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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의 제목이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인가." - 오세윤(소설가)

슴베는 호미나 낫, 괭이 같은 농기구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것으로, 나무 손잡이에 박히는 부분을 말한다.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저자 오세윤, 푸른길)를 지난해 가을에 읽으면서 '슴베'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시골서 자란 내게 이 낯선 '슴베'는 썩 낯익은 것이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부모님의 농기구 중에는 나무자루에 박힌 부분이 헐거워져서 슴베에 광목천을 한 번씩 둘러 끼운 것도 있었다. 날도 아니요, 자루도 아닌 것으로도 부족하여 광목을 감아 박혀지든, 새로운 자리를 찾아 다시 박혀들어야만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슴베, 그 자리.

"남쪽에 내려와서는 '삼팔따라지'라고 하고, 피란 가서는 '서울 놈'이라고, 중학교 가서는 '야간 출신'이라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지방, 타교에서 온 놈'이라고, 가족 내에서의 위치도 언제나 어설프게 끼인 자리로 살았다. 자루도 아니요. 날도 아닌 '슴베'같은 인생…."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는 지난해 어느 가을 밤 10시 무렵에 읽기 시작하여 새벽 4, 5시까지 내쳐 읽었던 책이다. "아는 분이 책을 냈다"며 보내준 지인의 정성도 있건만, 처음 몇 장을 읽다가 좀 더 솔깃한 책에 눈이 머무는 순간 접어두었던 것인데, 지인의 정성에 미안해져서 작정하고 읽다가 결국 밤을 새워 모두 읽고 만 것이다.

놓아야만 했던 꿈 반추하며 읽었던 소설 한 권

▲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겉그림
ⓒ 푸른길
무척 잔잔한 소설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어서, 날밤을 새워 읽었던 걸까? 책을 통하여 우리 아버지 세대가 헤쳐 온 고단한 세월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 세열이 할머니 때문에 몇 번은 목젖이 빳빳해졌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세상과 가족들로부터 어정쩡한 자리에 있는 주인공이, 지난 날 세상과 꿈의 어정쩡한 자리에서 꿈을 놓아야만 했던 나 자신인 것만 같아 안쓰러웠다. 때문에 책을 읽고 난 후 며칠 동안은 심란해져 사춘기 소녀 때 앓았던 열병 비슷한 것을 앓았다.

아직은 누구에게든 선뜻 말해줄 수 없을 만큼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놓아야만 했던 지난 날 나의 꿈. 이미 비켜 가버린 인연이 되고 말았지만, 반드시 가고 싶은 길에 대해 이루지 못한 그리움이 그동안 눌러 참았던 인내를 잃고 걷잡을 수 없이 돋아나고 말았다.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는 내게 이런 책이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4일) 책을 보내 준 사람과 안부나 나누자며 만난 자리가 저자 오세윤(70)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로 이어지고 말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와 느낌을 적어본다.

해주 용당포에서 일제 강점기말에 태어난 주인공은 소년기에 6·25를 겪으며 피난지 홍성에서 사춘기에 접어든다. 여동생들은 이미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전쟁으로 학교를 중단한 주인공 세열이는 한 집안의 장남인데도 학교에 가지 못한다. 대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어린 여동생을 업고 돌봐야한다.

연고조차 하나 없는 낯선 지방에서의 피난 생활.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데 어머니는 어쩐 일인지 여동생들을 자꾸 낳는다. 그래서 집에는 늘 기저귀가 널린다. 그 여동생 중 한 사람이 1968년 <완구점 여인>으로 등단한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 여러 작품을 발표했던 오정희다.

글이 뽑혀 소년지에 실릴 만큼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주인공, 즉 작가의 유년기였다. 여동생(오정희)이 작가로 유명해질 때, 아버지 때문에 놓아야만 했던 꿈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을까? 그래서(아쉬움이 있어서) 소아과 전문의로 있는 동안 꾸준히 글을 써왔으며, 그 원풀이(?)를 위하여 노년에 왕성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늦깎이 문학공부로 이룬 소년기의 꿈

▲ 2006년 12월 4일 시상식장에서 수상자였던 오세윤 선생님.
ⓒ 푸른길
"소설에서처럼 독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내 의지보다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권유로 의대를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지만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지만 의사로써 보람도 많았습니다. 때문에 문학은 아예 잊고 살았지요. 그러니 동생이 작가로 명성을 날린다고 특별한 감정이 생길 리 있습니까? 아픈 아이를 진찰하고 그 아이가 나아서 건강한 웃음을 찾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람도 많고 세상에 쓸모가 있는 것 같아 살아오는 동안 많이 행복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로 명예퇴직을 하고 일에서 벗어난 시원섭섭함으로 인도 여행을 떠났단다. 그 길에서 본 것과 느낀 것들을 길상사(서울 성북구에 있는 순천시 송광사 말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글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늦깎이 문학의 길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반대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을 길이었다.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는 저자 오세윤의 성장소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은 의아했다. 개인의 성장소설이니만큼 자신의 살아온 내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 맞는데 얼만 큼이 진짜이고 얼만 큼이 허구일까? 소설 속 신경 여자가 정말 생모가 맞을까?

"한사람의 성장 소설이니 가급이면 100% 가까워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웃음) 소설 전개를 위해 약간은 허구를 넣었지만, 95% 이상은 진짜입니다. 소설속의 신경 여자가 누구인가? 생모인가? 사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글쎄요?"

"신경여자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생모인가?"는 저자가 이 성장 소설을 발표한 이후,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게 된 질문이라고 한다. 충분한 속내 이야기를 들었지만,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하여 말을 묻어야겠다. 두 번째 질문은 어떤 오빠가 진실인가? 작가 오정희에게는 어떤 오빠였는가?

"오정희의 초기 작품 속에 나오는 세상과 가족에 대한 불만으로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16세 큰오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력이거나 간에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해서 읽는 재미는 완전히 덤이다." - 푸른길 출판사

오정희의 <유년의 뜰>이나 <새> 등을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특별한 어머니나 오빠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작가 오정희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 오빠 오세윤과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에서 묘사되는 그 여동생 오정희와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한 가족이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건을 겪지만, 사람마다 시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작가 오정희와 친오빠인 오세윤 선생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오빠가 달라도 너무 다른 이유나 특별한 가족의 내력도 들었는데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를 기대하고 읽을 독자들을 위하여 또한 묻어야겠다.

"꿈에도 나이제한이 있나요?"

▲ 식사 중에도 글쓰기 이야기가 앞서던 자리에서
ⓒ 김현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얼떨결에 만나 밥을 먹고 차까지 마시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오세윤 선생님은 무척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인자한 할아버지란 것이다. 손녀와의 가슴 설렌 여행길의 정취를 가슴에 품고 있을 만큼 정서적인 분이라는 것을 또한 덧붙이고 싶다. 소설 속 주인공과 거의 같다는 느낌도 덧붙이고 싶다.

주인공처럼 야간 중학을 어렵게 다닌 저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소아과 전문의의 길을 걸었다. 명예퇴직 후 늦깎이 문학 공부를 시작하여 산문집 <바람도 덜어 내고>(2003년)와 <은빛 갈겨니>(2005)를 냈으며 문학인으로서 바쁜 걸음을 걷고 있다.

아는 사람 제의로 얼떨결에 동석한 며칠 전의 밥자리는 늦깎이 문학의 길을 가는 선생님이 속한 한 글쓰기 모임 그 뒤풀이였다.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고 글에 대한 조언을 하면서 서로 글쓰기를 독려해주는 모임인데, 밥을 먹는 중에도 나누는 이야기가 어찌나 진지하던지 그 열정이 무척 감동스러웠다.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회원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들이다. 하지만 그분들의 이야기와 모습에서는 소년 소녀기의 풋풋한 꿈에 대한 설렘이 느껴졌다. 동네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젊은 날에 어쩔 수 없이 접어야만 했던 꿈을 다시 꿈꾸면서 나누던 그 이야기들은 지난 가을 소설을 읽는 동안 잠시 앓았던 열병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내 나이 마흔이 과연 늦은 나이는 절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에 놓아버린 꿈을 아쉬워하면서 쓸데없는 열병을 앓을 만큼 나약한 나이는 또한 아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는 '푸른길'에서 나왔으며 값은 9000원이다.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

오세윤 지음, 푸른길(2006)


태그:#오세윤, #소설, #슴베,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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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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