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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다. 이는 국가와 민족의 거대 역사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역사에도 동일한 의미와 적용이 가능하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삶의 시간과 장소는 각각 다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대화한다. 이 대화는 개인만의 역사로 제한되지 않고 결국 거대 역사를 만들어 간다.

▲ <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
ⓒ 사계절 출판사
<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거대 역사가 자신들에게 남긴 삶의 상처와 흔적들이 무엇인지를 계숙이를 통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간다.

각자의 과거가 독백과 화상으로만 남아 있다면 계숙이와는 상관없는 역사이지만 이야기의 상대, 대화의 상대를 계숙이로 설정하여 그들은 자신만의 역사를, 계숙이와 다산 마을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역사로 확장시키고 있다.

계숙이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대한 어떤 삶의 경험도 없었지만 다산 마을에서 지금, 당산나무 아래에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대화라는 영역을 통하여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하게 하여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가게 한다.

계숙이는 할미꽃을 앞에 두고 할머니와 대화할 때 할머니가 살아온 과거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은빛으로 빛나는 겉의 모습의 따스함과는 달리 속은 붉다 못하여 검붉음 다는 자기 증명을 통하여 할머니의 삶이 질곡 그 자체였음을 계숙이는 할미꽃이 말하고 있음을 안다. 가슴에 안은 할머니의 검붉은 질곡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예외로 쉽게 찾아왔다.

상철이 할머니가 자신과 할머니에게 보내는 섬뜩한 눈매가 그 답이다. 상철이 할머니와 대화는 끊어졌지만 재윤이 할머니가 대화의 다리를 자임하여 한국전쟁 직후의 할아버지와 만석이, 만순이 사이에 벌어진 '과거의 역사'가 현재 계숙이 에게 어떤 역사가 되었는지 깨닫게 한다.

한국전쟁의 '죽임의 역사'는 할아버지를 상철이 할머니의 생명보다 귀한 아이들을 '죽임의 역사'의 인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은 죽임의 원죄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국전쟁'임을 알게 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계숙이를 죽임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켜 주었다. 죽임의 역사가 지금까지는 계숙이에게 미치고 있지만 재윤이 할머니와 대화를 통하여 계숙의 살림의 역사를 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상철이 할머니의 '죽임의 역사'가 자신에게까지 이어지는 것 안 계숙이는 '살림의 역사'로 만들어 가야 하지만 아직 힘이 부친다. 그러나 그 힘은 예외로 죽임의 역사의 당사자인 만석이 아저씨가 나타나 속도감을 내면서 사랑과 용서가 화해를 잉태하는 살림의 역사를 펼친다.

만석이 아저씨 한국전쟁이 얼마나 죽임을 찬양하고 잉태하였는지 동생을 통하여 가장 강렬하게 경험한 사람이다. 끝없는 죽임의 잔치를 만들 능력이 있었지만 그는 새로운 역사고 '생명의 역사', '살림의 역사'를 여는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생각이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죽임의 잔치를 현재에서 살림의 잔치로 장을 펼쳐 가는 것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가 대화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강성댁 할머니와 새어머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계숙이는 만주라는 또 다른 죽임과 헤어짐의 역사가 존재하였음을 안다. 만주의 역사는 지금, 함께 하고 있지만 새어머니를 향한 '닫힘의 문'을 아직도 열지 못하는 계숙이의 마음을 열게 한다.

강성댁 할머니와 새어머니의 대화에 주체적으로 참여는 못하였지만 대화에 참여한 대가는 베일에 싸여 있던 지금의 새어머니를 알게 되었다. 이제 새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로 받아 드릴 준비가 된 것이다.

계숙이는 할머니와 상철 할머니, 강성댁, 새어머니를 통하여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이 남긴 거대 역사가 당산나무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그들에게 남은 상처가 단순히 개인만의 상처가 아님을 새어머니와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된다. 바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만 했던 아픔임을.

새어머니는 "불법 체류자에다 젊은 여자니 더 그래겠지"라는 말 한마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의 질곡을 정의한다. 계숙이는 새어머니와 강성댁 할머니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더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통하여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현재의 자신을 직시하고 미래를 희망으로 설계하였다.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죽음이 비록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이제 계숙이는 당산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세상은 살림의 세상이다.

과거가 아무리 죽임의 역사라 할지라도 지금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들의 과거를 말한 사람들을 통하여 내일의 세상은 살림의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죽임의 역사임을 알고 있는 계숙이는 이제 오늘과 내일은 살림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과거는 죽임의 역사가 너무나 강하였다. 어쩌면 지금의 역사도 죽임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그럴지라도 오늘과 내일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과거를 아는 우리가 왜 또다시 죽임의 장을 펼쳐야만 하는가? 우리는 오늘과 내일이 살림의 역사가 되도록 계숙이처럼 생명을 잉태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 윤기현 저/김병하 그림 | 사계절 | 2003년 10월


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

윤기현 지음, 김병하 그림, 사계절(2003)


태그:#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 #윤기현, #김병하,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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