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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 육군훈련소 연병장에서 훈련병들이 제식훈련을 받고 있다(기사 내용과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조용학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꾸는 꿈이 있다. 바로 군대에 재입대하는 꿈이다. 무시무시한 고참들이 버티고 있는 내무반에 더플백을 매고 들어가다 소스라쳐 놀라 깨어난 적이 나 역시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금 가수 싸이가 이 오랜 대한민국 남자들의 꿈을 실제로 이루게 되었다.

'악몽'에서 깨어나고만 싶을 싸이의 심정을 공감하는 예비역 병장인 나의 심경은 누구보다 착잡하다. 왜냐면 나는 싸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2004년 1월과 2월, 모두 2차례에 걸쳐서 나는 <사실은> 프로그램을 통해 '싸이의 병역특례 비리 의혹'을 비롯한 산업체 병역특례 제도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집중 고발한 바 있다.(관련기사 MBC <사실은> 떠오르는 '병무비리'의 핵(2004년 1월29일)<사실은> 병역특례 이대로 좋은가!(2004년 2월4일))

서울 동부지검 수사팀은 3년이 지난 당시 보도를 토대로 수사에 착수, 싸이의 병특 선발 과정에 대가성이 드러났다며 사법처리 절차에 들어갔다.

싸이도 사필귀정, 그러나

13년째 이른바 '고발기자'라는 이름으로 기자질을 해오며 어림잡아 중대 병력의 전과자를 양산했다. 2002년 <시사매거진 2580>에서 'PR비 수수관행 고발' 보도를 한 이후, MBC 예능국 간부들을 포함한 연예계 인사 40여명이 구속됐고, 이보다 앞선 1999년 '하남국제환경박람회 비리' 보도로 역시 정치인과 공무원, 업자 등 십수명이 사법처리를 받았다.

혈기방자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뛰는 가슴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쓰다듬으며 입으로 그저 '사필귀정'일 뿐 이라고 읊조릴 뿐이었다.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던 수뢰 경찰관이나,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다 끝내 철퇴를 맞은 탈세 기업가를 보면서도, 나는 사필귀정이라고 믿었다. 국방부 자이툰 부대 방탄장비 부정납품과 비자금 조성 관련 취재가 한창이던 2004년 가을, MBC의 한 후배는 해당 업체 사장이 자신의 아버지라며 내 옷소매를 부여잡았지만, 그 때도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사필귀정이라며…. 후배를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수 싸이도 사필귀정이다.

건장한 대한민국 남자가 군생활을 편하게 하겠다고 잔머리와 편법을 쓴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나 역시 편해보자고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 근무를 했다. 그래서 한국군 전방부대에서 고생한 친구들을 보면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싸이도 그랬다. 비록 그가 숱한 권력층 자제와 강남의 부유층 아이들 처럼 군입대 자체를 기피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흔히 갖지 못한 연줄을 활용해 음악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산업체 병특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고발했다. 더구나 아직 검찰의 반쪽 짜리 주장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특례병 선발 과정에 싸이 작은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했다면 비난받을 소지 마저 충분하다.

내가 고발한 싸이는 이제 다음주 병무청의 최종 결정이 내려지면 현역으로 재입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3년 전 나의 지난한 고발 보도는 이제 그의 입대와 함께 바야흐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 가수 싸이
ⓒ 싸이 홈페이지
검찰은 칼춤을 추었지만...

하지만 고발 이후 이어지는 검찰의 수사 광풍을 지켜보며 매번 느꼈던 허탈감에서 이번에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검찰 수사 대상이 문제를 가리키는 '손 끝'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고, 여론 또한 그들이 펼치는 불꽃놀이에 눈이 팔려 정작 보도의 본질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발 당사자의 입장은 그만큼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문제 제기를 위해 '동원된' 피고발자들에게 인간적으로 죄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제도적 개선이 뒤따르지 않을 경우 나의 피고발자들은 그야말로 숱한 사례들 중 재수 없는 희생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R비 고발 사건' 당시 나는 상대적으로 취재가 용이했던 MBC의 사례를 위주로 보도했다. 상업방송의 뇌물수수 관행이 보다 조직적이며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관계자들의 진술은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무시됐다.

검찰 수사는 MBC에 모아졌고 MBC의 예능국장과 부장, 차장이 줄줄이 구속됐다. 삼성 X파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제기한 '손 끝'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검찰은 칼춤을 추었을 뿐, 정작 삼성 비자금의 실체에는 접근 조차하지 못했다.

싸이를 '동원했던' 당시 <사실은>의 보도는 어떤 문제를 지적했던 것일까? 두 차례 방송분을 통틀어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을 할애해 우리 취재팀이 보도했던 내용은 한 마디로 '병역특례 제도가 시행에 따른 이익보다 폐해가 너무 크니 폐지하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취재 결과 병특 제도는 밑둥부터 썩은 나무였다. 삼베 2필로 군대를 대신하던 조선시대 군포제의 폐해는 약과였다. 참여정부 하의 군포제는 베를 짤 수 있는 공장이나 공장을 쥐락펴락할 만한 돈을 가진 자본가들의 것이었다.

기업체마다 노비를 사고 팔 듯, 병특 요원 TO를 거래했고, 거래처 사장의 아들을 병특 요원으로 선발해주며 기득권의 거대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공장은 물론 베틀 한대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는 일반 가정의 젊은이들은 축 처진 샐러리맨 아버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개천에서 태어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 국군의 10%에 달하는 7만명의 병특 요원들이 모두 귀족의 자제는 아니었다. 정보처리 특과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원들은 대부분 일선 산업체에 종사하며 노조에 조차 가입할 수 없는 불리한 여건에서 노예적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장의 눈밖에 나서 병특이 취소되면 언제라도 현역병으로 재입대해야 하는 부담에 시달렸고, 실제 그런 경우도 적지 않았다.

노 대통령 "재검토" 한 마디에 병특제도 원점으로

▲ 당선자 시절인 지난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 을지부대를 방문해 사병식당에서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에 앞서 맛스타 캔으로 건배를 하고 있다.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싸이는 부실한 병역 제도가 양산한 전형적인 편법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론은 지금 카운트다운을 하며 싸이의 재입대를 즐기고 있다. 이번에도 언론이 앞장서고 있다. 싸이는 지금 엉터리 병특 제도 때문에 화가난 국민들에게 던져진 먹이감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정작 망국적 병특 제도를 관리해온 병무청은 유유히 그 책임에서 벗어나고 있다. 병무청은 직원 1인당 수백개 기업의 병특 자원 선발과 운용을 감시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애시당초 손을 놓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피감 기업들은 병무청 직원의 방문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다. 공무원이 제 할 일을 포기하면 감시 대상자와의 '불륜'이 싹트기 시작한다. 도둑 잡기를 포기한 경찰이야말로 도둑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삼성 수사를 포기한 검찰을 보라!

여론의 분노가 시작됐고 병무청이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26개 조사대상 업체 전체에서 모두 불법·부당 사례가 적발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다시 국가청렴위원회가 나서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미 '로맨스'라 우기는 '불륜'을 누구도 어쩔 수 없었다. 모두의 관심은 최종 결정권자인 청와대의 노무현 대통령에게 쏠리고 있었다.

'병역 자원의 선발과 관리'는 국가 존립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업무다. 군역이 무너진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 당시 병무청은 병특 자원 선발과 관리를 민간 업체들에 넘겨준 채 이를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는 인력이나 의지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징세권을 민간업자들에게 넘겨주고 업자들을 감시할 제도를 갖추지 못한다면, 누가 세금을 제대로 내겠는가.

결국 돈 많은 사람은 아예 세금을 안 내는 일이 발생했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만 세금을 내는 망국적 구조가 생겨났다. 산업체 병역특례라는 이름의 21세기판 백골징포를 국민들은 더 이상 거부했다. 신자유주의 하의 국회였지만 국회도 국민들의 분노에 귀 기울였다. 국회는 2005년부터 산업체 병역특례 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자칭 좌파, 사실은 부시를 능가하는 신자유주의자 노무현 대통령의 한마디가 문제였다.

"지금까지 정책은 2005년부터 거의 폐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산자부 장관에게) 가서 다시 한번 재검토를 하십시다."

'재검토 하자'는 이 한 마디에 병역특례 제도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병특의 비리구조는 더욱 가속화되기에 이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 5단체의 요구에 밀려 국민의 소중한 목숨을 담보로 하는 군역마저 자유 시장에 내맡겨버린 것이다. 그런 대통령이 오늘 민중의 삶과 유리된 FTA 비준의 축배를 제의한들 또 무엇이 새삼 놀랍겠는가.

돌멩이를 맞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매맞는 아이가 되어 노래를 잃어버린 싸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편한 군대생활을 꿈꿨다는 이유로 지금 그는 '악몽'의 주인공이 되었다. 혹시 지금 우리가 싸이에게 던지고 있는 돌멩이는 정당한 것인가? 투명하고 공정한 병무행정을 책임져야할 병무청으로 향할 돌멩이, 시장의 요구에 순순히 국민의 생존권을 내준 대통령에게 향할 돌멩이 까지 한몸에 맞고 있는 것을 아닐까?

싸이의 재입대 논란을 바라보며 감히 당시 취재기자의 입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안한다. 보다 지속적인 보도로 병특 제도의 폐해를 충분히 고발하지 못한 본인과, 망국적 병역 제도를 부실관리하고 나아가 제도의 폐지까지 막은 노무현 대통령이 가수 싸이를 대신해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의 어떤 조치보다 국민들의 큰 박수를 받게 될 노무현 대통령의 재입대 결단을 촉구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MBC 이상호 기자의 개인 홈페이지(www.leesangho.com)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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