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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근혜 후보가 최태민 목사와 함께 89년부터 90년까지 발행한 월간지 <근화보> 표지. | | ⓒ <근화보> 스캔 | | '사업가' 출신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의 약점이 부동산을 포함한 재산이라면, '퍼스트레이디'를 거친 박근혜 예비후보의 아킬레스건은 과거사다. 박 후보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과거사의 중심에 최태민 목사가 있다.
사실 박 후보에게 최 목사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박 후보가 어려운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의 곁에는 늘 최 목사가 있었다.
최 목사는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을 때 박 후보를 위로하며 친분을 맺었다. "어머니는 영원히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여기는 박 후보에게 최 목사의 위로는 큰 힘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도 최 목사는 박 후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88~90년은 '반격의 세월'... 최 목사와 월간 <근화보> 창간
박 후보가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자, 그도 육영재단 업무에 참여했다. 그는 어린이회관 내에 '근화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보기도 했고, 나중에는 육영재단 고문에 오르기도 했다. 박 후보는 양친이 사망한 순간마다 곁에 있던 최 목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나를 도와준 분들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매도당하던 시절이고, 저를 돕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목사님이 전횡해서 사기를 치고 한 일이 있나? 그 때 육영재단이 얼마나 잘 되고 있었는데…."
| | ▲ 1976년 2월 23일 주식회사 녹십자 대표 마호웅씨에게 혈액대용의약품을 전달받고 있는 최태민 목사(왼쪽). 최태민 목사는 당시 대한구국선교단 총재직을 맡고 있었다. | | ⓒ 연합뉴스 | |
'반격의 세월'도 최 목사와 함께 보냈다.
박 후보는 10·26 사태 이후 청와대를 떠난 1979년부터 정계에 입문한 1997년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잃어버린 18년' 세월을 보냈다. 부친 사망 후 세상의 인심은 바뀌었고, "독재자 박정희"라는 평가가 대세였던 시기였다. 박 후보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이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 때 박 후보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고(1988년), 부친 사망 10주기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으며(1989년), 부친을 미화하는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1990년)했다. "독재자 박정희"라는 세상의 평가에 맞서 '박정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진행한 셈이다.
이 기간에도 최 목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 목사는 박 후보와 함께 육 여사를 추모하는 단체 '근화봉사단'을 조직(1989년)했다. 근화봉사단은 1976년 박 후보와 최 목사가 만든 '새마음 봉사단'의 후신이다. 당시 새마음 봉사단의 총재는 박 후보였다.
근화봉사단의 회원은 한때 전국적으로 70만 명에 육박했고, 지역 조직까지 갖췄다.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회원을 모으고, 조직을 정비할 수 있었던 데는 최 목사의 역할이 컸다.
"국민 속에서 살다가신 부모님을 위해"
| | ▲ <근화보> 창간호에 실린 '이 한 장의 사진'. 66년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 기내에서 자녀들의 안부를 묻는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다. | | ⓒ <근화보> 스캔 | | 최 목사는 박 후보와 함께 월간 신문 <근화보>도 발행했다. <근화보>의 성격은 근화봉사단의 소식지였지만, 당시 문공부에 등록된 명백한 정기간행물로 1부에 1천원으로 판매됐다.
<근화보>가 주로 다룬 내용은 박 전 대통령의 치적과 육 여사의 생애다. 기록영화 <조국의 등불>이 박 정권을 미화한 영상이라면, <근화보>는 박 정권의 정당성을 적극 주장한 월간지다. 박 후보는 이 신문의 사설 '근화사설'을 직접 썼다.
박 후보는 1989년 7월 총 2만 부를 찍은 <근화보> 창간호에서 "나라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신 부모님이기에, 국민 속에 살다가신 부모님이기에, 이제 가신 두 분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국민 여러분의 정성을 모아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의 일차적 목표로 기념관을 건립코자 한다"고 창간 취지를 밝혔다.
<근화보>는 15번 발행 중 특집호를 두 번 발행했는데, 육 여사 15주기를 다룬 2호와 박 전 대통령 10주기에 맞춰 발행한 4호가 그것이다. 특히 4호에는 박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 행사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2만여 명의 명단이 14면에 걸쳐 모두 실렸다. 당시 박 후보는 사설 '국장의 의미와 모순된 현실'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일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애도하고 통곡하며 박 대통령을 영결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동안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국장을 지낸 분에 대한 추도 행사 한 번 없었고 매도 일색의 세월을 보내왔다. 과연 그 매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국장은 무엇 때문에 지냈는가."
이밖에 <근화보>에는 총 4회에 걸쳐 박 정권의 치적에 관한 '조국 근대화의 발자취'를 연재했고 ▲육 여사를 기리는 '한국의 여성상' ▲'박정희 어록'과 '육영수 여사 어록' ▲박 후보의 심정이 담긴 짧은 메모 ▲박 대통령 일가를 담은 '이 한 장의 사진' 등이 매회 실렸다.
또 1990년 4월에 발행된 10호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인터뷰도 실렸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불행한 일로 돌아가셨지만 땅이 있습니까, 집 한 채가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라며 "장기집권 할수록 부패하기 쉬운데 우리는 그 정반대의 경우를 그 분에게서 보았다"고 말했다.
근화보가 폐간된 이유는
| | | ▲ 1989년 10월 <근화보> 4호에 실린 사설. 사설은 박근혜 후보가 직접 썼다. | | ⓒ <근화보> 스캔 | 박 전 대표가 의욕적으로 발행한 <근화보>는 창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1990년 9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이 때는 박 후보가 동생 근령씨와 육영재단 운영권을 두고 다투던 시기였다.
다툼의 원인은 최 목사였다. 당시 박근령씨를 지지하는 단체 숭모회는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 근화봉사단 고문이 박근혜 이사장을 배후에서 조종, 육 여사가 동심을 키우기 위해 설립한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하고 있다"며 최 목사의 퇴진을 주장했다.
박근령씨도 당시 "최태민 목사의 비리, 전횡에 대한 혐의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언니(박근혜)는 철저하게 속고 있다"며 "언니가 최태민의 최면술에 걸려 있다, 지금 최 목사를 몰아내는 게 궁극적으로 언니를 돕는 길"이라고 말했다.
또 당시 육영재단의 한 간부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했던 것도 최 목사를 겨냥한 것이었다"며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씨를 싫어하면서도 (박근혜) 이사장과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했다"고 밝혔다.
<근화보> 폐간, "최태민, 직책도 없이 육영재단 좌우"
당시 최 목사는 불미스런 구설수에 올랐으나 지금까지 최 목사가 어떤 비위를 저질렀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박 후보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며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최 목사를 두둔했다.
이런 박 후보의 최 목사 두둔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박 후보는 "최태민 목사는 고마운 분이다, 천벌을 받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느냐는 말도 있는데 지어내서 매도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 ▲ <근화보> 창간호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그린 강아지 '방울'. 1978년 7월에 그렸다. | | ⓒ <근화보> 스캔 | | 어쨌든 박 후보는 1990년 후반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동생에게 넘겼다. 그리고 다시 깊은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부모의 추도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 목사는 1994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다섯 번째 딸 최순실은 현재 강남 신사동에 200억 원에 이르는 빌딩을 갖고 있는 재력가다. 최씨의 남편 정윤회는 2004년 6월 박 후보의 국회 입법 보조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런 정황 때문에 "최태민 목사가 2대에 걸쳐 박 대표를 돕고 있다" "최순실, 정윤회 부부는 박 후보의 재산 관리인이다" "정윤회가 박 후보의 사조직 '강남팀'을 이끌고 있다'는 등의 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후보는 1989년 12월 30일 일기에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라고 썼다. 1989년은 박 후보가 최 목사와 함께 왕성한 반격의 세월을 보낸 시기다.
현재 최 목사는 없다. 그러나 '의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반격의 세월을 건너 대권을 향한 여정에 서 있는 박 후보에게 '최태민 의혹'의 칼날이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 | 최태민은 누구? | | | 공무원에서 사업가로, 스님에서 목사로 | | | | 최태민 목사는 1912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출생했다. 해방 직후 월남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최도원이었다. 해방 이후 최상훈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다시 1977년 최태민으로 바꾸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그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경찰공무원(1946년)으로 활동했고, 육군 헌병대 문관으로도 근무했다(1949년). 또 사업을 벌여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과 대한행정 신문사 부사장으로도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는가 하면(1954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도 취임했다. 그 뒤 교단을 운영하며(1973년),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 '영생교 본부'를 만들어 신도를 모았다. 이어 목사 안수를 받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해동총회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1975년 영생교 교주 역할을 그만두고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시켰다. 이후 이 단체는 '대한구국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역시 최 목사가 만든 '구국여성 봉사단'과 통합해 '새마음 봉사단'이 됐다. 1978년 이 단체의 총재는 박근혜 후보였다.
최 목사가 어떻게 박 후보와 가깝게 됐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쨌든 그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 박 후보를 움직였고 그만큼 위세를 떨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비위 관련 소문으로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도 박 후보는 최 목사를 감쌌다. 최 목사는 5명의 부인 사이에서 3남 6녀를 두었다. 그의 다섯 번째 딸 최순실씨의 남편 정윤회는 박 후보의 입법보조원을 지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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