중신을 파견해 처리할 일이라고 거절하였다. 그것이 순수한 청병이었다면 그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199쪽)

이에 따르면, 이태진 교수는 '원세개가 고종의 파병요청을 거절한 것은 그것이 고종의 진의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일국의 군주가 진의도 아니면서 대신을 보내 원세개에게 파병요청을 '그냥' 해보았을 것이라는 해석은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원세개가 고종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당시 동학의 움직임이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시점에서 개입하는 것은 청나라에게 이롭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위와 같이, 고종의 잠재의식 속에는 외국군에 대한 의존심리가 없었음을 입증하기 위한 이태진 교수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을 갖기 힘들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진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일성록>의 대책회의 장면은 도리어 고종의 잠재의식 속에 외세의존적 심리가 짙게 깔려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고종의 잠재의식을 규명하려면 1893년과 1894년의 사건만 고찰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상황도 함께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열강 간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국권을 지키자'는 고종 임금의 외세의존적 모토가 여실히 드러나는 세 가지의 사건만 소개하기로 한다.

①1880년. 이해 10월 2일에 일본에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이 황준헌 저 <조선책략>을 진헌하자, 고종은 매우 기뻐하면서 "청나라 외교관들도 나와 생각이 같구나"라며 기뻐한다. 그리고 불과 9일 뒤인 10월 11일에 <조선책략>의 권고인 친중·결일·연미를 정부의 대외전략으로 채택한다. 외세를 이용해서 국권을 지킨다는 생각은 <조선책략>을 입수하기 전부터 이미 고종 임금의 의식 속에 있었던 것이다.

②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고종은 청나라에 가 있던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청국의 개입을 부탁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린다. 그런데 고종의 요청은 조선정부의 공식 요청이 아니었다. 이 같은 비공식 요청을 근거로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에 내정간섭용 군대를 파견한다.

③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에,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역관 박태영이 청나라 총상동 당소의(원세개의 후임)를 찾아가 조약체결을 제의한다. "러시아 공사관의 빈객인 사람과 무슨 조약을 체결하느냐?"며 당소의가 비꼬자, 박태영이 다시 말한다. "지금 우리 정부에서 러시아 병사 3천 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해 두었고 러시아 군대만 오면 우리 임금이 곧 환궁할 것이니, 그때 조약을 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에도 이처럼 외국군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종은 중요 순간마다 언제나 외국군에 의존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보은집회 당시에도 그는 분명히 외국군에 의존하려다가 대신들의 반대와 원세개의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에, 고종은 분명히 외세의존적인 인물이었고, '나보다 더 강한 남들을 끌어들여 그들 간의 세력균형을 도모한 뒤에 그것을 바탕으로 나의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그의 전략이 도리어 조선을 외세의 각축장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나약하고 무능한 고종이 역사바로세우기 분위기에 편승해서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군주로 '둔갑'한다면, 이는 역사바로세우기가 너무 지나쳐서 우리 역사를 거꾸로 세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식민사관 속에 묻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다른 인물들을 제치고 고종 같은 엉뚱한 인물이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사바로세우기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도 아깝지만 한국사회의 가치관 정립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훌륭한 일이지만,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무조건 '우리 편'이라고 하여 비호·두둔만 한다면, 이는 도리어 민족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민족의 약점을 덮기보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비판을 자청함으로써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하고 강력한 민족주의가 아닐까.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태도가 진정한 민족주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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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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