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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 지중해는 동시대인에게 하나의 세계였다. 당시의 교통수단, 통신기술상 정치·경제·문화적 공동체 형성의 최대 한계선이 지중해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중해 세계는 다양한 문화, 인종 그리고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이러한 다양성은 '로마'라는 하나의 제국아래에서 공존하였다.

현대의 세계는 전 지구를 하나로 묶는 통신수단, 일일생활권을 가능케 한 교통수단 등 최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지구촌'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의 흐름과 함께 민족 분쟁, 종교 분쟁, 자원 분쟁 등 다자간 상호접촉이 많아질수록 구성원 간 갈등과 마찰 역시 늘어나 세계화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인류의 '로마'라는 경험을 작가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현 인류에게 과거와의 대화를 권유하고 있다. 그녀는 현대의 세계 평화를 위해 인류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로마제국과 그것을 건설한 로마인들의 모습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 조명함으로써 과거 인류사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던 시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인류 미래에 대한 방향 설정은 어디까지나 현재 미래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자. 과거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지중해에서 로마는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로마를 건설한 로마인들은 어떤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류 미래사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 어떠한 것을 시사하는가?

현실주의 관점에서 본 로마의 역사

우리가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경계하여야 할 점은 이야기 전면에 흐르는 시오노 나나미의 영웅주의 역사관이다. <로마인 이야기>는 전쟁사 또는 국가적 사건을 다루는 통사이기 때문에 전쟁 혹은 제도의 변화의 선봉에 있는 영웅들의 목소리를 지나치게 대변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로마인들 전체의 집합체로서의 로마라는 국가에 특정 지도자의 인격을 부여하게 되는 국가의 인격화 오류를 범하게 됨으로써 로마의 역사가 당시 지도자의 개인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물론 자마 회전에서의 스키피오의 명민한 전략이나 카이사르의 천재적 판단력, 코모두스의 실정이 로마 역사에 결정적인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도자의 현실인식의 원인이 되는 사회 환경의 변화, 로마 구성원 전체의 의식, 로마와 타국 간의 이익의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고는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로 이어지는 제국에 대한 지도자의 개인적 열망 혹은 선견지명에 의해 로마제국의 지도가 그려지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류의 사해동포주의 또는 세계시민주의가 로마제국 형성의 원동력이었다는 순진한 생각을 지양해야 하겠다.

로마인들의 가장 큰 장점은 현실화 능력이다. 어떠한 이념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제도화하고 또한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그것을 유지 보수해 나가는 능력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인의 역사를 특정한 잣대, 예를 들어 인류사에서 평화가 증진되는 과정이라든가, 타국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제국주의의 전형이라 파악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시각을 버리고 가감 없이 당시 로마인이 처했던 상황과 로마인의 특성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합리적 선택이라는 관점, 즉 환경 - 이익(국익) - 이익을 쟁취하는 힘이라는 현실적인 관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실제 로마인들의 역사는 끊임없는 외부환경의 도전과 그것에 대한 응전을 통해서 형성되었고 이는 곧 로마인이 국익을 인식하고 그것을 쟁취해 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렇다면 로마인이 국익을 쟁취할 수 있었던 원인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질서의 재편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힘은 곧 전쟁에서 이기는 힘, 제국 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제국을 수성하는 힘, 즉 군사력을 의미한다. 군사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을 때 로마제국은 번영했고 방위력이 약해지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국방과 치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는 경제적 번영도 사상의 진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건설부터 제국 수립과 안정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작동하던 방위력이 왜 약해졌는가에 대한 사후적 분석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매우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고 각각의 이유가 방위력 약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지도자의 무능을 들 수 있겠고, 내분과 권력다툼, 인플레이션 등 경제적 능력의 약화, 기후적 조건의 악화, 기근 등 자연재해, 공익을 생각하는 정신의 퇴보 등 여느 제국의 말기에 나타날 수 있는 많은 현상을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은 이미 공룡이 되어 버린 로마제국이 급변하는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 하고 혁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은 각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지배적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또 현재 시점에서 각각의 요인들에 대한 사후적 분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시대적 변화에 적응을 실패하고 당시 패권국가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던 군사력을 잃고 몰락했다는 사실이다.

패권국으로서의 로마와 미국

이러한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의 세계에서 과거 로마와 버금갈 만한 힘을 가진 나라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가진 미국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외교적 지도자들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을까?

현재 부시 행정부는 전 세계 국가를 동맹국과 테러국 두 종류로 나누어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부시 행정부 네오콘들의 미국중심적 사고방식, 즉 미국문화 및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 유일한 대안이고 이것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곧 세계평화를 확장하는 길이라는 사고체계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미국문화 수용이 곧 진보라는 시혜주의 외교노선에 입각해 미국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를 테러국으로 단정지어 버리고 이에 탄압을 가하고 있다. 물론 로마제국 역시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갈리아, 이집트, 유대, 아프리카 그리고 파르티아 왕국 등 로마제국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를 위협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그러나 과거의 시기와 현재는 엄연히 다르다. 현재 군사력은 패권 장악에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예전과 같은 포에니 전쟁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아무리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초강대국의 위치를 점했다고 하더라도 핵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를 미국만이 독점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은 인류의 공도동망을 의미할 뿐이다.

중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이들 사이에서 군사력은 보조적 수단으로서 균형을 심하게 왜곡시키지 않는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며 경제력이나 인구, 사회복지 등의 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향후 세계질서 재편 방향

후쿠야마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 논문에서 후쿠야마는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이념을 압도하는 지배적 위치임이 입증되었고 세계의 질서는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재편될 것임을 예언하였다.

시기적으로 상당한 무리가 있으나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 자본주의는 당분간 세계에서 적수가 없을 듯 하다. 후쿠야마의 이상론과 로마제국의 지중해 질서는 상당 부분 통한다.

그러나 과거 로마제국 패권 하 세계질서균형이 현 시점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와 같이 초강대국이 타국의 군사력을 힘으로 압도하여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므로 모든 나라가 합의를 통하여 군사력을 동시에 줄이지 않는 바에야 인류는 힘의 균형에 의한 세계평화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세계화에 동참하지 않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과거 공산주의 세력은 북한을 제외하고는 극단적인 공산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슬람 세력, 쿠바 등 민족주의 혹은 종교를 내세워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 혹은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이 현재와 같이 강제적 선택을 요구한다면 문제는 점점 악화되고 말 것이다. 현재 미국은 미국적 방식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게 아프카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속전속결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 전쟁 승리 후 막대한 인명 손실과 자금 손실에서 볼 수 있듯이 게릴라 저항 때문에 득보다는 실이 훨씬 큰 전략이라 하겠다.

이 역시 과거 로마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소수의 저항을 군사력으로만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족감정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해졌고 종교의 위력 역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도저히 군사력으로 분쇄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스스로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네오콘과 후쿠야마가 믿는 만큼 자본주의는 위력적인 개조수단이다. 이것은 좀 더 편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인간본성에 기인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자본주의의 힘을 믿고 조금 더 천천히 기다릴 필요가 있다.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어 스스로 문을 여는 그 날까지.

미드리다테스 VS 갈리아

덧붙여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우리나라는 고대 지중해에서 로마 패권 하에 살았던 여러 나라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지중해의 나라들은 로마의 방식을 받아들여 로마화에 앞장섰던 갈리아 유형과 로마의 방식을 거부한 파르티아의 미드리다테스 왕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미드리다테스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갈리아가 될 것인가? 이러한 선택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잡히지 않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허상을 좇을 것인가 실리를 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 이야기> 읽고 로마 가자' 응모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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