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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18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열렸던 '굿바이 시사저널전'.
ⓒ 시사기자단

지난 7월 18일, 서울의 화랑가 인사동에서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전시회'. 선별된 작품들의 테마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한 주간지의 전직 기자들이 그들이 몸담고 있던 회사를 떠나와 신매체 창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을 돕기 위해 창간 기금 마련 전시회가 기획된 것이다.

'시사저널 사태'는 기자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당한 일을 강요당했고 이에 저항할 용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1년 하고도 1개월 전, 그러니까 2006년 6월 서울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로 호평을 받고 있던 <시사저널>을 둘러싸고 파문이 일었다. 독재정권 시절 공공연했던 검열을 떠올리는 사건이었다.

1년간의 투쟁, 때론 희망이 때론 절망이

삼성 그룹의 이학수 부회장 관련 3쪽 분량 기사가 실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사저널> 사주인 심상기 회장과 금창태 사장 외 2명이 더 참석한 경영진 비상회의에서 편집국장과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동의 없이, 인쇄소에 연락해 문제의 기사를 광고로 대체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금창태 사장과 삼성의 이학수 부회장은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그들은 같은 대학 동창이며, 금 사장은 한 때 삼성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기사가 삭제된 후 <시사저널> 편집국장은 항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했고, 회사 측은 그의 사표를 즉각 수리했다. 편집장 사임 이후 금창태 사장은 직접 편집국에 업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고, 이것을 이행하지 않은 간부들을 차례로 징계하였다.

편집부 내에서 술렁임이 일었고, 기존의 기자협의회를 노조로 전환시켜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 이듬해 1월 5일 노조는 창간 18년 만에 첫 파업에 들어갔다.

사측은 중앙엔터테인먼트&스포츠(JES) 등과 콘텐츠 공급 계약 체결을 맺고 1월 8일 급기야 기자들의 이름이 빠진 채 금 사장이 새로 위촉한 편집위원, 그리고 JES 팀의 기사와 자유기고가의 글로 메워진 '짝퉁 시사저널'을 발행했다. 미디어들은 각자 제 진영만 꿋꿋이 지키며 복잡해져가는 상황을 덮었다.

심상기 회장 집무실 바로 맞은편에 임대한 작은 사무실을 임시 편집국으로 사용하며, 비록 그들의 기사를 요구하는 곳은 없어도 그 곳에서 성난 전사들은 삼성 인력에 의한 짜깁기판이 아닌, '진짜 시사저널'을 온라인 채널을 통하여 만들어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시사저널사에 속해 있는 고용인이면서도 그들은 더 이상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편집국, 시위, 때론 희망이 때론 절망이 함께 했던 1년 간의 투쟁이 있었다.

한국인의 연대의식, 다시 한번 놀라워

그리고 지난 6월, 급기야 1년이 넘는 기나긴 역사적 투쟁 끝에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그들은 방어 포지션을 포기하고 신매체를 창간하기로 결정한다.

<시사저널>의 오랜 독자들은 그들을 따르고 응원했다. 단 며칠 만에 수억의 후원금이 모아졌다. 현장을 직접 찾을 수 없었던 지방에 사는 가정주부는 소박한 음식을 보내겠다며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MBC는 지난 2월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들이 공동 집필하여 출판한 책 <기자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여 지난 7월에 그들에 관한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한국인의 놀라운 연대의식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었다.

이렇듯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강한 지지에 힘입은 그들은 자본의 권력에서 독립적이고 그리하여 신뢰할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신매체 창간 기금 마련을 위한 '굿바이, 시사저널 전(展)'이 열리고 있는 인사동에서 만난 전직 고재열 기자는 작품 판매 수익금은 전액 기금으로 들어갈 것이며, 많은 작가와 소장가들이 귀한 작품과 애장품들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고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에 동참을 원하는 이들은 직접 성금을 보낼 수도, 기부금으로 미래의 매체의 구독자나 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 전 <시사저널> 팀처럼 존중 받고 역량 있는 기자들이 그들의 이상인 언론의 자유를 위해 자신들의 경력과 개인 생활을 희생시키는 이러한 헌신적인 동력은 탄복을 자아내게 하고 또한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 시사저널 노조원 20여명은 지난 1월 22일 오후1시 정동 사옥 앞에서 사측의 직장폐쇄 조치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프랑스에서도 발생한 '시사저널 사태'

이번 파문은 최근 프랑스에서 차기 대통령의 부인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을 상기시킨다.

세실리아 사르코지는 지난 대선 결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고, 프랑스 주요 일간지 중의 하나인 <주르날 뒤 디망슈(Journal du Dimanche, 이하 JDD)>의 한 기자가 단신 기사에서 이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하고 토요일 아침 편집위원에게 이 기사를 넘겼다.

자크 에스페랑디유 편집국장은 이처럼 '뜨거운'주제는 압박의 타깃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에 주저하면서 이 기사를 건네받았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이미 그의 지인인 대 그룹의 대표들을 통해서, 특히 <엘르> <프르미에르> <파리 마치>, 그리고 JDD와 같은 굵직한 제호들을 소유하고 있는 그룹의 회장 라가르데르를 통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미디어들에게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해 왔음을 모르는 사람은 프랑스에서 아무도 없다.

사실 선거운동 전에 이미 '지네스타'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파리 마치> 편집장 지네스타가 사르코지 부인에 관한 기사를 1면에 실었고 그것이 심히 불쾌했던 사르코지는 그를 해고시키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에스페랑디유 역시 여러 시간 숙고 끝에, 특히 세실리아와 니콜라 사르코지의 측근들(정작 장본인인 세실리아는 이 주제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였다)로부터 걸려온 여러 통의 전화와, 그룹의 오너인 라가르데르의 전화를 직접 받고 난 후, 토요일 저녁 사생활을 건드리는 내용이라고 판단하여 문제의 기사를 빼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데, 왜냐하면 유권자들의 투표 여부는 필요시 공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압력은 전혀 없었으며 순전히 자기 혼자 결정하여 취한 행동이라고 그가 아무리 주장한다 한들, 미디어들과(예를 들어 이 사건을 폭로한 <뤼 89> 처럼) JDD 팀은 그 말을 믿을 리 없고 견책을 촉구함이 당연했다.

프랑스에선 반향을 얻지 못한 <주르날 뒤 디망슈> 사태

JDD 기자 노조는 파업을 선언했고, 두 편집부가 총회를 소집한 자리에서 기자들은 매체의 총주주인 라가르데르를 대상으로 표현의 자율권과 독립권을 요구하는 공동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와같은 움직임은 같은 계열사의 타 언론 매체 팀들에게로 번졌고, 기자단과 다수의 독자들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으로 번지거나 분노의 반향을 얻지 못했다. 노조를 통해서 규정에 맞게 작성된 요구 선언을 한 후, 기자들은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직무에 계속 임하거나 혹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남아있는 일을 했다.

사실, 일반 대중이나 전문인들이 언론 매체들이나 비즈니스, 그리고 정치 세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타협에 대해서 모르겠는가? TF1의 민영화 이래로, 언론 매체의 대그룹 통합 이래로 모든 기자들은 윤리와 영향망을 조율할 줄 아는 게임의 법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되었다.

기자들의 독립권을 보호하는 법적 유예들이 있고, 고용인과 주주들 간의 서명 날인된 다양한 직업 윤리 헌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라가르데르 그룹은 2000년에 이 헌장에 서명했다!), 우리, 헥사곤 안의 국민들은 침묵이라는 법과 같은, 어느 정도의 숙명론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것은, 관건이 인권이든 언론권이든, 일찍이 인권선언을 선포했던 국가로서는 참으로 염려되는 일이다.

견해의 자유, 그리고 그것의 필연적 귀결인 표현의 자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1789년의 유산이 아니던가? 그것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 벵자맹 주아노.
이 필요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최근의 한국인들이 보여준 본보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몹시 혼란스럽고 동시에 큰 위로를 준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수많은 심의의 중압감에 고통 받던 젊은 민주주의 국가가 그리 유리하지도 않은 환경 속에서 언론의 독립을 위해 악착같이 매달리는 전 <시사저널> 기자들의 모습은 프랑스인들에게, 기자든 평범한 시민이든 간에, 표현의 자유에는 그 대가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킬 것이다.

기자들은 단지 언어의 사용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통하여, 또한 그 활동 영역의 온전한 보존을 위한 끝없는 투쟁을 통하여, 언어를 지키는 언어의 파수꾼이다.

프랑스판 '시사저널 사태'인 JDD 사건
위험에 처한 프랑스 기자들의 '내적 자유'

프랑스판 '‘시사저널 사태'인 <주르날 뒤 디망슈>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주르날 뒤 디망슈>의 기자가 사르코지 대통령의 부인인 세실리아 사르코지가 투표를 안 한 것에 대해 단신기사를 썼다. 편집국의 의사결정 체계에 따라 이 기사는 신문에 실리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편집국에 기사를 빼라는 압력이 내려왔다. (시사저널 사태와 달리) 편집국장은 압력에 굴복하고 기사를 뺐다. 그리고 외압은 없었고 혼자 결정한 것이라고 '독박'을 썼다.

이전에 그룹의 오너인 라가르데르가 소유한 다른 매체, <파리 마치>(다소 선정적이지만 영향력 있는 타블로이드신문)에서 세실리아 사르코지가 정부와 나오는 사진을 내보냈다가 편집국장이 해고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묻힐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프랑스판 '오마이뉴스'인 'Rue89'에서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Rue89'는 리베라시옹 출신 기자들이 만든 인터넷 대안언론이다. 프랑스 혁명의 독립정신을 기린 것으로 '89번가'라는 제호는 이를 반영한 것이다.

기사 삭제 과정에서 <주르날 뒤 디망슈>를 소유한 라가르데르가 압력을 가한 것이 알려졌다. 라가르데르는 프랑스의 주요 미디어를 몇 개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재벌로 원래 군수산업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라가르데르는 사르코지와 절친하다. 사르코지는 라가르데르를 '형제'라고 부른다.

기자들은 곧 파업에 돌입했다. 라가르데르 계열 미디어 기자들도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기자들은 파업을 접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사건은 언론 자유에 대한 교훈을 남기지 못하고 단지 국가 권력과 결탁한 미디어 재벌의 폐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쳤다. 우파 대통령과 우파 미디어 재벌이 결탁한 프랑스에서 기자들의 '내적 자유'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벵자맹 주아노 기자는 음식 칼럼니스트입니다. <시사저널>에 '한국의 맛과 멋'이라는 코너를 통해 프랑스 음식문화와 한국 음식문화, 프랑스 음식과 한국 음식을 비교하는 칼럼을 격주로 연재했습니다. 또한 이태원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 촬영 장소로도 쓰였던 프랑스 음식점 '르 쌩떽스'와 스페인 구이요리 전문점 '라 플란차'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길사에서 '르 쌩떽스'의 주방장인 프랑크 라마슈와 함께 <두 남자, 프랑스 요리로 말을 걸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태원을 문화의 거리로, 그래서 '서울의 몽마르트'로 바꾸는 것이 목표인 그는 동료들과 '한국수첩'이라는 무크지를 발간해 한국을 프랑스에 알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해 프랑스에서 책을 내기도 했다. 이 책은 조만간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될 예정이다. 한국 생활 13년째인 그는 올해 경기도 양평군 막능리에 농가를 한 채 구입해 촌로들과 어울리며 소일하고 있다. 

* 이 글은 르몽드 디클로마티크 프랑스판과 한국판에 보낸 원고입니다.


태그:#시사저널, #시사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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