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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릉. 왼쪽이 태종이고 오른쪽이 원경왕후 민씨다.
ⓒ 이정근
한양의 진산 백악은 삼각산이 품고 있다. 도봉산과 광덕산 능선을 따라 추가령에 이르면 백두대간을 만나 백두산 정기를 받고 있다. 추가령지구대에서 마식령과 헤어진 광주산맥이 명지산과 용문산을 지나 관악산에 이르는 길목에 대모산이 있다. 한강을 등지고 대모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조선 제3대왕 태종이 정비 원경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헌릉(獻陵)이다.

태종이 승하하자 영의정 유정현을 산릉사로 명하고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임명한 세종은 당대의 풍수를 총동원하여 길지(吉地)를 찾았다. 이곳이 내곡동 헌릉이다. 한양도성에서 삼남대로를 따라 신원삼거리에서 박석고개를 넘으면 헌릉이다. 가까운 거리다. 아들 세종대왕이 참배하기 편리한 길이다.

일반 백성들은 노량나루터와 광진나루터 그리고 송파나루터를 이용했지만 임금의 어가는 대궐을 빠져나와 숭례문을 거쳐 청파역과 이태원을 지나 수군(水軍)기지가 있는 한강진에서 배를 탔다. 수군들의 도움을 받아 한강을 건넌 임금의 어가는 사평리(현 신사동)와 말죽거리를 지나갔다.

▲ 인릉.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에 신도와 어도가 구분되어 있다.
ⓒ 이정근
태종을 만나기 위하여 서울 내곡동 헌릉을 찾아가노라면 왼쪽에 순조 임금과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이 있다. 이를 합하여 헌인릉이라 한다. 인릉 자리는 원래 세종대왕 자리다. 아버지 태종에게 극진한 효심을 보이던 세종은 아버지를 헌릉에 장사지낸 후 인릉에 수릉(壽陵)을 마련했다. 죽은 후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다. 사후에도 아버지 곁에서 효도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세종 28년 세종 비(妃) 소현왕후가 먼저 돌아가자 헌릉 서쪽에 먼저 장사지내고 4년 뒤 세종대왕이 승하하자 그 유교(遺敎)를 받들어 인릉에 합장했다. 그러나 길지가 아니어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어 예종이 즉위하던 해 여주 영릉으로 옮겨 갔다. 그 후에 순조와 순원왕후가 들어왔다. 땅은 변함없는데 길지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 변하나 보다.

헌인릉과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국정원이 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태종은 정치의 1순위를 정보에 두었다. 그 자신 잠저시절 대단한 정보통이었다. 태종과 국정원. 묘한 인연이다. 태종이 지하에서 국정원을 부른 것인지 국정원이 따라간 것인지 알 수 없다.

▲ 홍살문
ⓒ 이정근
조선국왕의 왕릉에는 입구를 지나 홍살문에 이르는 길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냇물이 있다. 금천(禁川)이다. 대궐에 금천이 있어 임금과 신하에게 경각심을 주듯이 왕릉의 금천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다. 금천에 걸친 다리를 건너는 순간 신령(神靈)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부분 절 앞에도 개울이 있어 사바세계와 속세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무성한 숲, 잘 가꾸어진 잔디와 정자각을 비롯한 목조 건물은 화재에 무방비 상태였다. 화재가 발생하여 능상이 불타기라도 하면 대단한 불경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환경으로 금천은 화재 대비용 방화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금천이 건원릉에는 잘 보존되어 있는데 헌릉에는 없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주차장을 조성하면서 복개해버렸는지 모른다.

홍살문을 마주하면 정말 왕릉에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 불리는 홍살문은 양쪽에 붉은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죽 박아 세워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던 문이다. 살의 숫자는 왕릉마다 조금씩 다른데 많이 박았다고 더 위엄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헌릉의 홍살문에는 태극무늬를 중심으로 양쪽에 다섯 개씩 박혀있다.

▲ 헌릉 참도. 신도와 어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 이정근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에는 박석이 깔려있다. 참도를 가운데 두고 좌우 양 끝에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水剌間)이 있었을 텐데 없어진 듯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왕릉 참도는 두 부분으로 층이 져있다. 홍살문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약간 높다. 이곳이 선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다. 그 오른쪽에 있는 것이 어도(御道)다. 산릉 제사를 지내러 온 당대의 왕들이 걸었던 길이다.

그런데 바로 옆 인릉에는 참도가 층이 져있는데 헌릉에는 신도와 어도의 구분 없이 하나다. 조선 초기와 후기의 묘제 차이로 처음부터 신도만 만들고 세종대왕을 비롯한 당대의 금상(今上)들은 맨땅 위로 걸어갔을까? 어도(御道)가 있었는데 없어 졌을까? 훼손되었다면 흔적이라도 남았을 텐데 이렇게 깔끔할 수가 없다.

선왕의 혼령을 모시고 임금님이 걸었던 박석을 따라 걸으면 정자각과 마주한다. 박석 이거 보통돌이 아니다. 신령스러움과 주술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 무질서 속에 질서, 무정형 속에 정형을 표현하는 우리나라만의 미학이다. 외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경복궁 근정전 아래 뜰에 깔린 박석과 종묘에 깔린 박석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 동쪽 계단. 왼쪽이 선왕의 혼령이 자나는 신도이고 오른쪽은 금상의 어도이다. 오른쪽으로 세종대왕이 올랐던 길이다(왼쪽). 서쪽 계단. 신도가 없다(오른쪽).
ⓒ 이정근
정자각은 정(丁)자 처럼 생겨 정자각이라 부른다. 산릉 제사에 나온 임금이 제향을 지내던 목조건물이다.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2칸 정도에 맞배지붕이다. 내부에 태종대왕 원경왕후라고 씌여진 신좌(神坐)가 있다.

정자각에는 동쪽 계단과 서쪽 계단이 있다.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온 선왕의 혼령과 임금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에 따라 동쪽 계단으로 정자각에 오른다. 왼쪽 난간이 있는 계단으로 선왕의 혼령이 오르고 제사 지내는 임금은 오른 쪽 난간 없는 계단으로 오르는데 선우족(先右足) 원칙에 따라 오른 발을 먼저 딛는다.

제사를 마치면 축관(祝官)이 축문(祝文)을 태우러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역시 선좌족(先左足) 원칙에 따라 왼 발을 먼저 내 딛는다. 서쪽계단에는 혼령을 위한 계단은 없다. 왜냐하면 제사를 받은 혼령은 정자각 뒤 신로(神路)를 통하여 능상으로 바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 태종과 원경왕후 능침을 두른 난간석이 이어져 있다.
ⓒ 이정근
능원(陵原)에 올라서니 전면이 탁 트이고 능상이 잘 가꾸어져 있다. 능원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사가의 봉분(封墳)격인 능상(陵上)과 능상 앞에 놓인 혼유석(魂遊石), 그리고 능상을 디귿자 모양으로 둘러 싼 담 곡장(曲墻)이 있는 초계(初階), 문인석(文人石)이 좌우에 있고 중앙에 장명 등이 있는 중계(中階), 그리고 무인석(武人石)이 역시 좌우에 있는 하계(下階)다.

태종의 능상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어 웅장하다. 12면의 병풍석에는 구름을 타고 가는 화엄신장과 덩굴무늬를 조각했으며 12방위를 의미한다. 최근 복원한 청계천 광통교의 신장석과 조각이 닮았다. 이 병풍석은 세조대왕의 유조(遺詔)에 따라 얼마간 쓰지 않다가 곧 되살아났다. 묘제(墓制)는 인간의 습관 중 가장 보수적인 부분이라 단번에 혁파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면 완전히 없어져 헌릉 옆 순조대왕 인릉(仁陵)에는 병풍석이 없다.

능상(陵上) 바깥을 난간석으로 둘렀는데 태종과 원경왕후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 이불은 따로 덮더라도 방은 같은 쓰는 셈이다. 살아생전 애증이 엇갈렸던 태종과 원경왕후는 죽어서는 손을 맞잡고 있는 듯하다. 태종과 원경왕후 능침 앞에 혼유석이 각각 하나씩 있다.

▲ 혼유석. 혼령이 쉬는 곳이다. 받침돌 고석이 다섯 개다.
ⓒ 이정근
보통 상석(床石)이라고 말 하는데 왕릉에서 제사는 정자각에서 지내니 민간의 산소처럼 제수를 올리는 용도가 아니다. 혼유석(魂遊石)은 혼령이 나와서 쉬라고 만든 돌이다. 혼유석 밑에 달린 다리를 고석(鼓石)이라고 한다. 상 하나에 다섯 개 또는 네 개가 있는데 헌릉의 혼유석은 고석이 다섯 개다. 고석(鼓石)에는 보통 귀면(鬼面)을 조각했으니 벽사(僻邪)의 의미가 있다.

혼유석을 바라보니 600년 전 세상을 떠난 태종의 혼령이 장마를 걷어낸 햇빛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랐다. 능원을 살펴보러 몇 번을 왔건만 혼령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감개가 무량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8월을 부르는 7월 마지막 날 뙤약볕이지만 얼어버렸나 보다. 우선 머리를 조아렸다.

▲ 능상을 지키는 문인석. 누구일까 궁금하다.
ⓒ 이정근
"대왕님을 가지고 오마이뉴스 독자님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는 이정근 이옵니다."
"알고 있다. 네놈도 알고 있고 오마이뉴스도 알고 있다."

귀신이라서 알고 있을까? 무섭고 두렵다.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네놈이 임금을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거냐?"

저승에서 오마이뉴스를 보고 언짢았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저승에도 인터넷이 통하는지 궁금하다.

"대왕님은 한 사람의 백성이 아니셨고 군주이셨기에 역사가 되신 것입니다. 역사에서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고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무엇을 배웠느냐?"
"대왕님의 공에서 과를 배웠고 과에서 공을 배웠습니다."

"하하하 핫, 고놈 참 고얀지고. 공에서 과를 배웠다?
"대왕님의 일생을 거울삼아 반면교사의 참뜻을 배웠고 온고지신의 슬기를 배웠습니다."

"나는 항상 부족했다고 생각하는데 네놈은 과했다고 생각하는구나?"
"대왕님이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잠저시절에는 아버지를 향하여 혁명의 깃발을 올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이었고 재위 시에는 노비문제였다."

▲ 정자각 뒤 능상으로 오르는 신도. 제향을 받은 혼령이 능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 이정근
태종 재위 18년 동안 가장 어려웠던 일이 노비 문제를 다루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노비는 토지와 함께 생산의 양대 축이었으며 신분사회의 기층이었다. 태종은 변정도감((辨正都監)을 설치하고 노비문제를 해결하려했으나 수구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난항을 거듭했다. 오늘날의 노사문제처럼 당시의 최고 권력자도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단칼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임에는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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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