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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앞표지
ⓒ 푸른길
1943년 해주항 근처 용당포에서 시작하는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는 작가 오세윤의 성장 소설. 지난 반세기 한국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한 한국인의 성장과 자아 발견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해방이 되었지만…, 화자인 '나'의 가족은 아버지가 일제 때 운영한 공장 때문에 막 움트는 공산주의자들의 감시의 눈길 속에 월남한다. 해방이 되고서야 일본 국민이 아닌 원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소년.

"동네입구에 들어서자 유리 미닫이문에 붉은 글씨로 '복떡방'이라고 써 붙인 작은 가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떡을 파는 가게인 줄 알았다. 떡은 없고 노인들만 모여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중략)...대문에 '맹견주의'라고 써 붙인 집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항상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아니면 결전을 앞둔 적군의 작은 성을 지나가는 듯 쭈뼛한 느낌이 들었다.(중략)도둑이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곳 서울은 도둑 천지인가 보다.-본문 중에서

지난 반세기 한국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한 한국인의 성장과 자아 발견 과정

해방 이듬해의 서울, 처음 만난 서울을 이렇게 반추한다. 매일 되풀이 되는 빤한 나의 일상이어서 밋밋한 줄거리의 이 책은 자칫 무료했다. 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여 모두 읽고서야 책을 놓은 것은 이처럼 재미있는 표현들 때문이기도 했다. 이쯤은 주인공이 9살인데 소년의 순진한 시선이 재미있고 당시 서울이 짐작된다.

해방과 전쟁을 앞둔 한반도. 뱃길로 필요한 물자를 구하러 오고가는 친척이야기, 친할머니의 해주행…, 하지만 대체적으로 평온한 소년의 일상이다. 공동우물 앞에 물통을 길게 줄지어 놓고 기다리는 동안 놀기에 바쁜 소년이다. 날마다 잠자리에서 오줌을 쌀만큼.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6.25전쟁. 가족은 피난을 떠나는데 아무런 계획도 연고도 없는 홍성에서 피난생활은 시작된다. 6.25라는 나라전체의 혼란과 함께 주인공 역시 사춘기가 시작되는데. 힘들수록 자아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간다. 홍성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 소설의 가장 많은 부분에 해당한다. 가장 아프지만 가장 따뜻한 희망이 자라는 시기이다.

가족은, 다른 피난민들처럼 끼니마저 힘든 날들을 보낸다. 아이밖에 낳고 키울 줄 모르던 어머니가 밥벌이를 위해 좌판 장사를 하게 되고 소년 역시 가족들의 끼니를 위하여 어떤 일이든 하게 된다. 심지어는 원하지 않는 도둑질도 하게 되는데..., 하지만 무엇을 하든, 그 일이 만족스럽든 괴롭든 자아성장의 욕구로 늘 허전하다.

소년에게 자아성장의 가장 큰 몫은 공부. 그런데 왜 부모님은 장남인 자신을 공부시키려 하지 않는가. 피난 이듬해부터 두 여동생을 이미 학교에 보내고 있으면서. 어떤 힘든 상황에도 가족들을 든든하게 이끌던 아버지 아닌가. 그럼 어머니는? 어머니는 자신에게 유독 냉정했다. 학교문제도 그랬다.

자아실현과 현실에서 허전할 때마다 한줄기 위안은 늘 외할머니다. 혹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책을 읽는 동안 화자의 할머니 이야기에 눈 끝이 축축하게 젖을 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는 할머니도 나를 맞을 때는 서두는 몸짓을 했다. 언제나 문밖에 서서 기다렸다…(중략)…방안에 들여놓는 소반에는 죽 한 그릇과 김치 한보시기. 할머니는 차마 부엌에서 들어오지 못했다. 아침에 지게를 지고 나서는 나에게 도시락을 건네줄 때의 할머니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뭇짐을 지고 오느라 더 힘들었을 손자에게 죽 한 그릇을 내어 놓는 그 속이 얼마나 쓰리고 오죽이나 민망했을까.-본문 중에서

나무하러 가는 손자에게 매일 아침 자신의 하루 끼니, 그 몫을 덜어 도시락을 들려주면서 행복한 할머니. 하지만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 온 손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멀건 죽 한 그릇. 그것이 너무 안쓰럽고 미안해서 차마 손자를 보지 못하는 할머니의 순박함에 아주 어렸을 때 시골 아무 곳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던 할머니들 모습이 떠올랐다.

소설은 이처럼 6살 어린 소년의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시작. 6.25에 대한 혼란. 몇 년 후 난생처음 아버지로부터 "개새끼"라는 욕을 들으며 아버지가 원하는 의대를 지망하는 등등, 한 소년이 성년에 이르는 과정이 주인공의 나이 따라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줄거리도 밋밋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아 가슴 뭉클해지기를.

주변 친구들의 어렵고 곡절 많은 신변 이야기 들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서로 힘든 사람들끼리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돋보이는 희망의 이야기였다.

슴베!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의 의미가 특별하게 와 닿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슴베'를 전혀 몰랐다. 슴베는 날과 자루를 이어주는 부분, 즉 칼이나 낫을 보면 자루 속에 박혀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슴베라고 한단다. 아무리 잘 드는 칼날도 이 부분이 없으면, 야무지게 끼어지지 못하면 칼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좋은 말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슴베, 그 서툴게 끼어서 어정쩡한 아픔이 지은이만의 이야기뿐이랴. 우리 누구나 서툴게 끼어있는 슴베 같은 아픔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있을 터. 쉽게 털어버릴 수 있든, 나처럼 가슴에 꽁꽁 묻어두고 한번 씩 아파하는 것이든.

내 나이 스물 몇 살. 오직 가고 싶어 열망하던 길이 있었다. 주변 사람 모두 염려하고 말렸지만 그래도 오직 그 길만이 내가 가야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길을 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많은 것들이 결코 아쉽거나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그 길을 아프게 놓아야만 했던 절망이란.

아직은 인연이 닿지 못했다고 억지위안을 삼으면서 한순간에 놓고 돌아서야만 했던 그 길. 그때, 그 길을 원하는 대로 갔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 것인가. 아직은 주인공처럼 털어내 보일 자신도 용기도 없다. 하지만 저자는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삶의 길에 방해가 될 뿐이니 어서 털어내 버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올 한해. 살아온 날들을 한번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는 이즈음에 읽기 마땅한 소설이다.

"왜 책의 제목이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인가. 남쪽에 내려와서는 '삼팔따라지'라고, 피란 가서는 '서울 놈'이라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야간 출신'이라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지방, 타교에서 온 놈'이라고, 가족 내에서의 위치도 언제나 어설프게 끼인 자리로 살았다. 자루도 아니요 날도 아닌 '슴베' 같은 인생.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나는 당당할 수 있었다. 신과 많은 이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왔다. 싹을 틔우면 나무는 자라는 법, 그게 나무의 속성이요 성장 의지가 아닐까." -후기 중에서

작가 오정희의 초기 작품 속에 나오는 '가족과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16살 큰오빠'가 이 책의 저자 오세윤. 많은 동생들 때문에 늘 기저귀가 펄럭이던 집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많은 동생들 중 한사람이 오정희.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실존인물이라니 두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맛도 좋으리라.

덧붙이는 글 |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
지은이:오세윤/펴낸곳:푸른길 2006년 9월 18일/9000원

※지은이 오세윤은 해주 출생. 서울사대부고와 서울의대 졸업후 소아과 의사를 65세까지 하다가 늦깍이 글공부를 시작하여 요즘 글쓰는 재미에 여생의 보람을 산다고.산문집 <바람도 덜어내고>, <은빛 갈겨니>, 공저 <시와 녹색 2005> <7천년의 바람을 만나러>가 있다.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

오세윤 지음, 푸른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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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베, 없어서는 안 될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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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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