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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격변기에서 모든 사회는 사람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간의 모순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없는 순간을 우리는 시대의 격변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격변기에 기득권층이 그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변화를 만들어 실행해 나가는 세력에 의해 역사는 발전되어 왔다. 그 변화는 그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 살아가게 한다.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로 지중해의 패권자가 되어 대외적으로 고속 성장한 로마는 대내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원로원 계급에 의한 대토지 소유와 병역을 수행한 일반 시민들의 몰락은 로마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다. 중종년간 조선은 훈구의 개혁의 건전성을 잃어버리고 권력화되어간다. 그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왕의 측근이 되어 정치를 좌지우지하며 척신의 전횡기라 불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불안한 사회에서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고 등장한 사람들이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와 조선의 조광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 이외에 당시 유력가문 출신이란 것과 그 개혁의 극단성 때문에 일정 정도 이루었던 성공마저 송두리째 망치고 삶을 마감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이 둘의 사례를 바라보면서 개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다.

개혁의 시작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가우이수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인 한니발을 무릎 꿇린 '자마의 승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이다. 그들의 양가 역시 훌륭하여 그들의 양조부는 노예군단을 이끌고 전장의 최전선에서 한니발에 맞서 싸우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이른바 '스키피오 재판' 때 그의 편을 들어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이후 법무관을 거쳐 전직법무관의 자격으로 속주 에스퍄냐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2년 뒤에는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6년 뒤에 다시 한번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얼마 안가 비록 사망했으나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선대들은 로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다.

조광조는 자가 효직이며 호는 정암으로 개국공신 온의 5대손이다. 조선사회 역시 음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조광조는 그의 선조에 의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유력가문에서 출생했다. 자(子)·손(孫)·서(壻)·제(弟)·질(姪)로 이어지는 5대손까지도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조상의 덕을 보기보다는 과거에 합격하여 정계에 진출하지만 그 역시도 훌륭한 사대부 집안의 자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배경과 함께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은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개혁의 배경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7년 26세에 에스파냐로 파견되는 군단의 회계감사관으로 선임되었다. 종군 당시 토스카나의 넓은 토지를 지나가면서 외국에서 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고 자작농은 보이지 않는 상태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반란이 일어난 에스파냐는 그의 아버지가 현지 주민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란 이후 파견된 로마군은 진압에 실패하고 전투에 패배해 가진 것을 뺏기고 간신히 휴전을 얻어 철수하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한다.

또한 기원전 135년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이 일어난 시칠리아에 파견된 정규군단은 진압에 실패하고 고전한다. 무언가 로마 사회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의 날카로운 눈은 그 모순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기층 체제 속의 기득권층에서도 문제점을 알아차리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예컨대 가장 가시적인 문제였던 군대의 양적 감소를 위하여 군역 대상자의 재산 하한선을 낮춘다. 그러나 재산의 하한선을 낮추었는데도 군역의 의무를 수행할 시민 수는 줄어들었다. 병역을 면제받는 무산 계급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이러하다. 로마는 농경민족이다. 당시 로마의 농업은 가족규모의 자작농으로 노예도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들 소규모 자작농들이 직접세 대신에 병역에 종사하면서 로마의 패권 확립에 일익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포에니 전쟁 이후 변화되었다. 로마의 연전연승으로 기원전 2세기 전반에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기원전 240년경인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에서 직접세로 들어오는 다량의 밀이 이미 소규모 자작농의 밀 생산에 타격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타격을 견딜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로마 자작농들은 목축업과 올리브유 및 포도주 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당시는 여전히 소규모 자작농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또한 전쟁에서의 승리로 이탈리아 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져 올리브유나 포도주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 그 문제는 심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서쪽의 에스파냐에서 동쪽의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는 속주에서 '10분의 1세'라는 십일 조세와 광산 수입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외의 간접세 까지 합하면 로마 시민에게서 전시국채의 채권형태인 채권 구입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로마 시민에 대한 직접세를 거둘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직접세는 재산 정도에 따라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것의 폐지로 부유층은 돈이 많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남은 돈으로 투자할 대상을 찾게 되었고 자연스레 부동산으로 눈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작농의 토지를 뺏어서 소유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전쟁 이후 늘어난 노예의 노동력 앞에서 기존의 밀 생산으로는 가격경쟁력을 갖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업종을 전향한다. 하지만 올리브나 포도주는 몇 년 이후에나 회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며 선행투자 비용도 높다. 그들은 곤경을 타개하려고 빚을 지나 결국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게 된다. 혹은 땅을 헐값으로 내놓기도 했다.

조광조-사림파의 정치적 목표는 중소지주인 사림계가 정국을 주도하되 경제는 농민 자작농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조선 건국 초 사대부들은 고려 말의 혼란 상황에서 주자 성리학에 의한 사회 건설을 청사진으로 제시하였다. 당시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이것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가능해 졌다. 몽둥이 찜질을 통해 그들이 맘에 드는 지역 농민들을 노비로 만들고 그 지역을 자신이 소유하는 식으로 토지를 늘려갔었다.

결국 이는 처간제의 일반화를 가져왔고 이는 국가 재정 및 군역 및 인력을 담당하는 양인들의 감소를 가져왔다. 국가는 날이 갈수록 약화되어 갔다. 이에 사대부들은 당시 최신식 학문인 주자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강남 농법을 도입한다. 사대부에 의해 처간제는 지주, 소작제로 변화되었고 이는 양인의 확대와 인신의 예속을 축소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이념하에 수조권을 변화시켰다.

또한 강남 농법을 도입하며 지방을 장악하고 후에는 역성혁명을 일으키며 주자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보를 건설하여 논농사의 일반화를 가능케 했으며 인분을 비료로 이용하는 등 생산력의 증대를 이루어 자영농의 증가 및 청사진을 현실화하였다. 하지만 당시 훈구는 특권 세력화되어서 대지주화되었고 따라서 이는 사림파 입장에서는 스스로 조선왕조의 성립 기반을 파괴하는 행태라고 볼 수 있었다. 양인인 자영농이야말로 사회의 근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개혁의 진행

그라쿠스 형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에 셈프로니우스 농지법(렉스 아그라리아 셈프로니아)을 제정한다. 내용의 골자는 이러하다. 개혁의 대상은 국유지로 한정하였다.

1. 임차 상한선 500유겔룸(125헥타르)로 제한한다. 아들 명의로 한명 당 250유겔룸 인정한다. 단 일가족 전체가 1000유겔룸 넘을 수 없다. 목축용 가축 수는 600마리가 상한치이다.

2. 임차권은 상속할 수 있으나 양도는 불가능함

3. 1천 유겔룸 이상 임차한 자는 그것을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 국가는 반환된 토지의 면적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한다. 그런 다음 국가는 상설 실무위원회를 설치하여 희망하는 농민에게 임차 농지를 재분배한다.

4. 추가 항 : 선행투자를 위해 무산자에게 제공할 보조금도 국고에서 지불한다.

이 법은 무너진 소규모 자작농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이 스스로 가장 그 효율성을 띄고 있었던 한니발 전쟁도 사실 소규모 자작농이 굳건하지 않았으면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원로원 체제라는 도시국가로서의 로마에서는 소규모 자작농이야말로 사회의 근간이었다. 만약 전폭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들의 무너짐은 곧 로마의 무너짐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원로원은 그들의 기득권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반발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호민관 옥타비우스을 포섭하여 그에 의한 거부권의 발동으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법 제정을 막았다. 이에 그는 개혁을 위해 전례 없는 호민관 해임을 한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단행은 시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고 이는 이후 그의 실권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극단적이었다.

옥타비우스의 실각 이후 원로원은 공세를 더욱 강하게 하여 그가 독재라를 꿈꾼다는 비난을 하며 시민들을 편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후 그의 재선은 불확실해 졌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큰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토지개혁 같이 효과가 적은 사안일수록 오랫동안 유지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원로원의 거센 반발 앞에서 그가 고작 일년을 집행한 것으로 그 효과가 시민들에게 확실히 각인될 수는 없었다.----오히려 그의 실각 이후 법 개정에 의해 그의 개혁은 무위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유효했다. 그의 개혁 이후 2년 뒤에는 31만7933명에서 31만8823명으로 8년 뒤에는 39만4736명으로 병역해당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이 죽은 기원전 133년 아직 21세 불과했다. 그의 어리숙함 때문인지 그는 이후 약 10년간 평범하게 경력을 쌓는다. 그리고 기원전 124년 호민관에 당선된다. 그리고 그간 생각해 두었던 법안들을 계속하여 제출한다. 가장 대표적인 법안 들은 이러하다.

1. '식민법' : 형의 자작농 장려책을 이어받았으면서 더욱 나아가 농업 사회인 로마의 변화를 꿈꾸었다. 기존의 로마의 식민지는 전략적 관점에 입각한 요새 건설이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계획할 때 모두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특히 그가 카르타고의 옛터에 건설하려고 했던 유노 식민지가 그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낸다. 농민들 외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이주민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즉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2. '시민권 개혁법안' : 라틴 시민에게는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하고 이탈리안인에게는 라틴 시민권 인정한다는 것이 이 법안의 골자이다. 전리품 분배의 변화와 직접세의 폐지로 로마 시민권은 그전에 비해 큰 유인가를 갖게 되었다. 실제로 라틴 시민이 거주하는 행정구역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존의 시민권은 상당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주어졌다. 따라서 이런 큰 혜택이 주어진 이후 많은 라틴 도시의 사람들이 이주가 이어졌고 인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따라 법 개정도 일어난다.

이 상황에서 그는 시민권을 더욱 확대하는 것으로 생각을 맞춘다. 하지만 이는 로마 연합 방식이 최선의 방위체제라 여기던 원로원에게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민권의 확대는 도시국가 로마의 붕괴이자 로마 연합의 해체이고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이우스 그라쿠스에서부터 도시국가인 로마에서 제국으로의 로마의 이데올로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광조-그는 성리학에 입각하여 백성의 뜻을 따르는 위민 정치, 사대부 주도의 이상적 관료 정치를 꿈꿨다. 특히 임금과 백성은 하나이며 백성의 대표자인 사대부가 정치 주체임을 강조했다. 그는 중종의 모델로 세종을 선택했다. 황희와 같은 현명한 재상을 쓰고 성리학을 존중하며 언론과 학문 활동, 예컨대 집현전과 성균관이 활성화된 시대로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인재 추천 권한과 법을 고칠 권한이 있으며 공론을 주도하는 존재로 본 현명한 재상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을 좋게 보았다. 그는 이를 위해서 훈구파를 약화시켜 나갔다. 우선 그는 훈구의 대토지 겸병과 노비 탈점을 비판하였다. 이는 국가 재정의 축소와 농민 유이민 증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현량과를 실시함으로 사림파를 정계에 대거 등용하고자 했다. 그리고 남발된 중종반정의 공신 위훈을 삭제한다. 또한 일반 농민들을 위해 그들이 유이민이 되는 것을 막고자 토지 소유를 10결로 제한하는 일종의 균전제의 개혁을 주장한다.

개혁의 실패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두 형제는 모두 살해당한다. 그것도 형은 고작 7개월 동생은 2년이란 기간동안 개혁을 하였을 뿐이니 그 열매를 보지도 못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당시의 로마 시민들 역시 그들 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도 올바르게 이해받지 못했으며 특히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경우 그 지지자의 돌발적인 살인으로 더욱 일을 크게 만들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개혁의 중단으로 이끌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호민관이라는 직책 내에서 반체제 운동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집권 세력의 응집력에 정면으로 노출되었고 아무도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군사권도 없는 그들은 결국 개혁의 힘을 계속 가질 수 없었고 무너지고 만 것이다.

조광조 당시 사림계는 뚜렷하게 정치 집단을 형성하긴 했으나 아직 훈구를 대신할 만한 힘이 있지는 않았다. 향약을 보급하며 향중공론을 내세웠으나 아직 그것이 정치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지방에 한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무리수를 두었다. 훈구파의 비리 공격과 공신 위훈 삭제들은 기득권의 반감을 샀고 특히 현량과 설치는 같은 사림파인 서경덕이 반대할 만큼 인사의 근간을 무너뜨릴 만한 성질이었다. 결국 그의 개혁은 이상적인 가치인 하, 은, 주 시대의 왕도 정치를 지향하는 급진적이었고 현실 적용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결론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위의 인물들은 개혁가로서 자신을 사회에 부딪혀 나간다. 각자 그들은 자신의 이상을 갖고 있었으며 상당히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명문가에 뛰어난 능력과 안목으로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개혁하고 그 사회가 걸어갈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청사진은 카이사르에 의해 조광조는 이후 사림의 집권으로 인해서 이루어 졌다. 이는 이들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사회 변화를 위한 정치투쟁이었기 때문에 비록 실패했지만 계속 되었고 결국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개혁이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꾸준한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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