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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서원
ⓒ 이정근
불교개혁을 마무리하고 세자 길례색(世子吉禮色)을 두어 세자 혼인 문제를 현안으로 다루던 태종 이방원이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 좌정승 하륜, 우정승 조영무, 안성군 이숙번을 비밀리에 불렀다. 이방원을 왕좌에 밀어올린 일등공신들이다.

"내가 덕이 부족하여 재이(災異)가 빈번하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

청천벽력이었다. 이제 등극 6년차, 건강에도 이상이 없고 나이 39세 젊은 왕이 12세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나겠다' 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특히 하륜은 충격이 컸다. 저화를 발행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민생을 챙기려는데 모시는 군주가 왕위에서 내려오겠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민제와 하륜이 '전위는 불가하다' 진언하고 물러난 뒤를 이어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성석린이 백관과 기로(耆老)를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반열(班列)하였다.

"전하의 춘추(春秋) 아직 한창이고 세자의 나이 성년이 못 되었고 아직 아무 변고도 없는데 갑자기 전위라니 신 등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으므로 황공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늙지 않고 세자가 어린 것도 내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바꿀 수 없다. 내가 전위하려는 까닭을 두 정승이 이미 알고 있다."

"이제 나라가 겨우 안정되었으나 전 임금이 두 분 계시온데 전하께서 또 전위하시면 전왕(前王)이 세 분 계시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듣게 되면 무어라고 하겠으며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도 또한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하륜이 말했다. 태조 이성계와 정종이 상왕으로 있는 현실에서 또 하나의 상왕이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얘기다.

"이미 전왕이 두 분 계시니 비록 전왕이 셋이 있은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또 주(周)나라의 성왕(成王)은 비록 어려서 천하에 군림하였지만 천하가 태평하였다. 내가 사직을 타인에게 선위한다면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간(諫)해도 좋겠지만 이제 내 아들에게 전(傳)하는 것이니 어찌 불가하겠는가?"

"성왕이 즉위한 것은 형세가 부득이하였던 것이고 주공(周公)이란 성인이 있어서 왕실을 도왔던 것입니다. 옛날에 인군(人君)의 제명(制命)이 옳지 않으면 신하가 따르지 않은 적이 있었으니 신 등은 감히 왕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위가 지중(至重)한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을 용납 할 수 있겠습니까?"

하륜과 남재가 왕명을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늘 꼭 전(傳)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다시 생각할 터이니 경등은 물러가는 것이 옳다."

하륜은 재빠르게 태종 이방원의 의중을 읽었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궁중은 밤이 깊어갔다. 이튿날, 영의정 성석린과 하륜 그리고 검교영의정부사(檢校領議政府事) 권중화가 백관을 거느리고 입궁했다.

"전일에 아뢴 바에 대해 아직 전하의 결단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내 비록 용렬한 사람이지만 이런 큰일을 당하여 어찌 감히 일을 거꾸로 하여 망령되게 행동하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려 한다."

"전일에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내가 다시 생각하겠다'고 하셨는데 오늘의 하교도 전일과 같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나라의 대통을 세자에게 전해 주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마음으로 독단하여 사사로이 왕위를 주고자 하는 것이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태종 이방원이 가장 어려워하고 두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버지 이성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하륜이 이방원의 의표를 찔렀다.

"이와 같은 일은 태상왕(太上王)에게 고(告)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석린 이하 백관들이 태조 이성계가 있는 덕수궁으로 가기 위하여 덕성방(德成坊)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지신사 황희를 보냈다.

"경들은 너무 성급하게 부왕에게 고(告)하지 말라. 내 또한 생각해 보겠다."

태종 이방원이 한 발 물러섰다.

"전하께서 어찌 감히 망령되게 행동하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려 한다'는 말씀이 이미 계셨는데 이것은 반드시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겠다는 것이니 우선 명일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륜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고 대궐을 물러 나왔다. 이튿날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

"세자께서는 기력이 아직 장성하지 못하고 학문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만기(萬機)를 당하게 되면 기력이 번극(煩劇)한 것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요 학문이 만사에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이 어린 세자가 왕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길창군(吉昌君) 권근의 상언을 전해들은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 황희와 승전색(承傳色) 노희봉을 불러 꾸짖었다.

"번거롭게 다시 들어와 아뢰지 말라."

"자식의 나이 아직 어린데 작위(爵位)가 날로 높아지면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나이 젊어 지위가 높으면 수명에 손실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그 자식의 영현(榮顯)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수명을 재촉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권근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에 호소하며 극력 주청했다.

"이미 세자에게 전위하였다. 밖에서 사람들이 비록 말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모두들 물러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황희로부터 임금의 말을 전해들은 하륜이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전하의 명이 옳지 않으시므로 노신(老臣)이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는 한 절대로 교지를 받들지 않을 것이니 누구와 같이 전위의 예(禮)를 행하시겠습니까?"

역시 하륜의 머리는 팍팍 잘 돌아갔다. 태조 이성계를 끌어들여 태종 이방원으로 하여금 한 발 물러서게 하더니만 이제는 이성계와 동년배인 영의정 성석린을 들이대며 임금을 압박한 것이다. 이에 우정승 조영무가 맞장구를 쳤다.

"신 등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명령을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전위하기가 어려운 것을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전하의 이러한 말씀은 바로 윤허하시는 것이다."

성석린이 노희봉을 시켜 사은(謝恩)하기를 청했다. 태종 이방원은 짐짓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그러려므나."

입시한 갑사(甲士)를 조신(朝臣)들의 반열 뒤에 늘어서게 한 하륜이 봉례랑(奉禮郞)은 동서로 나누어 서게 한 다음 큰 소리로 외쳤다.

"계수(稽首) 사배(四拜)."

천세(千歲)를 세 번 부르니 소리가 대궐을 진동하였다. 또 네 번 절하고 이어서 정비전(靜妃殿)에 아뢰고 네 번 절하여 사례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물러났다.

밤 2고(二鼓). 태종 이방원이 승전색 노희봉을 불렀다.

"국새(國璽)를 세자궁으로 보내라."

명을 받은 노희봉이 국새를 세자궁으로 옮기는 것을 상서원(尙書院)의 관원도 알지 못했다.

태그:#전위, #국새, #지신사, #승전색, #길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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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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