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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후허하오터 거리
ⓒ 오창학
어제 바오터우의 싸라치를 떠난 이후 꿈의 대화를 나누며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 베이징 가까운 휴가지라서인지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온 시내를 떠돌았다. 심지어 텐트를 치고 잘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도심을 벗어나 야영지를 몰색하다 보면 분명 날이 밝을 터. 새벽 거리를 누벼 가까스로 찾아낸 숙소에서 시신처럼 눈을 붙인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성도 후허하오터. 몽골어 '후트 호트(푸른 도시)'를 음역한 지명이다. 16세기 이 도시가 형성되면서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푸른 벽돌로 쌓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 그런 특색을 살리려는 것일까? 오늘날에도 예스러운 건축물에 황금칠을 한 돔형 장식을 얹어두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촌스러우면서도 나름 특색 있는 도시다.

이 지역 특산물인 우유와 치즈로 아침을 해결했다. 간밤의 고된 운전으로 모두가 몸을 추스르지 못하던 그 때에도 거리를 스케치하고 아침 끼니를 조달해 온 이가 에릭님이다. 여행 내내 경탄해 마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이 양반 삶의 에너지는 어디가 바닥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후허하오터의 간판스타 왕소군

▲ 왕소군 묘 청총(靑冢)
ⓒ 오창학
후허하오터의 간판스타는 단연 왕소군(王昭君). 호텔 이름도, 상가나 거리 명칭도, 공연의 제목도 온통 왕소군으로 가득하다.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그녀는 한 원제(元帝)의 궁녀로 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와 혼인한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여인의 조공이 80여년 간 전쟁억제 기능과 아울러 '야만족'에게 중화문명의 메신저 역할을 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만큼의 터를 차지하며 그녀의 흔적이 남을 수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와 그 사이 창작된 무수한 문학과 공연의 소재가 되었던 사실을 설명하기엔 무언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에 너무 관대하기 때문이겠지. 강도짓을 해도 미녀라면 용서가 되는 세태라는 게 어디 현 세대에 국한 될 것인가. 그녀의 아름다음에 대해선 믿어지지 않는 뒷얘기들이 많다.

원제가 궁녀 중 하나를 흉노왕에게 보내려 할 때 초상화로 감정해 가장 인물이 떨어지는 여인을 보내고자 했는데 화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못나게 그려진 탓에 그녀가 간택된다. 헌데 막상 하직인사를 하러 나타난 그녀를 보니 절세가인이 아닌가. 그래서 속이 상한 원제가 화공을 처형하고 눈물로 소군을 보냈다던가.

소군이 궁궐을 떠날 제 비파를 타며 이별가를 부르는데 날아가던 기러기떼가 그 소리를 듣느라(혹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낙안(落雁)'이란 별호가 생겼다는데 대체 어느 정도의 미모가 기러기를 혹하게 할 수 있을까. 이 놀라운 동양적 비유의 아름다움이여.

소군의 북방행은 아마도 그녀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을 게다. 평생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 채 3천 궁녀 중 하나로 살아가기보단 타향의 소실자리일 망정 왕후의 삶을 소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게 어디 맛난 밥과 고운 옷에 그치겠는가.

그래도 미인을 보내는 중국인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어서 거친 이국 생활을 애틋하게 묘사한 것들이 많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니 봄이 온들 봄 같지 않구나)', 이백의 시구로 길이 남는 이 표현도 그를 이름이 아니겠나. 그러나 그녀가 죽어 묻힌 무덤엔 가을에도 봄빛을 닮은 풀이 무성히 자라나 청총(靑塚)이라 부르고 있으니 고향땅에 대한 아쉬움이 한으로 남았나보다.

▲ 왕소군 동상과 초상
ⓒ 오창학
높이 30m가 넘는 그녀의 무덤 앞에는 말을 타고 선우(흉노왕의 통칭)와 함께 거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처음에 시집 간 호한야 선우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3년 만에 죽고 호한야선우 정실 부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자식을 낳고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으니(<후한서>에는 재가하게 되었을 때 독을 마시고 죽었다고도 나온다) 왕소군의 옆의 사내는 과연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복잡한 생각일랑 말자. 이 동상이야 사람들의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관광소품일 따름이고 당시엔 그들 나름대로 뭔가가 있었겠지.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소군 옆의 남자 동상은 과연 누구일까? 호한야 선우일까, 그의 아들 부주루 선우(復株累 單于)일까.

그런데 육체가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누가 말했나? 이 복잡한 상념도 생리적 신호 앞에 일순 물거품이 된다. 어제 무리하게 밀어 넣은 한국음식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낸다. 유명관광지이니만큼 화장실에 대한 기대도 컸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문 없는 재래식이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접할 때마다 대략 난감이다. 이번에도 그저 아는 사람이나 안 만났으면 하고 웅크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철봉씨가 들어온다. 멀뚱멀뚱하게 두 사내가 나란히 앉아 공통의 관심사에 골몰해 있다. 그래도 앞 뒤로 앉는 구조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옆에 앉은 사람이 교수님이 아니어서 그게 어디냐 싶다.

해바라기에 집착하는 아내

▲ 몽골초원
ⓒ 오창학
소군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저 무덤이 소군의 무덤이 맞든 아니든 그녀의 흔적을 둘러봤으니 속풀이는 했다. 이제 다퉁(大同)의 윈강(雲崗) 석굴을 향해 최대한 빨리 가야한다.

고속도로에 올라 북상하는데 주변 풍경이 녹색으로 바뀌어 있다. 후허하오터 북쪽 90Km 떨어진 사라무런 초원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네이멍구답게 초록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지니 마음이 시원하다.

▲ 풀밭 위의 점심
ⓒ 오창학
고속도로를 벗어나 다퉁가는 지방도를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점심참. 허기진 배를 쥐고 정착할 곳을 찾다가 확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았다. 길을 내려 차로 내를 건너니 낙원 같은 풀밭이 펼쳐진다. 단촐하면서 신속하게 점심준비. 그래봐야 햇반에 라면이지만 워낙 간절했던 음식들이라 입 안에 침부터 고인다.

모래바람 흩뿌리고 사방 천지가 바위 아니면 모래인 곳에서 먹는 식사도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초원지대의 나무 그늘에서 음식을 펼치니 완연한 소풍의 경지다. 그간 2호차와의 분리로 맛볼 수 없었던 한국산 비상식량이 즐비하고 현지 구입한 풍성한 과일을 곁들이니 극락이 따로 있을소냐. 아, 남은 여정이고 뭐고 이 꿈 깨지 말았으면.

▲ 단체사진. 시작할 때의 두려움과 설레임이 물러난 자리에 감동과 여유가 자리했다. 그래도 끝까지 무탈하기를
ⓒ 오창학
아내는 이번 여행 내내 해바라기에 집착한다.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꽃 사진을 찍어 달라고 보챈다. 자기 사진길 두고 왜 날 귀찮게 하나 싶다가도, 그래 남편의 솜씨를 믿는 아낙의 마음이겠지 싶어 그러고마고 했다. 하지만 사방 천지에 흔한 해바라기를 두고도 사진 찍자고 차를 세우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어서 이제까지 왔다. 그런데 풀밭 옆에 떡 하니 해바라기 밭이 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나름대로 해바라기의 환상과 함께 키운 시를 떠올리며 피사체를 응시한다. 그러나 파인더 안의 해바라기는 고흐의 것처럼 강렬한 빛으로 도열해 있지도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 해를 향하지도 않는다. 그냥 열 맞춰 서 있는 군상을 찍을 뿐이다. 색채를 살리기 위한 조작법도 모르겠고 배경을 잡을 곳도 딱히 없어 무념 속에 셔터만 누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 미안하다. 여인의 몸으로 힘든 여정이었을 텐데 아낸 늘 나만 챙겼다. 환경으로부터 상황으로부터 힘들 때도 아낸 늘 내 편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소원하던 해바라기 사진 한 장을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남편을 따르고 믿어주는 아내가 고맙다.

단체사진을 찍는다. 실크로드 역사 탐험대 깃발도 들고 우리 동호회 깃발도 들고 흔적을 남기는데 어쩐지 아릿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젠 이 여행도 끝인가? 어쩌면 지금이 여행 마지막 단체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 분명 사람 번잡한 윈강석굴(雲崗石窟)에서 여럿이 모여 촬영하기가 여의치 않을 테고 그러면 내일쯤엔 톈진에 닿을 텐데….

두어 시간을 넘게 뭉그적 거리고서야 정리되었다. 그만큼 이 소박한 행복에 대한 미련이 컸음이리라. 설사 윈강석굴을 포기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 초록의 빛과 포만감 속에서 헤매이고 싶다.

네이멍구 녹지대에서 점심을 끝낸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산시성(山西省) 다퉁에 접어들었다. 길을 잘 못 탄 것인지 원래 그런 건지 다퉁 시내를 지나는 길이 온통 오프로드다. 우리가 '도강'이라 표현한 진창길도 여럿이고 거리에는 석탄의 잔재가 여기저기 보인다.

목석이 아닐진대 감흥이 없을까

▲ 다퉁의 운강석굴
ⓒ 오창학
시 외곽으로 움직여 드디어 윈강석굴에 도착했는데 마음이 이상하다. 모르는 사람에겐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이라더니 오늘 내가 그 짝이다. 용문석굴, 막고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역사적인 곳에 섰는데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다.

용문석굴에서 느낀 재중신라인에 대한 애잔함과 막고굴에서 느낀 고대인의 숨결, 그리고 근현대사에 얽힌 살아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준 그 감동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저 1㎞ 내외의 사암(砂巖) 절벽에 빼곡히 들어찬 50여 굴의 위용만 가득할 뿐이다.

북위 시대 축조되었고 용문석굴보다 앞선 초기 형태를 띄며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구심으로 불교를 택하였음 등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머리와 가슴이 이렇게 별개일 수 있다니.

이건 '구름 언덕'이라는 윈강(雲崗)의 예술품이 조악해서도 아니요, 그 규모가 왜소해서도 아니다. 다만 여행의 막바지에 들른 마지막 경유지에서 느끼는 쓸쓸한 심회가 관심을 다 끌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중으로 톈진에서 통관처리를 하기 위한 준비와 오늘 중으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마음을 다 잠식해서일 수도 있다.

▲ 운강석굴의 불상들
ⓒ 오창학
아무리 그렇다한들 내가 목석이 아닐진대 아무런 감흥이야 없을까. 석굴에 채색된 다채로운 석불들, 5호굴의 대불도 이채롭다. 몇몇 석굴에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낙양 룽먼(龍門)석굴에 봉선사 불상이 그랬던 것처럼 윈강석굴엔 20호 석불이 얼굴마담임을 알겠다.

운강노천대불로 불리는 이 석불은 무슨 마애불처럼 생겼는데 실상은 석굴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왕즉불(王則佛) 맥락에서 조성된 제왕의 풍모 때문인지 권위 있으면서 후덕하고 온화한 미소가 단연 돋보인다.

▲ 20여 분이나 길 안내를 자처해 준 차. 담배 사례도 거절하고 그저 마땅히 할 일을 했다며 여행 잘 하라고 격려해 준다. 주변엔 늘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 뿐이었다
ⓒ 오창학
윈강 석굴을 나서 다퉁 거리를 달린다. 도로에 뚜껑 없는 맨홀이 여러 군데 보인다. 철봉씨는 폐품수집자가 몰래 뜯어간 것이라는데 하루에도 저런 곳에 빠져 부상당하는 사람이 여럿이란다.

'여긴 중국이니까' 하고 넘기려는데 자꾸만 한국 생각이 난다. 맨홀 뚜껑까지는 몰라도 학교 교문이나 남의 집 대문 뜯어가는 도둑 뉴스가 흔한 나라 한국. 곰곰 생각해 보니 이제껏 내가 욕해 마지 않았던 중국의 교통 체계에 이토록 쉽게 적응하고 이제껏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 교통 문화에 단련된 내공 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만하게도 무슨 외계의 행성에 온 양 중국의 교통 문화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다. 일본 친구가 한국의 버스를 타 보고 경악해 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말이다.

지도와 도로표지판만 가지고는 고속도로 진입로 가는 길을 찾기가 여의치 않다. 신호 대기 중에 옆 차에 물으니 한참을 세세하게 설명하던 운전자가 자기를 따라 오라며 앞장선다. 그 양반이 자기 가던 길을 버리고 안내를 시작한 지 20여 분. 정말이지 그가 길을 인도하지 않았으면 한두 시간을 족히 헤맸을 것 같은 길을 관통했다.

난해한 길을 다 빠져나올 때쯤 인도하던 차가 서더니 사내가 우리 차 쪽으로 걸어나온다. 혹시 사례를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며 색 안경을 끼고 보는데 사내가 이런 대사를 날린다.

"타지에 출장을 많이 다녀봐서 아는데 저 역시 이런 도움을 받을 때 더 없이 고맙더라고요. 꼭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담배를 권하는데 그 마저도 사양하고 여행 잘 하란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다. 철봉씨 말에 의하면 요즘 중국 사람들도 많이 친절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이었으면 돈을 요구했을 것이란다.

"이런 사람을 '뇌봉(雷鋒)식 시민이라 합니다."

철봉씨의 말이다. 50~60년대 공산당에 의해 키워지고 선행과 봉사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던 뇌봉은 28살 때 군에서 자동차 수리 중 사망했다. 후에 마오쩌뚱에 의해 뇌봉을 따라 배우자는 운동이 펼쳐지면서 친절, 봉사 시민을 '뇌봉식 시민'이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운동이 만든 결과이든 경제적 여유가 빚어낸 결과이든 순수한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정체가 오늘 밤 안으로 풀릴까?

▲ 베이징 부근 야간 고속도로 정체
ⓒ 오창학
의식이 몽롱해져 간다.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시간은 벌써 새벽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베이징 가는 고속도로다. 2호차 무선에선 자포님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우리 차 안에서도 이 말 저 말이 오가는데 장시간 운전으로 눈꺼풀의 중력을 체감하고 있다.

졸음 속에서 베이징이 가까워졌음을 느낄 무렵 차량들의 속도가 점차 줄더니 급기야 정지한다. 사고라도 난 것인가? 서 있는 불빛이 수 ㎞에 이르지만 이곳에선 내막을 알 길이 없으니 갑갑하다.

1호차 백구와 2호차 파라곤을 둘러싼 채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대형트럭들이 하나 둘 시동을 끄더니 전조등마저 꺼버린다. 사위에 어둠이 내린 채 백구와 파라곤만이 가느다란 엔진음을 그렁이며 빛을 뿌리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이 정체의 원인은 무엇이며 오늘 밤 안으로 풀릴 수 있을까?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여섯 시간 안에 톈진에 닿지 못하면 통관 문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빛 한 점 없는 광막한 고속도로 위에서 갑갑한 마음에 동동거리지만 정지된 대열은 좀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태그:#실크로드, #자동차여행, #후허하오터 왕소군묘, #다퉁 운강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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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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