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반적인 한국 영화의 불황 속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물량공세에 기를 펴지 못하던 우리 영화가에 모처럼 주름살을 펴주는 낭보가 전해졌다.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제 60회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수상 소식과 함께 영화 <밀양>이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열림원)에서 그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 또한 보도를 통해 알았다. 수상을 예감한 때문인지, 영화의 흥행을 어느 정도 예상한 발 빠른 기획 덕분인지는 몰라도, 소설은 문고판보다 조금 더 큰 판형에 판화 같기도 하고 목탄 스케치 같기도 한 삽화까지 곁들여 100여 쪽의 가벼운 제본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책을 살 필요도 없이 서점에서 읽고 나오기에 제격이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

ⓒ 도서출판 열림원
소설의 내용은 단순하다. 그런 대로 잘되는 약국을 경영 중인 부부에게 알암이라는 외동아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저는 장애아인 아이는 도무지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평범하고 조용한 아이다.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게임이나 기타 다른 놀거리에도 관심이 없던 내성적인 그 아이가 4학년이 되면서 주산 학원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한다.

약사부부는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아이 스스로 열성인 무엇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비극은 주산 학원장 김도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이가 유괴된 것이다. 물론 그 범행이 의심한 대로 원장의 소행으로 밝혀진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실종 후 두 달 스무 날 여만에 아이는 학원 근처의 지하실에서 부패한 사체로 발견된다.

소설은 아이의 유괴를 다룬 것이 아니다. 줄거리는 단순할망정 던지는 질문은 지독하다. 소설은 아이를 잃은 엄마, 아니 자식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할 권리마저 신에게 빼앗긴 한 인간이 무참한 신에게 대들며 부르짖는 인간존엄에 대한 육성 고백이다.

"이 이야기는 애초 아이가 희생된 무참스런 사건의 전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어느 무디고 잔인스런 아비가 그 자식의 애처로운 희생을 이런 식으로 머리에 되떠 올리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내게서 아이가 또 한 번 죽어나가는 아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알암이에 뒤이은 또 다른 희생자 아내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은 아이의 엄마가 자식이 유괴된 후부터 범인이 검거되고 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았다가 얄궂은 신의 개입으로 절망하여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던 사정을 아비의 육성으로 이야기 한다. 어미는 아이가 유괴된 후에는 아이가 살아 돌아올 거라는 "희망과 집념으로” 미칠 것 같은 삶을 버텨낸다.

범인이 검거된 후에는 "이번에는 희망과 기원에서가 아니라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으로”로 또 한 번 쓰러질 것 같은 삶을 견딘다. 그러나 살아있다기보다는 죽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직접 눈깔을 후벼 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은” 심정으로 모진 목숨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이웃 김 집사의 끈질긴 전도에 따라 하나님을 만난다. 냉소적이기만 하던 그녀가 신앙의 힘인지, 시간의 마성 탓인지는 몰라도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김 집사는 이제 용서를 말하고 구원을 부추긴다. 아이의 구원까지도 이제 엄마의 몫이 된다. 납치도 신의 섭리요 비명에 간 어린 목숨도 다 신의 예정이다. 신의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알암이가 천국의 문에 들어설 수 있음으로.

이런 제기랄, 여기서 잠깐. 갑자기 기자에게 한 목소리가 들린다. 영화 <그놈 목소리>의 그 비열한 음성과 비웃는 듯 한 호흡소리가 쾅하고 들린다. 설경규의 눈물겨운 호소가 절절하게 울린다. 얼마 전 끝내 고물상 땅 속의 사체로 발견된 여아의 주검이 보인다. 용서라니, 그것은 지나가는 개에게나 던져주었음 싶다.

"인간에겐 도대체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 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 제기랄, 그런데도 엄마는 용서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래서 엄마는 교도소를 찾고 자식을 죽인 살인마를 만난다. 그런데 그것이 또 하나의 비극, 우발적으로 벌어진 아이의 유괴보다 더 불행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벌레가 될 수 없음으로, 신의 벌레로 사느니 엄마는 인간으로 죽는 쪽을 택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녀가 용서를 위해 그 모진 시간의 고문과 기억의 자해를 얼마나 견디어야 했던가. 산 것도 아니요 죽을 수도 없는 모진 지옥에서 겨우 부지한 목숨인 것을, 그런 그녀에게 가장 자애롭고 편안한 얼굴로 구원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저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하는 살인자에게 어미의 용서는 참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한단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영화가 말하는 대답

ⓒ secretsunshine.co.kr
점잖게 말해 신은 얄궂다. 솔직히 말해 자식 죽인 놈보다 더 밉다. 인간의 규약인 법이 사형제를 고집하며 받는 비난은 김 집사의 말처럼 신의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 같이 존엄한 인간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인간애의 발로다. 물론 참회하는 자는 아름답다. 용서하는 영혼은 그가 감내한 고통의 무게가 크기에 더욱 값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것이어야 한다.

현세의 죄과가 단 한 번의 고백과 기도로 사면되는 그 구원의 세계에서 도대체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 성경 몇 구절과 신을 인정하는 고백이면 벌써 천국에 이른 것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내며 용서에 이른 인간의 처절한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 모진 시간과 기억의 고문을 견디고 증오와 앙심의 비수를 오히려 자신에게 찔러대며 겨우 버틴 어미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나님에게 이미 용서를 받은 살인자에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용서라니…. 소설 속의 어미는 신에게 인간은 대체 뭐냐고 대든다. 그 따위 신의 사랑이라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희롱이라며 온 몸으로 절규한다. 인간은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간을 무시하는 하나님, 인간 세상을 희롱하며 위선과도 같은 구원의 내세를 약속하는 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가 말해주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음으로 말이다. 이제 그 답을 찾으러 영화관에 가 볼 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벌레이야기-밀양/이청준/열림원/6800원


벌레 이야기 (반양장)

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2013)


태그:#밀양, #벌레이야기, #이청준, #전도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