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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병자> 포스터
다큐멘터리 <화씨 9/11>로 부시의 명분 없는 이라크전을 힐난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이 또 한번 부시 정권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번에는 미국의 의료 보건정책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는 <병자(sicko)>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다.

무어는 영화 <병자>에서 9·11테러 구조 작업에 참여한 후 폐질환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구조대원들이 제3세계국에서 가장 의료혜택이 뛰어나다는 쿠바에서 치료받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 의료보건업계의 모순과 이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의료보건정책의 개혁을 촉구하려는 의도에서다.

현재 미국에는 4700만명의 무보험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의료 보건정책은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최대의 쟁점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많은 돈을 쓰면서도 서방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의료 보건 체계를 갖고 있으며, 어떤 정책을 펼치냐에 따라 현재보다 훨씬 더 나은 혜택을 베풀 수 있다는게 무어의 주장이다.

<병자>는 9·11 영웅들이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미국 의료계의 철저한 외면속에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경제적 고통까지 감내하고 있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AP통신이 19일자에서 소개한 몇몇 출연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9·11 구조대원 출신 레지 서번츠는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 눈과 귀 감염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일을 그만 둔 이후로 보험 혜택도 중단되었기 때문에 노동자 보상 시스템에 의존하여 겨우 몸을 추스려 살아가고 있는 처지다. 도나 스미스라는 구조대원은 보험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집을 팔고 딸이 살고 있는 집의 창고로 이사해야 했다.

9·11 당시 세계무역센터 근처의 조합 사무실의 목수였던 존 그래햄은 두번째 비행기가 무역센터에 충돌하기 전에 달려가서 31시간 동안 계속해서 일했고 이후로도 몇 개월간 사고현장에서 일했다. 그후 그는 폐질환을 비롯하여 식도 역류, 만성 정맥동염, 외상성 스트레스장애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햄은 2004년에 일을 그만둔 이후로 주당 노동자 보상비 400불로 생활한다.

▲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병자>중 한 장면.
테러 혐의자들은 치료하고, 미국인들 치료는 거부?

무어가 <병자>를 촬영하기 위해 이들 환자들을 데리고 쿠바에서 벌인 기행은 무어식 고발성 다큐 영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화씨 9/11>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어는 아이스크림 행상들이 사용하는 차량에 확성기를 달고 의사당 앞에서 반전 시위를 벌였는데, 이번에는 해상에서 배를 띄워놓고 시위를 벌인다.

무어는 영화 <병자>에서 8명의 환자들을 쿠바 관타나모에 있는 미군 기지로 데려간다. 그의 이같은 의도는 관타나모에서 테러 혐의자들이 9·11의 구조 영웅들보다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고 있는 모순된 현실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무어는 투병중인 3명의 구조대원들과 5명의 다른 환자들을 보트에 태우고 관타나모로 향했다. 그는 관타나모 해군기지 앞에 배를 띄워놓고 확성기로 그의 친구들을 치료하기 위해 기지로 데려가고 싶다고 외친다.

결국 답을 듣지 못한 그는 무상으로 치료하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아바나로 가서 쿠바 의료진으로부터 환자들을 치료받도록 한다. 한 환자는 5일동안 건강 검진을 받은 후 식도역류를 치료받았다. 또다른 환자는 눈과 귀 감염을 치료받았는데, 미국에서 100불이상하는 약이 쿠바에서는 단돈 몇센트에 불과한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무어는 처음부터 환자들과 함께 쿠바로 가려고 계획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쿠바행 동기를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 정부였다.

미국 정부가 관타나모에 억류되어 있는 테러 혐의자들에게 우수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자랑하자 무어는 집에서 치료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9·11 구조대원들 역시 동등하게 치료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쿠바행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무어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관타나모 수감자들은 대장경 검사와 영양 상담까지 받고 있으나, 미국인 (구조대원)들은 가정에서 고통받고 있다"면서 "나는 미국정부가 알 카에다에게 제공하는 똑같은 치료를 미국인들에게도 해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야만 했다"고 주장했다.

무어는 미국의 민간 보험과 제약회사, 미국 민간의료보험 조직인 건강관리기구(HMO)를 비판하고, 프랑스, 영국, 캐나다 등의 의료 제도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제도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5월 28일자 <타임>지에 실린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병자(sicko)> 기사. 이 영화는 출시도 되기 전에 화제가 되고 있다.
ⓒ 김명곤
미 정부, '적성국 무역금지법' 위반 혐의 조사

이처럼 부시 행정부에 대해 두려움 없는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무어는 결국 쿠바에 허가없이 입국해 '적성국 무역 금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미국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 통제실(OFAC)로부터 조사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무어는 자신들의 쿠바 행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행정 당국이 영화가 개봉될 시점에 조사를 벌이겠다고 나서는 것은 영화 상영을 저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음모라고 비난했다. 당초 무어는 작년 10월 저널리스트를 대상으로 한 쿠바 방문 허가를 얻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공개 서한을 통해서 미국 행정부가 "연방법을 노골적이며 터무니없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무어는 부시의 재선과 공화당의 정치 활동을 위해 지난 수 년간 수 억 달러를 뿌려가며 정치적 후원자 노릇을 해온 보건 의료 단체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 영화 상영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최대 수혜자인 부시 행정부가 이를 저지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어는 개혁 성격의 웹 신문 <데일리 코스> 지에서 쿠바 체류 시 어떠한 범법 행위도 저지른 것이 없으며 숨길 것도 없다며 해볼테면 해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쿠바의 공산당 일간지 <그란마> 는 무어가 결국 미국의 사전 검열 제도와 적성국 무역 금지 법안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행위는 마치 1950년대 의회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 있다며 대규모의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숙청했던 메카시즘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영화의 배급사인 웨인스타인의 하비 웨인스타인은 지난 11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병자>가 정부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을 일삼는 선동 영화라기 보다는 미국인들을 하나로 연합시켜주고 치부를 드러냄으로 치료에 이르게 하는 영화라고 소개하며 무어를 두둔했다.

일각에서는 무어의 <병자>가 그의 다른 영화들 처럼 정치적으로 편향적이며 진실의 반쪽만을 반영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무어는 이에 대해 28일 발매된 <타임>지 인터뷰 기사에서 "아마도 내 영화에 대해 화를 낼 사람들은 보험회사와 제약회사의 간부들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나는 <화씨 911>에서 단 한가지라도 사실과 다른 것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1만불의 상금을 걸었었다"며 영화 <병자>의 사실성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표현했다

"설득에 시간 걸릴 뿐, 미국민 대다수는 합리적"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발성 다큐멘터리의 귀재 무어가 <병자>에 대해 갖고 있는 자신감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소수와는 달리 미국민들의 대다수는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설득'에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는 것이다. 무어는 <타임>지에 '설득 가능한 다수'에 대한 신뢰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2003년 3월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우리는 거짓 명분으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내게 야유를 퍼부었다. 당시 미국민의 20%만이 내 의견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화씨 9/11>을 만들었다. 나는 미국민들의 대다수가 설득 가능한 합리적인 사람들일 뿐 아니라 긍극적으로는 올바른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부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해 미국민들의 70%가 동의하고 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무어 감독은 지난 15일 뉴욕 맨하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3년전 바로 오늘 우리는 9·11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화씨 911'을 처음 보았고, 모두가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운을 뗀 후, "최신작 <병자>도 미국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단언했다.

<병자>는 내달 29일 개봉을 앞두고 벌써부터 미 극장가는 물론 워싱턴 정가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병자>가 2004년 한여름에 개봉되어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화씨 9/11>의 인기에 버금갈 것으로 보고 있으며, 부시 행정부와의 대회전 또한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때이른 대선 열기에 휩싸인 대선 후보들이 <병자>를 선거전략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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