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인석은 무덤 앞에 세워진 사람의 형상을 한 석물을 말한다. 무덤 앞에 문인석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처음에는 순장의 풍습을 대신해서 인형 형태의 토용을 묻기 시작한 것이 점차 문인석이나 무인석과 같은 석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문인석은 묘 앞에 세우는 사람 형상의 석조물의 하나로 보통 공복 차림의 문관 형상을 하고 있으며, 무인석이나 석수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석물이다. 문인석은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따라 모양과 형태를 달리 한다.

양반과 선비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전에는 많은 선비의 묘지와 묘지를 지키는 문인석이 있다. 이러한 문인석을 통해서 옛 사람들의 삶의 내용과 곡절을 들여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무덤을 지키는 돌사람 문인석

▲ 김정 묘지의 문인석(좌우).
ⓒ 안병기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정(1486. 성종 17∼1520. 중종 15)은 호는 충암(沖庵)이며 본관은 경주로 충북 보은 태생이다. 중종 때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조광조와 더불어 자치주의 실현을 위한 향약을 전국에 걸쳐 시행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으나 1519년 기묘사화 때에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사사 되었다.

중종에서 선조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의 문인석은 대체로 몸이 날씬하고 얼굴은 갸름한 형태다. 조선 초기의 노인과 같은 얼굴을 한 문인석과 달리 수염도 달리지 않은 젊은 얼굴이다. 젊고 역동적인 선비를 원하는 시대정신이 문인석에까지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이르러 문인석의 복장은 복두공복(僕頭公服)에서 벗어나 점차 금관조복을 입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지만 김정 묘지의 문인석 복장은 아직 복두공복 차림이다.

▲ 김반 묘지의 문인석(좌우).
ⓒ 안병기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반(1580. 선조 13∼1640. 인조 18)은 본관이 광산으로 호는 허주(虛舟)이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한 공으로 예조참판,·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허주 김반은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는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신독재 김집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는 안동 김씨 부인에게서 익렬을, 연산 서씨 부인에게서 익희, 익겸, 익후, 익경 등 5형제를 얻었다.

선조 후반에서 인조 연간에 이르는 시기의 문인석은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은 탓인지 여러 가지 경향이 혼재하고 있다. 김반 묘지의 문인석 얼굴은 그리 네모진 편은 아니지만 몸은 약간 비대한 편이며 복장은 금관조복이다.

▲ 김익희 묘지의 문인석(좌우).
ⓒ 안병기
조선후기의 문신인 김익희(1610. 광해군 2∼1656. 효종 7)의 호는 창주(滄洲)이며 관향은 광산이다. 사계 장생의 손자이며 허주 김반의 아들이다. 김반의 여섯 아들 가운데 둘째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자로서 청과의 화의를 반대했으며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따라가서 독전어사가 되었다. 효종 때 승지 대사성·대사헌에 올랐으며, 1656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이 되었다.

김익희 묘지의 문인석은 몸은 가늘고 얼굴은 갸름하며 아주 젊은 얼굴이다. 김익희는 광해군 연간에 태어나 효종 초기까지 살다간 사람이지만 묘지의 문인석들은 중종에서 선조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의 문인석을 더 많이 닮았다.

▲ 김익겸 묘지의 문인석(좌우).
ⓒ 안병기
김익겸(1614. 광해군 6∼1636. 인조 14)은 본관은 광산으로 허주 김반의 아들이다. 1636년, 후금의 국호를 청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간 이확 등과 청나라 사신으로 온 용골대의 주살을 주장하였다. 또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에서 성을 지키며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을 따라 남문에 올라가 자결하는 기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김익겸은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이다. 김만중은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나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김익희의 동생이지만 형보다 20년, 아버지인 김반보다는 4년을 앞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문인석과 많이 닮아 있는 형태다.

▲ 김만준 묘지의 문인석(좌우).
ⓒ 안병기
김만준의 묘지는 김반과 김익겸의 묘지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생몰 연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서포 김만중과 같은 돌림자를 쓰는 걸로 봐서 동시대의 인물일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숙종 42년(1687년)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궐리사를 세우는데 참여했다는 것으로 봐 숙종 때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묘비를 보니 순창 군수를 지낸 것으로 돼 있다. 효종 연간에서 숙종 연간에 이르는 시기의 문인석은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된 정형화된 문인석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 문인석은 장식적 요소가 적은 편이다.

시대가 그리는 사람의 표정

김정의 묘소는 동구 신하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익희의 묘는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서북쪽에 있는 야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그리고 두 분의 묘를 제외한 3기의 묘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산소골 광산김씨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살았던 시대와 벼슬의 높낮이는 다를지라도 이 다섯 분은 각자 자신이 속했던 시대를 대표할만한 지성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분들이다.

엄격히 말한다면 문인석은 고도의 장인 정신을 발휘한 품격 높은 예술품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묘지를 지키고 있는 문인석의 얼굴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표정을 유추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문인석을 통해서 시대가 주는 하중이 무거울 때는 문인석의 표정도 따라서 무겁고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시대가 생기발랄하고 개혁적일 때는 패기에 찬 청년의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는 부모에게 받아서 태어나지만 표정을 결정짓는 것은 그가 속한 시대라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속한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표정을 짓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정과 김익희 묘지의 문인석 사진은 지난 2월에 찍어 갈무리해둔 것이며 김반, 김익겸, 김만준의 문인석 사진은 지난 6월 17일에 찍은 것입니다.


태그:#문인석, #조선, #돌사람, #복두공복, #금관조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