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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등단한 신순란 시인.
ⓒ 김영선

1950년 7월, 한국전쟁 발발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및 인근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민간인까지 처참하게 살해된 대전 산내 골령골은 조용하다.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땅 속에 조용히 묻혀있다. 망자로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찾지 못한 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간 가족, 그 후 소식은커녕 생사조차 알 수 없던 그들이 골령골에 있다. 50여 년 동안 사회의 편견과 억압 속에 살아온 유족들은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지만, 그 힘은 턱없이 약하기만 하다. 여러 이유로 유해 발굴 작업까지 순조롭지 못한 이 시점에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유족들의 삶과 애환,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1949년,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저만치 할머니 한 분이 서있다. 눈물과 한으로 얼룩진 세월을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온화한 표정, 대전 산내 학살사건의 유가족 신순란(72) 시인. 1949년 영문도 모른 채 큰오빠를 떠나보내야 했던 신씨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시에 옮겨 칠순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혹시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아닐지 내심 걱정되었다. 11일 만난 신씨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에 "이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라며 말을 이었다.

항상 공부만 하던 큰오빠.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알려주기 위해 야학 활동을 하던 오빠였다. 1949년 음력 8월 12일, 5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책방에 오빠가 앉아 있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서 오빠가 나갔어요. 뛰어나가 보니 이미 경찰들이 오빠 몸에 굵은 포승줄을 묶고 총을 겨누고 있더라고. 그래서 펄쩍펄쩍 뛰면서 울었지요.

뒤늦게 오신 아버지가 '이유가 뭐냐, 자식이 죄가 있다면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니 날 데려가라'고 하셨더니 아버지에게 총을 겨눴어요. 그 사이 오빠는 경찰에게 끌려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게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공주형무소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은 면회를 갔지만 신씨는 나이가 어려 갈 수 없었다. 그 후, 신씨의 고모가 대전 목동형무소로 오빠가 간다고 전해주었다.

어느 날 대전으로 면회를 간 어머니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불안에 떨었다. 이튿날 새벽에 돌아온 어머니는 혼절해 누웠다.

▲ 신순란씨 큰오빠가 쓴 책과 사진(사진 오른쪽이 큰오빠).
ⓒ 김영선
"면회를 갔는데 오빠가 손을 계속 뒤로 하고 안 보여주더래요. 어머니가 손 좀 잡아 보자고, 안 잡아주면 계속 기다릴 거라고 했더니 한참 뒤 내밀더랍니다. 전깃줄로 고문당해 온통 패여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찢어져 버스도 못 타고 그 먼 길을 걸어오셨다고 했어요."

신씨가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오빠가 끌려간 후 집안에서는 대화가 사라졌어요. 감시자들이 집안 곳곳에 와서 숨어 있었거든요. 심지어는 마루 아래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때부터 가족들은 저녁을 먹자마자 누워 자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대화가 사라지다 보니 가족이 하나하나 끌려가 조사를 받는 것도 몰랐다. 어느 날,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에 경찰들이 와, 당시 13살이던 신씨를 으쓱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아는 것도 없었어요. 내 친구들이 우리 오빠가 땅에 굴을 파고 사람들에게 밥을 가져다 줬다고 했대요. 친구들 이름 하나하나까지 다 알더군요. 대답하지 않으면 퇴학시켜 버리겠다고 했어요. 아는 것이 없으니 대답도 못하고 울기만 했어요. 목에다 총을 겨눴을 때는 너무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떨기만 했어요. 그렇게 얼마쯤 지나서 가라는 말을 듣고 돌아섰는데 다리가 풀려서 걷지도 못하고 기어 내려왔습니다."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오빠. 아버지는 억울하다며 소 두 마리를 팔아 변호사를 사서 항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에 식구들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다. 지인에게 오빠 소식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형무소 사람들 모두 처형당했다", 이 짧은 말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시신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전쟁 통에 대전으로 이어지는 금강철교도 모두 끊긴 후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에 오던 감시자들은 흔적을 감췄고 아버지는 "시신을 찾지 못하니 묘지라도 만들어줘야 한다"며 혼백을 접어 널 속에 넣고 오빠가 만든 책들로 채워 묘지를 만들었다. 신씨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책들이 너무 아까워 묘지를 파고 싶어도 팔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말도 못하고, 부모님은 평생 죄인처럼 살다 돌아가셨다.

▲ 지난해 산내 학살 희생자 위령제에서 시를 낭송하고 있는 신순란 시인.
ⓒ 오마이뉴스 장재완
그가 학교 다니지 못한 까닭은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낸 신씨가 시인으로 등단한 배경이 궁금했다. 신씨의 시에는 오빠를 그리는 마음과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아버지는 학교에 못 가게 하셨어요. 가르쳐 놓으니 죽는데 뭐 하러 배우냐고 하셨죠. 고통을 알았기에 원망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고 졸업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내 어깨에는 졸업장을 갖지 못한 한이 실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하지만, 들고 날고 하는 시인들이 많은데 못 배운 제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이 이상했어요. 큰아들이 무조건 글을 많이 쓰라고, 책으로 묶어 주겠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23살에 군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 7남매를 두었지만 전역 후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은 신씨의 몫이었다. 고통을 겪었지만, 건실한 집안의 막내딸로 부족한 것 없이 살았던 신씨였기에 더 힘들었다. 더군다나 친정에 말도 못하고 오직 혼자 힘으로 감당해야만 했던 것.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평생의 한으로 남은 배움의 길,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기 싫어서 안 해본 일 없이 고생했다.

"밭에서 일하다가도 시구가 생각나면 집에 들어와 메모를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써요. 바빠서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바빠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거든요."

"오라버니, 제 목소리 듣고 계시죠?"

▲ 오빠에게 바치는 시를 낭송하고 있는 신순란 시인.
ⓒ 김영선
신씨는 2001년에 시작된 산내 학살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가해 직접 시를 낭송했다. "그 현장에서 읽으면 우리 오라버니가 듣고 있겠지, 이 모습을 직접 보셨으면 더 좋아 하셨을 거에요"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신씨는 오빠에게 감사한다. 오빠 때문에 배우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오빠 때문에 자신이 시인이 됐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면서 이 땅 어딘가에 묻혀 있을 오빠를 생각한다"는 신씨는 뒤늦게나마 글로 오빠를 위로하고 있다.

아픔을 감추고만 살았다. 부모님도, 가족도, 신씨 자신도. 두려운 기억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쓴 것도, 사람들과 말을 한 것도 2000년에 뉴스를 보던 남편이 오빠 소식을 알 수 있다며 찾아가면서부터였다. "그 자리만 봐도 한이 풀리는 듯 했어요, 바로 친척들이랑 제물 챙겨가서 제사 지냈죠."

학살 현장에 가보니 조금만 흙을 파도 유골이 나와서 바리바리 자락에 주워 모았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돌로 작은 구덩이를 파고 뼈들을 묻었다. 영원히 말도 못해보고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다는 신씨는 시 '입을 열어도 될까'에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바라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하루 빨리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고 발굴 작업이 빨리 끝나 돌아가신 분들 유해라도 한 곳에 모셔놓고 유가족들이 같이 형제처럼 지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태그:#신순란, #한국전쟁, #산내학살사건, #보도연맹, #눈물의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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