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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사에서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은 늘 갈등 관계였다. 구한말의 고종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승만·박정희 등의 친(親)서구주의자들은 국민에게 양력설을 강요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1월 1일은 어쩐지 설 같지가 않다" 면서 마치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음력설을 끝끝내 지켜 왔다.

양력설을 쇠도록 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이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구사했지만, 한국인들은 끝끝내 음력 1월 1일을 지켜내고야 말았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일부 사람들도 박정희가 그토록 권장한 양력설은 끝내 외면한 경우가 많았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일본에서는 신정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구정을 몰아냈지만, 한국에서는 공격자인 신정이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음력 1월 1일이 구정에서 민속의 날을 거쳐 이제는 설날로 확고한 자리를 회복했다.

그럼, 한국에서는 양력 명절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데 반해, 일본에서는 이미 백여 년 전에 양력 명절이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 서구화(근대화)에 뒤졌고, 일본은 서구화에 앞섰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여기에는 보다 깊은 배경이 숨어 있다.

일본에서 양력을 채택한 것은 1872년 11월이었다. 그 이전의 일본인들은 음력으로 명절을 쇠고 있었다. 에도시대(1603~1867년)부터 확립된 일본인들의 대표적인 다섯 명절은 오절구(五絶句)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인일(人日), 상사(上巳), 단오(端午), 칠석(七夕), 중양(重陽)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신정부는 음력 오절구를 금지하고 양력 삼대절(三大節)을 강요했다. 삼대절이라는 것은 1월 1일,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 천장절(天長節)을 가리킨다. 여기서 기원절은 소위 초대 국왕인 신무국왕의 즉위일을, 천장절은 현임 국왕의 출생일을 기원하는 날이다.

메이지 초기의 히로시마현·시마네현 등의 문서를 보면, 메이지 정부가 양력 명절인 기원절 행사에 공무원과 지방 사족(옛 무사계급)을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기존 오대절이나 개인적 경사를 삼대절로 대치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공권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양력 명절의 제도화를 추진한 것은, 당시의 일본인들도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양력 명절에 대해 저항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메이지 정부가 국민들에게 양력 명절을 강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서구화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보다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 어떤 의도일까?

일본 학자 아리이즈미 사다오(有泉貞夫)가 1968년 10월에 일본 잡지 <역사학연구> 제341호에 기고한 '메이지 국가와 축제일'이라는 논문에 그 의도가 나와 있다.

참고로, 유천정부(有泉貞夫)라는 인명은 아리이즈미 사다오 혹은 아리이즈미 데이오의 두 가지로 읽힐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리이즈미 사다오로 발음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논문의 첫 쪽을 보면, 메이지 정부가 양력 명절을 강요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단서가 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기초가 취약한 메이지 정부가 폐번치현(廢藩置縣)·질록처분(秩祿處分)·지조개정(地租改正)이라는 일련의 곤란한 정치경제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측면에서도 통일적 지배자로서의 천황의 권위를 제고하고 또 전 국민의 천황으로의 귀일(歸一)을 목표로 설정하였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메이지 정부가 사상적 측면에서 일왕의 권위를 제고하고 전 국민의 일왕으로의 귀일을 도모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 이전 시대에는 일왕이 오늘날과 같은 권위를 확보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이 국왕을 중심으로 고도의 통합을 보이는 것은 근대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아리이즈미 사다오는 메이지 정부가 양력 삼대절을 강요하고 음력 오절구 폐지를 추진함으로써 전 국민의 일왕으로의 귀일을 시도했다고 기술했다. 다시 말해, 국왕 중심의 국가체제를 새로이 수립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양력 명절을 제도화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음력 명절 폐지와 일왕 숭배의 상관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음력 명절을 쇠던 전근대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는 일왕 숭배 의식이 없었다. 왜냐하면, 전근대 시대의 일본은 막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일왕 숭배 의식을 새로이 심어 주려면, 국민들의 정신 체계를 본질적으로 개조할 필요성이 있었다.

국민의 정신체계를 바꾸기 위해 메이지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간관념을 바꾸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기존의 음력 체계로는 일왕 숭배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양력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그러한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일왕 숭배라는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의 정신체계를 확 바꾸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초기만 해도 신정부의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많은 일본 국민들은 양력 명절에 얼른 친숙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을 본질적으로 뒤바꾼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러일전쟁 승리(1905년)였다.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의 자본주의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지주계층은 국가권력에 기생함으로써 자본을 한층 더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업 자본가로 전환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국가권력에 편승하여 돈을 벌 수 있게 된 지주계층이 국가적 시책에 적극 협력하게 되었고 그러한 협력의 일환으로 음력 명절 대신 양력 명절의 정착에 간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간 지배층의 영향력 행사로 인해 하층 민중까지도 양력 명절을 쇠게 된 것이다.

아리이즈미 사다오는 위 논문에서 <아이자와 일기>라는 한 중농 지주의 개인 일기를 바탕으로 그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양력 명절 자체를 전혀 몰랐던 아이자와라는 지주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가가 돈벌이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후로는 양력 명절을 길일로까지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가 러일전쟁 승리 이후 지주 계층을 우군으로 만들고 그들의 지원 하에 하층 민중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지방사회에서 양력 명절이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위 논문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메이지 정부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양력 명절을 강요했다. ▲처음에는 양력 정책이 민간의 저항에 직면했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지주계층이 국가권력에 기생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이들의 협조 하에 양력 명절이 민간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양력 명절의 확립은 소위 '천황제 국가'의 정착과 보조를 맞췄던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양력 명절이 결국 정착된 일본의 사례를 볼 때에, 일제 총독부-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강압 정권의 집요한 강요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끝끝내 전통적인 음력 명절을 지켜낸 것은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거의 강압 정권들이 한국인들의 신체는 구속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정신만큼은 결코 구속할 수 없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태그:#설날,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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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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