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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일독했다. 그때까지 제국 로마의 침략사 정도가 내 고대 로마사 지식의 전부였다. 기독교도에 대한 잔혹한 학살과 콜로세움, 영화 <벤허>와 검투사는 그 들러리 배경의 소품인 셈이었다. 대부분 오해와 편견의 허상들뿐이었다. 때문에 ‘팍스 로마나’가 좀 더 세련된 ‘팍스 아메리카나’의 원조 정도로 여겨진 것은 어찌 보면 내 당연한 선입견이기도 했다.

알고 보면, 나의 로마사는 오해도 아니고 편견도 아니고 몰이해에 가까웠다. 마지막 권을 덮었을 때, 이미 나는 로마인이 되어 있었다. 수많은 장면들 속에서 나와 함께 숨가쁘게 호흡하던 활자들이 이제 제 할 일을 끝내고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고대 로마사를 관통하는 열쇠말은 무엇이 될까. 원로원, 로마군단, 황제, 전쟁, 노블fp스 오블리주, 법, 로마가도, 카이사르, 그리고 기독교. 국가란 살아있는 유기체이니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지금 정교분리, 사유재산보호, 인권보장을 표방하고 실천하는 21세기 현대국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햇볕이나 공기처럼. 그러나 이 ‘당연하다’라는 인식과 ‘그렇지 않다’라는 인식의 사이에는 무수한 역사적 시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의심해야하지만, ‘당연하다’는 인식의 지평이 우리에게 열릴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가.

2. 영광과 좌절 - 기독교의 대두

민회의 민주정, 원로원의 과두정, 군주제의 원수정에서 장점을 고루 살려 통치하려 했던 융성기 로마의 지도자들은 훌륭했다. 인간의 이성이 아직 미숙하던 고대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들을 진취적이고도 개방적인 성향의 인간으로 숙성시켰을까.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오리엔트의 ‘모든 빛’과 헬레니즘 문명을 누구보다 먼저 흡수할 수 있었으니, 서양속담과도 같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복자처럼 로마는 어쩌면 행운을 갖고 태어난 나라였다고 해도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 같다.

팽팽한 긴장의 힘이 아직 첨예하게 상충하지 않을 때, 남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깨달은 자는 혼돈 속에서야말로 쉽게 두각을 나타내는 법, 로마는 그런 ‘혼돈’ 속에서 웅비하기 시작했다. 빈번한 전쟁은 인적자원과 문물을 급속도로 교류시키는 촉매가 됐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자 지중해는 이름 그대로 온전히 로마의 내해가 되었다.

속주의 로마화를 종속적 발전이라는 현대논리에 억지로 틀 지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침략’을 뜻하는 언어의 낱말도 제국 후기에 가서야 생겼을 정도로 ‘개념’이 형성되기 전의 시대였다. 기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쓰고 있는 많은 단어의 어원이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로마문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단적인 증명이 되고 있다.

천년제국 로마는, 그러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멸망했다. 정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수많은 위기와 시련을 극복해온 로마인들이었다.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단적인 표현으로 더 이상 로마인이 ‘로마인’이 아니게 한 것, 그것이 로마멸망의 진짜 원인이었다.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이 지적한바,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다신교적 종교에 대한 사고방식이었다.”면, 분명 로마의 멸망에도 로마인의 종교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입되기 전까지 로마세계는 내부적으로 사상적 갈등이나 모순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 사회였다. 로마인들에게는 현세의 삶을 도와주는 지혜와 소망의 신이 있었을 뿐, 사후 영생의 삶을 간구하는 절대유일신은 없었다.

절대유일성은, 의미 그대로 포용이 아니라 배척이었다. 말하자면, 자신과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로마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에 어긋나는, 이질적인 사상이었다. 로마인들에게 유대교와의 전쟁은 유일신을 반대한 종교전쟁이 아니었지만, 기독교적 유일신의 대두는 필연적인 상충을 예고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포교’의 유무에 있었다.

3. ‘신의 뜻’에서 ‘신의 이름’으로

평화지향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리스에서 유래된 로마 신들은 인간의 소박한 삶의 다양한 소망에 존재근거를 둔다. 그리스․로마 신들이 유일신에 비해 훨씬 현세적이고 인간적이고 관용적인 까닭이다. 다산을 소망하는 디아나(아르테미스) 여신은 우리나라의 삼신할머니와 같은 친근한 존재며 유피테르신은 단군이나 조상신과도 같은 존재다. 이런 로마인의 종교관과 로마신의 포용력은 카이사르의 패자 동화정책으로 구현되어 문명화로 대변되는 로마화에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이 관용과 평화의 보편적 가치는 후세들에게 그대로 전승되어 제국로마의 다인종, 다신교, 다문화, 다민족 융합체에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서기 388년, 그리스․로마 종교가 사교로 배척되고 사실상 기독교의 국교화가 이루어지면서 로마인의 숭배를 받아왔던 신상들은 모조리 파괴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앉게 됨으로써 그들로 향했던 로마인들의 현세적 구심력도 함께 소멸되었다. 로마인들의 법과 현세 생활을 논하던 바실리카는 영생을 간구하는 교회로 바뀌었고, 황제의 개선식 때 새들조차 찬란하게 지저귀던 포로 로마노의 거리 위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을 받아 ‘신의 이름’으로 행하여졌다. 신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4. 보편제국에서 절대제국으로, 열린 세계에서 닫힌 세계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 공공정신은 기독교적 공동운명체 정신으로, 현세의 생활철학은 내세의 종교철학으로 로마인의 가치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황제의 권위는 추락되었다. 로마세계의 강력한 하부토대였던 개인의 사적 욕망과 지도층의 공적 리더십의 상부구조 틈새로 내세적 구원관과 절대유일신을 지향하는 기독교 사상이 흘러든 것이다.

포용은 절대성으로, 융통성은 유일성으로 바뀌어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이 함께 어울리던 로마적 열린 세계에서 이교간, 이단간 갈등과 상충의 닫힌 세계로 재편되었다. “하나님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 : 34, 누가복음 12:51~53」는 생전의 예수 말씀은 “하나의 제국, 하나의 종교”라는 신념으로 한조각 의심 없이 구현되어 갔다.

야만족의 침입은 격화되었고 기독교 내부의 종파분쟁은 심화되었다. 그러나 종파간 분쟁, 도시의 주교자리 싸움은 그 이면에 성직자들의 밥그릇 싸움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고, 외적을 막느라고 국고는 고갈되어있어도 각종 면세조치와 지원책으로 교회는 풍요로웠다. 비생산층이 늘어나 과세율은 높아가고, 시민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평화와 실존적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고 현세적 삶이 궁핍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현실을 잊고 사후 영생을 의식하는 심리적 의타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그처럼 위대하고 견고했던 로마정신과 로마세계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제행이 무상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끝으로, 로마 황제들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야할 책무대신 선제와 조상들이 죽음으로 지킨 제국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야만족이 침입해도 ‘신의 뜻’을 받은 황제는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동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다. 황제는 더 이상 시민의 ‘제1인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으로 표현되는 ‘절대 진리’와 부와 정치권력의 지배층 독점은 필시 로마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는 국가 통치의 기본 원리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로마세계는 끝내 종언을 고한다.

5. 로마인을 위한 변명

“달도 차면 기울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라는 말로 로마 붕괴를 이해하려거나 위무를 얻으려는 것은 허위다. 역사란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으로 그 소명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과연 그렇겠다.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사멸한 것에 대한 연구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연구를 결합하는 것, 정의를 향한 미래를 예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이것이 역사학이다”라고 규정했다.

나는 로마 멸망의 원인보다 기독교가 끼친 영향을 말하고자 했다. 로마는 다신교에 걸맞게 기독교를 포용했지만 사멸했고, 그리스도는 로마의 자양분을 토대로 성장해서 2천년 넘게 현세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황제와 지도자들은 하늘의 영광보다 지상에서의 ‘빵’을 우선해야 했다. 신의 이름이라도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중의 목소리야말로 신의 목소리다.”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하지 않았는가.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짧은 치세기간은 안타까웠고, 후기 황제들의 배신과 무지와 방기에는 분개했고, 최후의 로마인 스틸리코의 분투와 어이없는 죽음에는 눈물이 나왔다. 그리스․로마의 인류사적 문화유적 파괴와 지적산물의 유실은 내내 가슴이 아팠다. 나는 로마의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점점 더 로마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패자뿐 아니라 2000년 후의 독자까지도 동화시키고 감화시키는 게 분명했다. 혹, 기도교의 승리조차 로마인의 진정한 포용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승자는 로마인이 아닐까. 그것은 ‘세부’에 숨어있는 로마인의 욕망과 속성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6. 맺음말 - 한국의 기독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로마서13:1」네로 황제시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인에게 쓴 이 편지글은,󰡐1970~80년대 한국 군부독재시절에 목사님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하던 성경 구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20여년 후, 요즈음에는 별로 들려오지 않는다. 청와대 ‘조찬기도회’에서 길거리 ‘비상구국기도회’의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지 길거리 ‘비상구국기도회’에서의 목사님들 기도소리가 자못 위세 당당하다. 언제부턴지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권세는 ‘위에 있는 권세’가 아니다.

예수는 “새벽 미명에 너의 골방에서 남몰래 기도하라”하셨다.「마가복음1:35,마태복음 6:6」그럼에도 대명천지에 어린 양들을 모아 놓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절대 권력자의 기름진 식탁에서 권력자의 비위와 자신의 비호를 위해 기도한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다.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팔아먹는 행위다. 부시도 아침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면서도 서슴지 않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정말 역사는 되풀이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있으면 사회가 존재하고 사회가 있는 한 종교도 존재하게 마련이다. 신앙은 개인에 관한 사항이지만 정치는 대중을 상대로 한다. 종교 교리는 사회사상이 아니다. 신앙은 이성의 분야에 속하지 않지만, 정치는 분명 합리적 판단을 요하는 이성적 행위에 속한다. 이 둘의 결탁은 필히 더 큰 갈등을 갖게 된다.

오늘날 중동 이슬람국가의 종파 간 투쟁이 이를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종교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깨우치고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신념체계라고 생각한다. 자기반성 없이 자기공동체의 응집력과 이익에만 몰두하는 종교는 거짓 종교다. “국가의 발전과 종교의 발전 이 두 가지 명제는 양립하기가 매우 힘들다”라는 명제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갖지만 결코 ‘참’이 아니길 바란다.

7월은 카이사르의 달이다.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라는 카이사르의 말로 세사를 위무해본다. 거침없었던 사나이, 카이사르야말로 로마사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친근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나 역시 그의 말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관용의 정신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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