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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값은 오승포(五升布) 400~500필에 이르고 노비의 값은 150필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노비의 값을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인 자는 400필로 하고 14세 이하와 41세 이상인 자는 300필로 하여 매매(賣買)하도록 법으로 정하소서." - <태조실록>

형조도관(刑曹都官)의 주청을 받아들여 임금이 윤허했다. 말 한 마리와 노비 셋이 등가였다는 기록이다.

우리나라에 노비제도가 언제부터 정착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살인자와 도둑은 노비로 삼는다'는 고조선과 부여의 관습이 기록으로 전하여 오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노비제도가 전쟁포로와 권력투쟁에서 패한 패배자의 무리를 처리과정에서 더욱 양산되어 확대 재생산 되었다.

노비에 대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으나 태종 이후 성종 때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전국의 호구가 100만 호에 인구 340만 명이었으며 천민과 노비의 숫자가 총 150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는 수치인데 조사 방법과 신뢰성에 의문이 가지만 이 통계가 정확하다면 우리나라는 노비공화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비는 국가기관에 노역을 공여하는 공노(公奴)와 사노(私奴)가 있었으며 사내종과 계집종으로 나뉜다. 귀족과 양민, 천민으로 구분되는 신분사회에서 천민의 하위계급으로 생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여 가축처럼 사고 팔리는 신분이었다.

백성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라

노비는 권력이 부패할수록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권력의 명줄을 재촉했다. 권문세족과 사찰의 과다한 노비보유는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가 패망한 원인도 일정 부분 노비에서 찾을 수 있다. 부패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한 성리학자들은 다른 각도에서 노비문제에 접근했다.

반 귀족정서가 팽배한 백성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자는 정치적인 목적과 인간의 기본율에 충실하라는 유학에 반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주청을 받아들인 태조 이성계는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했다. 변정도감은 오늘날의 민사법원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한시적인 임시기구다.

좌복야(左僕射) 남재와 첨서(僉書) 한상경, 중추(中樞) 김희선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여 상당한 실적을 올렸으나 대소신료들의 비협조에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새로운 기득권자로 등장한 권력자들 모두의 이해가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듯이 노비변정에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어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조가 바뀌는 사회혼란기를 틈타 도망친 노비가 옛 주인을 찾아와 협박하여 천적을 불사르고 재산을 빼앗는가 하면 도감에서 판결을 받아 해방된 노비들이 사람을 죽이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자신이 모시던 주인이 고위직에 오르자 노비들이 덩달아 날뛰었다. 주인의 지위가 자신의 지위인양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렸다. 이것도 모자라 꼼수를 부려 신분상승을 꾀하는 등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변의 와중에 개국공신, 좌명공신, 정사공신 등 국가에서 책록하는 공신이 양산되었고 공신들에게 포상형식으로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면서 노비 문제는 더욱 악화 되었다.

포상으로 받은 토지를 경작하여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노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 노비 확보에 혈안이 된 것이다. 노비가 권문세족들의 쟁탈전의 산물로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태종이 야심차게 추진한 불교개혁의 뒷바람이 가세했다.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나라에서 관리하는 과정에서 권력자들의 아귀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날의 눈먼 돈이나 땅처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그러니 한때는 혁명동지요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이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권문세족들의 위상은 관직과 토지보유량, 그리고 몇 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풍조가 만연했다. 전국의 사찰에서 8만 여구의 노비를 확보한 조정은 전농시, 군기감,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등에 배속시키는 과정에서 권력자들이 알게 모르게 노비를 빼돌렸다. 많이 빼간 사람이 힘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태종은 고민했다. 노비문제를 방치하자니 신하들끼리 싸워 권력기반이 흔들리고 해결하자니 뾰쪽한 대안이 없었다. 태종은 노비변정도감을 혁파하고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하였다. 다시 도감(都監)을 세워 조준, 이숙번, 이직, 전백영, 박신, 함부림을 제조(提調)로 명하고 노비문제를 처결해 나가자 형조판서 유양이 이의를 제기했다.

"전하께서 도감을 설치하신 것은 여러 사람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어 화기(和氣)를 상할까 염려하신 때문입니다. 하오나 노비는 각기 그 자손들에게 까지 영향이 미치고 국정에 관계되는 바이오니 도감을 설치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 <태종실록>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자는 얘기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조용히 보내자는 것이다. 노비변정도감은 일종의 과거사 정리이며 현실문제였다. 재물이 걸린 첨예한 현안이었다. 사간원에서도 맞장구를 쳤다.

"다시 도감을 세워서 민심을 소란하게 함은 옳지 못합니다."

태종은 변정도감을 폐지하였다. 노비문제는 모두에게 이권이 걸려있는 뜨거운 감자였다. 임시로 세웠던 변정도감이 폐지되자 형조에 접수된 노비 소송사건이 폭주하여 사건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각사에 이관하여 처결하도록 했다.

하지만 노비문제는 이권이 첨예한 사건이라 진행속도가 느려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에 태종은 이조판서 한상경, 금천군 박은, 호조판서 박신을 제조(提調)로 삼고 시산관(時散官),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등 57명으로 증원한 변정도감을 설치했다. 하지만 실적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실망한 태종은 도감의 제조를 인녕부윤(仁寧府尹) 김영, 좌군총제 심온으로 교체하고 전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 권진, 인녕부윤(仁寧府尹) 안등,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김여지를 가정제조(加定提調)로 투입하여 변정도감을 독려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쟁송사건을 계류(稽留)시키지 말고 즉시 계문(啓聞)하여 시행하라."

그러나 명이 먹히지 않았다. 하나의 사건이 친척, 정파, 학맥과 줄줄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사간원 지평(持平) 이맹진과 헌납(獻納) 김이상이 도감의 장무영사(掌務令史)를 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간원과 도감이 주도권 다툼을 벌인 것이다. 이에 태종은 사간원으로 하여금 노비변정에 참견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태그:#이방원, #변정도감, #노비, #공노, #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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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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