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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번 주간고속도로와 3번 연방고속도로 표지판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뉴햄프셔주의 93번 고속도로 옆입니다.
ⓒ 김창엽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무엇보다 제국의 중심으로서 위상을 표현한 말일 터인데요. 로마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길 잘 닦은 나라로도 유명하잖아요. 로마의 가도들은 배수가 잘되고, 튼튼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니까요.

비단 로마만이 아니라 페르시아나 중국 등 일세를 풍미한 제국들은 길에 관한 한 모두 일가견이 있다고 봐야지요.

오늘날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 이 말은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도로 시스템이 발달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략 두 가지를 배경으로 꼽아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용 면적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땅덩어리가 가장 크다는 게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고, 철도보다는 일반 도로 교통이 기형적이라 할 만큼 압도적으로 발달한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될 것 같네요.

미국이 단순히 땅덩어리만 비교하면 러시아, 캐나다 보다 작지만 이들 나라와는 달리 사람이 제대로 발붙이고 살기 힘든 동토가 거의 없으니까요. 게다가 일찍이 시작된 자본주의는 공공성이 강한 철도보다는 이른바 '빅3'로 대변되는 자동차 산업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잖습니까.

미국의 수송 인프라 중 유난히 도로가 발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한테는 도로를 알면 절반쯤은 미국을 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미국 도로에 관한 가장 큰 표면적인 특징은 '숫자 놀음'이라는 겁니다. 특히 고속도로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처럼 이름이 붙여져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숫자 체계로 도로 이름이 정해지는 겁니다.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의 특성에 비춰볼 때 사실상, 영어를 한참 뒤로 따돌리고, 완벽한 세계인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아라비아 숫자를 도로에 도입한 것은 아이디어가 빛나는 대목입니다.

숫자 체계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4단계로 이뤄진 고속도로 시스템입니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주간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연방고속도로(US Highway), 주 고속도로(State Highway), 카운티 고속도로(County Highway) 등의 4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들 4개 고속도로 시스템 중 최상위라 할 수 있는 것은 주간고속도로지요. 그야 말로 주와 주를 이어주고, 주를 관통하고, 어떤 것들은 미국의 서해안에서 시작, 동해안에 이르는 핵심 도로 골격입니다.

▲ 유타주 12번 하이웨이입니다. 유타주의 상징이기도 한 원주민 인디언 집 모양을 한 도안 속에 숫자가 들어있습니다.
ⓒ 김창엽
미국에 한두 달만 체류해도 주간고속도로 시스템의 숫자 체계에는 금방 익숙해집니다. 남북 방향으로 달리는 주간고속도로는 홀수고, 동서로 달리는 것은 짝수라는 걸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에서 시작 캐나다와 국경을 이루는 워싱턴주의 시애틀 근처에서 끝나는 주간고속도로는 '5번' 입니다. 이 고속도로 중 절반쯤인 1000km가 훨씬 넘는 캘리포니아 구간은 골든 스테이트(Golden State) 하이웨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지만요.

남북방향으로 달리는 주간고속도로들 이렇게 서쪽부터 5번, 15번… 55번식으로 숫자가 불어나가 대서양 근처에 이르면 남쪽의 플로리다에서 최북단의 메인주까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95번에서 끝나게 됩니다. 요컨대 남북으로 달리는 주간고속도로들은 홀수이며,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숫자가 커지는 거지요.

동서로, 미국을 횡단하는 주간고속도로들은 짝수로 끝납니다. 로스앤젤레스 시작해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끝나는 최남단의 횡단도로는 10번입니다. 이 또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숫자가 커지기 시작해, 서부의 시애틀에서 시작, 동부의 보스턴에서 끝나는 횡단도로는 90번을 달고 있습니다.

주간고속도로의 숫자는 5, 10, 15, 90, 95 등 5로 나누면 딱 떨어지는 숫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예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콜럼비아를 잇는 도로는 77번입니다. 여러 숫자가 있을 수 있는데, 확실한 것은 홀수면 남북 방향으로, 짝수면 동서방향으로 달린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쉽게 이해하는데, 숫자가 한 단위 커지면 미국인들중에도 그 뜻이 무엇인지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주간고속도로의 세자리 숫자, 즉 3-디짓(3-digit) 번호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세자리 숫자는 메트로, 그러니까 대도시권 혹은 교통요지인 중소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게 특징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인근을 예로 들어볼까요. 로스앤젤레스 주변에는 405번, 110번 등 3자리 숫자의 주간고속도로가 여럿 있습니다.

세자리 숫자의 주간고속도로는 교통 요지 혹은 혼잡지역의 핵심 주간고속도로에서 딸려나간 순환 도로 혹은 우회 도로로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의미는 뭘까요. 세자리 숫자의 첫자리가 짝수로 시작되고 홀수로 끝나는 도로는 일종의 순환도로입니다.

그러므로 로스앤젤레스의 405번 도로는 첫째, 끝자리가 5이므로, 5번 주간고속도로에서 갈려 나왔다는 뜻이고요. 둘째 앞이 짝수인 4로 시작되니까, 5번에서 갈려나와 다시 5번 도로와 만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10번은 무슨 뜻일까요. 이 도로는 끝자리 숫자로 보아 10번 도로에서 갈려나왔다는 의미겠지요. 또 첫자리가 1이므로 짝수일 때와는 달리 다시 10번 도로로 연결되지 않는 도로입니다. 10번을 타고 가다가 110번으로 빠지면 다시 10번 도로로 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 뉴멕시코주 57번 하이웨이입니다. 숫자를 둘러싼 동그란 무늬는 이 곳의 원주민들이 해를 표현한 것으로 햇살이 강한 뉴멕시코주의 상징중 하나입니다.
ⓒ 김창엽
이렇게 세자리 숫자의 주간고속도로는 대도시 주변에 주로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도 똑 같은 이름의 도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예로 405번 주간고속도로는 로스앤젤레스만 있는 게 아니라, 시애틀에도 있습니다. 시애틀의 405번도 마찬가지로 5번에서 갈려나와 5번과 다시 만나는 도로입니다.

셋자리 숫자 못지않게 적잖은 미국인들한테 생소한 주간고속도로가 숫자 뒤에 웨스트(W) 혹은 이스트(E)가 붙은 도로명입니다. 남북으로 달리는 35번이 대표적인데요, 멕시코와 접경한 텍사스의 도시인 라레도에서 시작, 캐나다가 코앞인 미네소타의 덜루스에서 끝나는 이 도로는 중간에 잠시 35W와 35E로 갈립니다.

35W와 35E는 두 군데서 출현하는데요, 텍사스의 댈러스와 포트워스, 미네소타의 미네아폴리스와 세인트폴 인근에서 각각 이런 이름을 얻습니다. 미국 지리에 익숙한 분이라면 이쯤에서 이게 무슨 얘기인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댈러스와 포트워스, 미네아폴리스와 세인트폴은 각각 일종의 트윈시티(Twin Citie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도시라는 뜻이지요. 이들 두개의 트윈시티 중 서쪽의 포트워스와 미네아폴리스를 관통하는 게 35W, 동쪽의 댈러스와 세인트 폴을 지나는 게 35E인 거지요.

숫자 시스템은 특정 노선 마다 또 나름의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길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지렁이처럼 어디가 머리가 어디가 꼬리라고 말하기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미국 길에는 시작과 끝이 확실히 있습니다. 남북으로 달리는 도로는 남쪽에서 동서로 달리는 도로는 각각 서쪽을 기점으로 합니다.

미국의 고속도로에 표기된 마일리지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메겨집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출구나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짐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요. 또 인터체인지에서 잘 모르고서 남쪽으로 가야하는데, 북쪽으로 가는 길을 탔다면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는 것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일리지는 각 주마다 붙여집니다. 다시 말해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등 서부 해안의 3개주를 남북으로 달리는 5번 주간고속도로에는 예컨대 100마일 표시점이 3개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각주의 맨 서쪽과 맨 남쪽에서 마일리지가 붙여지기 때문입니다.

주간고속도로 외에 다른 3개의 고속도로 시스템, 즉 연방고속도로, 주고속도로, 카운티 고속도로들도 똑 같은 홀수와 짝수, 또 마일리지 부여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으면 미국에서 차를 몰 때, 운전 시간을 줄일 수도 있고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거리에서 자면서 2006년 8월부터 네 계절 동안 북미지역을 쏘다닌 얘기의 한 자락입니다. 아메리카 노숙 기행 본문은 미주중앙일보 인터넷(www.koreadaily.com), 김창엽 기자 스페셜 연재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미국, #고속도로, #홈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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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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