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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언덕 위의 작은 집

거작 <고야>의 작가 홋타 요시에(堀田善衛) 선생은 도쿄의 남서쪽 바닷가에 있는 인구 10여 만의 도시 주시(逗子)에 살고 있었다. 에스파냐의 위대한 혁명적 예술가이자 현대미술의 문을 연 고야의 생애와 시대, 그의 예술세계를 놀라운 필력으로 써낸 4부작 <고야> 를 한길사에서 간행하면서, 나는 책을 내기 전에 작가 홋타 선생을 미리 만나고 싶었다. 책을 통해 한 작가의 세계를 알게 되는 터이지만, 작가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다. 거장 홋타와의 만남은 <고야> 출간에 대한 확신감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도쿄의 시나가와(品川) 역에서 열차 편으로 한 시간 남짓 가면 일본 역사에서 한 시기의 근거였던 가마쿠라(鎌倉)에 이르고, 다시 한 정거장 더 가면 주시에 닿는데, 홋타 선생의 집은 이 도시의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의 전형적인 전통가옥이다. 1945년 패전 직후 가난했기 때문에 산꼭대기의 작은 집을 겨우 마련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그럴듯한 터전이 된 듯했다. 홋타 선생은 이 집에서 50여 년째 살고 있었다.

일본인 친구 다테노 아키라 씨가 동행했다. 우리는 열차에서 내려 전화를 걸어 길을 물었고, 택시로 5분여를 가다가 내렸다. 거기에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얼마 전 은퇴한 홋타 선생의 아드님이 티코만한 차를 갖고 마중나와 있었다. 보통의 차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좁은 오르막 내리막길을 이 작은 차편으로 우리는 겨우 홋타 선생 댁에 이를 수 있었다. 1997년 10월이었다.

1918년생으로 올해 만 79세인 홋타 선생은 아직도 정정했다. 부인이 현관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예로 우리를 맞았다. 홋타 선생은 열 평쯤 되어 보이는 서재에서 반갑게 나의 손을 잡았다.

대작가의 집치고는 참으로 검소하고 작다는 느낌이다. 집 앞뒤의 비탈진 언덕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고 귤나무엔 노랗게 물든 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다람쥐들이 창문을 기어오르면서 우리를 기웃거렸다.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주도

▲ 홋타 요시에 선생.
ⓒ 김언호
작가 홋타 요시에는 우리에게 여느 일본 지식인 또는 문학가와는 크게 다름은 그의 작가로서의 걸어온 행동과 그의 작품들로 드러나고 있다. 게이오 대학 문학부 불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1944년 군대에 징집되었으나 늑골이 부러져 징집이 해제되고 45년에 상하이와 난징을 가게 된다. 귀국 후 한때 기자생활을 하다가 1951년 소설 <광장의 고독>을 발표하는데, 1952년 이 작품으로 제26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제3세계의 민족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1956년 10월에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를 주도하며 57년에는 <인도에서 생각한 것> 을 간행하는데, 이와나미신서에 꽂혀 있는 이 책은 인도에 관한 하나의 고전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59년에는 <상하이에서>, <후진국의 미래상>을 간행하며, 그 이후 모스크바, 마드리드, 파리, 쿠바, 체크 등지를 장기간 여행하며 <쿠바 기행>, <소국의 운명, 대국의 운명> 등을 발표한다.

이 같은 작가 기행 말고도 <밤의 숲>, <기념비>, <강> ,<젊은 날의 시인들의 초상> 등의 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1974년부터 77년에 걸쳐 <고야> 전4부작을 쓴다. 1978년에 <고야>로 오사라기지로(大佛次郞) 상을 수상하게 되며 79년에는 앙골라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로터스 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80년부터 8년 동안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서양의 사상사·지성사를 탐구한다. 1991년부터 94년에 걸쳐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 몽테뉴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의 시대를 추적하는 또 하나의 거작 <몽테뉴: 미셸 성관(城館)의 사람> 3부작을 발표한다.

1970년에 간행한 소설 <다리 위의 환상> 은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지식인 연대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탈출한 한국인 청년을 두어 달 동안 그의 집에서 보호해준 적이 있다. 이 청년은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은 고아로 미국에 입양되었다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전쟁으로부터 탈출하고 만다. 이 청년은 베트남 반전 지식인들의 주선으로 일본까지 오게 된다.

이 청년은 자기 성씨가 김씨인 것만 알고 한국인으로서의 본디 이름은 잃어버렸다. 그 후 모로코인가 어디로 갔다는데 그 후의 행방은 모른다고 홋타 선생은 설명했다. 홋타 선생은 이 청년의 운명적인 생을 소재로 <다리 위의 환상>을 써냈다. 홋타 선생은 <다리 위의 환상>과 몽테뉴 평전 3부작을 서명해서 나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그의 응접실에는 한국의 고가구 하나가 놓여 있다. 제법 오래되었음직한 큼직한 궤짝인데, 그 속에 이런저런 고서들을 넣어놓았다. 국제펜클럽을 통해 유신시대 김지하 시인의 구출운동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경주에 가보고 싶지만 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식민통치를 결코 동의할 수 없고, 그것이 끝났다고 해서 뭐라고 애매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곳을 줄줄이 방문하는 따위가 아무래도 가당치 않다는 것이 홋타 선생의 생각인 듯하다. 일본적인 세계관을 뛰어넘어 인류세계와 인간의 진보적인 이념과 지성을 주제로 삼는 한 작가의 일관된 신념과 행동의 면모를 여기서 우리는 만나게 된다.

전4부작 <고야>를 통해 우리는 홋타 요시에라는 한 원로 작가의 이론과 사상, 문학가적 자세와 행동을 구체적으로 읽게 된다. 고야라는 한 위대한 예술가의 시대와 예술세계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과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작가는 묻고 또 묻는다.

그는 고야를 통해 현대의 배리(背理)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를 치열하게 성찰한다. 고야는 결코 지난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현존인간들의 실상임을 작가 홋타는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 아니 인간들이 인간들을 몰살하는 행위가 현대에 오면서 더욱 일반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이런 인간과 문명의 현실, 현대 또는 현대사가 <고야> 를 쓰게 했을 것이다.

인간과 역사의 빛과 그림자

▲ 홋타 요시에 선생과 함께. 같이 자리한 이는 한길사의 오랜 벗 일본친구 다테노 아키라 씨.
ⓒ 김언호
-왜 <고야>를 쓰게 되었습니까?
"학창시절 뉴욕에서 간행된 고야의 <전쟁의 참화> 를 본 이후 나에게 고야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피아(彼我)를 가릴 것 없이 전쟁은 인간을 몰살하는 행위입니다. 고야는 나폴레옹 군대가 에스파냐에 침입해서, 에스파냐 게릴라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사실대로 그렸습니다. 고야는 그러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전쟁의 참화 그 자체를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왜 고야입니까?
"고야로부터 근대 또는 현대가 시작됩니다. 그는 현대미술의 원천입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를 그립니다. 고야는 수평적 시선을 견지합니다. 위를 보지도 않고, 또 밑으로도 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합니다. 고야에게는 현대미술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파도 있고, 추상파도 있고, 리얼리즘도 있고, 쉬르리얼리즘도 있습니다. 고야에게는 또 동물적인 것도 있습니다. 약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입니다. 예술가는 당초부터 그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야는 '혁명의 예술가'는 아닐지 몰라도 '혁명적인 예술가' 입니다. 인간과 역사의 빛과 그림자, 고야는 그것을 선연하게 그려냈습니다."

-왜 이렇게 방대합니까?
"고야의 일생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그의 생은 파란만장합니다. 알바 공작부인과의 사단을 비롯해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근대로 넘어오는 그 시대가 역시 파란만장합니다. <고야>는 고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환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과 모순을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야는 참으로 용기 있는 예술가였습니다. 그 용기 있는 정신을 나는 그리고 싶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이후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이어서 전개된 남북의 이데올로기와 전쟁은 엄청난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저는 선생의 <고야>를 읽으면서 자꾸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쟁과 희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황당한 이데올로기를 인간들은 계속 만들어내고 거기에 종속되고 또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중동에서의 전쟁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일제 말엽 시대를 살면서 날이면 날마다 대동아공영을 외치면서 전쟁으로 지새우는 그런 국가와 시대를 체험했습니다. 이데올로기란 정말 믿을 게 못 됩니다. <고야>를 통해 나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본디 모습을 경고하고 싶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공과 에스파냐 인민들의 저항,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인간의 비극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1930년대의 에스파냐 내전에서도 그 그림자는 짙게 드리웁니다.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에서도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그림자는 그대로 재현됩니다. 고야는 '나는 이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고야와 같이 있습니다. 나는 40년 동안 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카소도 고야라는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고야의 <전쟁의 참화>가 있었기 때문에 창출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고야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야는 바로 현대입니다."

홋타 선생은 그 당시에도 한밤중에 두 시간씩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선생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는 셰익스피어와 그의 시대, 그리고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의 제3대 장군이자 가인(歌人)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를 비교·성찰해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조건과 그 정신적·사상적 귀결에 대해서다.

기념촬영하겠다는 나의 부탁에 포즈를 취하는 홋타 선생은 "우리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한국어판 <고야>를 갖고 다시 찾아뵙겠다고 대답했다. 아드님이 우리를 그 작은 차로 역까지 태워주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하고 겨우 걸을 수 있는 그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변하지 않는 것, 그냥 둬두는 것의 지혜와 미학 같은 걸 느껴보았다.

고야를 통해 현대를 보고 싶었다

▲ 한길사에서 펴낸 <고야> 1~4
ⓒ 한길사
전4권의 <고야>는 1998년 1월에 출간되었다. 이렇게 장대한 한 예술가의 평전이 우리 사회에 나온 것은 처음이 아닐까 한다.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일거에 독파했다. 위대한 예술가 고야의 파란만장한 생애도 그러하거니와 그 생애를 써내는 활달한 필력이 나를 압도했다. 이런 대작을 그렇게 순식간에 읽어내는 일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출판사가 펴낸 문제작들이 많기도 하지만 나는 홋타 선생의 <고야>를 자신있게 독자들에게 권독한다.

제1권: 에스파냐-빛과 그림자, 제2권: 마드리드-사막과 초원, 제3권: 거인의 그림자, 제4권: 운명-검은 그림을 통해 우리는 인문적 책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전기문학의 진수 같은 책이다. 작가는 '이것을 보았다'는 제목으로 이 책의 머리말을 썼는데, 그의 관점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사학자는 역사적 사실을 상대하고, 문학자는 인간을 상대한다. 바꿔 말하면 사학자는 역사적 사실에 구애되고, 문학자는 인간에게 구애된다. 하지만 이 구분은 과연 옳은 것일까"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폴리트 A.텐의 <근대 프랑스의 기원>이라는 6권짜리 저작이 역사서인가 아니면 문학작품인가 하고 묻는다면, 역사서인 동시에 문학작품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학자가 사학자의 눈을 갖고, 사학자가 문학자의 눈을 갖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분야가 존재해야만 비로소 문화가 성립한다.

시인 괴테가 발미 전투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목격하고 '여기서, 그리고 이날부터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말했을 때, 괴테는 시인의 눈으로 앞으로의 역사를 통찰하고 있었다. 시인은 그가 서 있는 현재에서 미래 역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야를 통해 현대사의 발단까지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고야>를 쓰고 있을 때는 아직 베트남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대, 아니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한 시대였고, 남북 베트남의 게릴라 전사들은 소련과 싸우기 위해 훈련받은 미국 국민군과 싸우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눈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국민군과 에스파냐 게릴라의 싸움과 겹쳐져 보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전쟁은 요컨대 용병끼리의 전쟁이었고, 일정한 규칙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징병제를 통해 국민군을 편성하자,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적을 몰살하는 전쟁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민이나 국민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인정되자, 비로소 몰살 전쟁이 가능해졌다. 현대사의 배리성(背理性)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리하여 국가가 적으로 삼은 존재에 대한 증오도 국민적 규모를 갖게 되고, 전쟁이 적지에서 벌어지게 되면 그 지역의 주민도 적이 된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치른 전쟁도 이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전쟁 때인 학창시절에 뉴욕에서 간행된 고야의 <전쟁의 참화>라는 판화집을 한 권 갖고 있어서, 전쟁 동안 되풀이하여 보곤 했다. 그 판화집은 나폴레옹 군대가 에스파냐에 침입했다가 에스파냐 인민 게리야(게릴라)의 저항에 부딪히자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프랑스군도 에스파냐 게릴라한테 참살당하는 광경을, 게릴라 쪽에도 프랑스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충실히 묘사해낸 작품집이다. 여기에는 양쪽이 겪는 '전쟁의 참화', 즉 '인간'에게 일어나는 전쟁의 참화가 남김없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전쟁을 겪고 있는 젊은이에게는 하나의 계시였다. 황군(皇軍)이라는 말이나 귀축미영(鬼畜米英)이라는 표현이 날이면 날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고함치듯 울려퍼지고 있을 때, 전쟁이란 인간에게 참화라는 것을 판화집은 말없이 젊은이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가 프랑스 혁명의 구호인 '자유·평등·박애'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에스파냐에 침입해갔다는 사태도 젊은이에게는 심각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천황의 위세를 '대동아'에 떨친다는 이데올로기 따위는 전혀 믿을 게 못 되었다.

고야에게는 괴테처럼 현재에 서서 미래를 통찰하는 역사적 안목 같은 것은 없었다 해도, 그가 제복을 입은 국민군과 그들에게 맞서 싸우는 게릴라의 모습을 전쟁의 '현재' 자체에 서서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이 판화집에서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다.

고야는 이런 현대사가 처음 시작되는 현장에 서서 ‘이것을 나는 보았다’고 말하며 자신이 본 것을 캔버스에 그리거나 동판에 새겼다."


뛰어난 문필가 김석희의 번역이 또한 <고야>를 더욱 품격 있는 명품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름다운 영혼과 진지한 열정이 그의 글들에 늘 묻어나오는 것을 나는 체험한다. 그는 ‘옮긴이의 덧붙임: 우리는 왜, 오늘 고야를 읽는가?’에서 그의 아름다운 영혼이 나를 감동시킨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그 무게와 매력에 압도당한 나머지, 나는 아직도 울창한 숲을 다 벗어나지 못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고야의 파란만장한 삶과 창조적 열정도 그렇거니와, 그 고야의 인생과 예술을 활달한 필력으로 서술해낸 작가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도 나는 그저 숨이 막힐 뿐입니다. 위대한 삶과 위대한 글이 행복하게 만난 예를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만난 홋타 선생,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출간

▲ 한길사에서 펴낸 <몽테뉴> 1~3권
ⓒ 한길사
1998년 3월 나는 출간된 <고야>를 들고 다시 홋타 선생을 방문했다. 지난해 방문 때보다 선생과 부인, 그리고 서재의 책들에 더 익숙해졌다. 한국어판 <고야>를 살펴보는 그의 얼굴이 다소 상기되는 듯했다. 아마도 그의 책 가운데는 처음으로 번역된 한국어판일 것이다.

나는 선생의 서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거기에 홉스봄 선생의 <극단의 시대>가 놓여 있었다. 선생은 지금 그걸 읽고 있는 중이었다. 밑줄도 긋고 부전지도 붙여놓았다. 세계적인 지식인이자 작가인 홋타 선생은 역시 '독서인'이었다. 막 간행된 책을 이렇게 밑줄 그어가며 독서하는 원로의 넉넉함이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80년대부터 홉스봄 선생의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펴낸 바 있다. 홉스봄 선생은 1986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안암동의 우리 회사를 방문한 바도 있지만, 나는 그의 새 책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 <극단의 시대>의 한국어판은 까치에서 출간되는데, 그 방대한 책을 읽고 있는 거장의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미 그때 나는 홋타 선생의 또 다른 대작 <몽테뉴> 전3권의 출간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는 1998년 5월에 출간되는데, 번역은 김석희 씨가 당연히 맡아 해주었다. 제1권: 전란의 시대, 제2권: 자연·이성·운명, 제3권: 정신의 축제로 구성되는 <몽테뉴>에서 홋타 선생은 말했다.

"세계는 소용돌이치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세계인식은 심각한 진동에 휩싸여 있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혼란은 당장이라도 정치화하여 처참한 전란으로 치닫고 있다. 보편적 세계종교로 자타가 인정하던 로마 교회에 공공연히 저항하고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으로 유럽의 절대적 정신기반인 기독교에 균열이 생긴 전대미문의 사태! 이제 새로운 시대는 칼과 전쟁이 아닌, 지혜와 교양을 가진 인간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미셸 성의 고독한 은둔자이자 프랑스 왕정의 실력 있는 시종무관 미셸 드 몽테뉴! 그는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쾌락주의적 천성과 스토아주의적 절제라는 양극적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자연적 이성과 격정적 감성의 충만한 합일을 꿈꾼 자유주의자였다. <에세>라는 위대한 시대적 유산을 낳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는 극심한 내전의 혼란과 광분의 유혈전장 속에서 정신의 피뢰침을 높이 치켜들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한복판을 그렇게 건너갔다.

너무도 비극적이며 너무도 희극적인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노출된 그 시대는 이른바 '관절이 어긋난 시대'였다. 광분의 종교적 정쟁이 나은 유혈과 비이성이 이 역사 풍경화의 표면적 테제라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라는 인문주의의 거대한 태동은 이면의 안티테제다.

아, 역사에서 유혈만큼 빨리 잊혀지는 것도 없다. 인간의 피는 땅에 흡수되어 흙의 자양분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당시는 최악의 시대였고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도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몽테뉴의 찬란한 글은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량 살육을 저지르고 있던 군주와 귀족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고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정말 훌륭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설령 시대가 최악이었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나는 책을 낼 때 저자의 말 또는 역자의 말을 대단히 중시한다. 때로는 머리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작업의 맨 마지막에 쓰게 되는데, 독자들에게 주는 저작자들의 글이란 사실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 또는 역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책 속으로 그 저자에게로 다가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 선생의 '독자들에게' 또는 '책머리말'은 단연 압권인데, 번역자 김석희씨가 <몽테뉴>에 부친 '독자들에게'가 또한 그렇다.

역자 김석희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건 행운"

"대하(大河) 같은 책의 번역을 마치고, 그 끝자락에 도랑보다 못한 졸문 하나 덧붙이면서, 참으로 난감하고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사실 있으나마나 한 이 '역자후기'에 과연 무엇을 쓸 것인가. 책 <몽테뉴> 인가, '몽테뉴'인가, 홋타 요시에인가.

나는 벌써 며칠째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문학의 두 대가가 태산처럼 마주 앉아서 수작을 나누고 있는데, 그 사이의 깊은 골짜기 바닥에 가엾은 종자 하나 맥없이 주저앉아서, 메아리처럼 우렁우렁 오가는 소리에 귀마저 먹먹해진 채 두리번거리고 있는 꼬락서니.

십 년 넘게 번역에 종사해오면서 온갖 부류의 책과 저자를 만났지만, 이처럼 참담한 지경에 몰리기는 처음, 아니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먼젓번 경우도 하필이면 홋타 선생과 만나면서 겪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역자 김석희다. 진정한 역자 또는 인문주의 저술가라고 해야 할 김석희 선생을 그래서 나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400년 저쪽의 몽테뉴를 불러내어 마치 친구를 대하듯 담소하며 이 평전을 써내려간 홋타 요시에는, 어쩌면 윤회의 업을 거듭한 끝에 다시 태어난 몽테뉴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둘이 하나라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인상이 아닐 것입니다. 몽테뉴의 내면을 살피는 홋타의 눈길은, 몽테뉴 자신이 아니고는 그렇게 섬세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자상합니다.

<에세>의 한 구절에서 몽테뉴의 전모를 이끌어내는 솜씨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필력 이상입니다. 홋타의 <몽테뉴>에는 한 인간에 대한 한 인간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인물을 하나의 '평전'에 담아내고 싶다는 작가적 충동 내지 호기심만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정이나 존경심 이상의 것, 본연적 의미에서의 신앙과도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번역에도 더욱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내내 옷깃을 여몄던 것도, 두 위대한 작가가 만나는 자리의 한 귀퉁이에 끼어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행운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마니아 독자를 위한 기획

▲ 한길사에서 펴낸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
ⓒ 한길사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집에서, 저 옛날의 몽테뉴처럼 칩거하면서 인간과 사회를 성찰하던 홋타 선생은 한국어판 <몽테뉴>가 출간되기 전인 1998년 9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선생의 별세소식을 <아사히신문>을 통해 알았는데, <아사히신문> 은 뉴스와 칼럼 등을 통해 세 번에 걸쳐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진지한 관심을 가졌고, 제3세계 작가회의 조직을 주도한 홋타 선생의 문학과 사상에 대해 우리 지식인들과 신문들도 관심을 가질 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신문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몇몇 기자들에게 선생의 별세소식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홋타 선생보다 하루 뒤인 1998년 9월 6일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별세하는데, <아사히신문>은 그 소식을 홋타 선생과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한국신문들은 구로사와 별세소식을 크게 다루고 있었다. 내가 홋타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 현관에서 일본식으로 꿇어 앉아 나를 맞아주었던 부인도 2001년에 별세했다는 이야기를 같이 선생을 방문했던 일본친구 다테노 아키라 씨로부터 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안동의 전우익 선생이 우리 회사를 방문했을 때 나는 <고야>를 드렸다. 선생은 그 후에 손수 고목으로 만든 탁자 하나를 갖고 와서, "홋타라는 작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독후감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는 홋타 선생의 다른 책 <인도에서 생각한 것>을 구해 읽었는데,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했다.

홋타 선생은 나의 출판 31년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저자이고, 그의 책을 나는 수시로 읽어보곤 한다. 대가로서의 풍모와 활달한 글쓰기, 그러나 인자한 그의 이미지는 늘 나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길사는 다시 홋타 선생의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 을 2005년 12월 20일에 펴내게 된다. <잠언집>으로 잘 알려진 라 로슈푸코 공작 프랑수아 6세의 생애와 그의 시대와 사상을 추적해가는 내용이다. 번역은 미야시타 지로의 <책의 도시 리옹>, 야마구치 마사오의 <패자의 정신사>,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어록>, <체사레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등을 번역한 언론인 출신의 오정환 선생이 맡아주었다.

<인간을 위한 변명> 은 물론이고 <고야>와 <몽테뉴>도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의 마니아 독자들에게는 참으로 경이로운 독서체험을 제공하기에 충분한 기획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한 출판인으로서 내가 기획한 책들과 그 저자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지만, 홋타 선생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의 오래된 집과 그 서재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건 출판인들만이 누리는 행복일 것이다.

물개섬의 세이야, 잘 있니?

이와사 메구미 지음, 김경화 옮김, 다카바타케 준 그림, 푸른길(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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