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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는 지난 3월 21일 홈페이지를 통해 "소년지원병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국가유공자 주장은 국가보훈 기본원칙과 부합하지 않다"고 밝혔다.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국가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입니다.'

국가보훈처에서 발급하는 명함 맨 위쪽에 적힌 글귀다. 이는 국가보훈처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어린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병 문제에 관한 한, 국가보훈처는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국가보훈처 "18세 미만 참전으로 국가유공자 예우 못해"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 28일 <"16살에 전쟁터로... 4년 간 형무소 살다온 느낌이야">라는 강제징집 소년병 김만호씨 인터뷰를 시작으로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소년병 문제를 다뤘다. 주로 소년병 징집이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진 불법행위라는 점과, 정부가 오랫동안 그들의 희생과 공헌에 눈감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지난 3월 21일 '6·25 참전 소년지원병 보도 대응'이란 보도 자료를 통해 소년병의 국가유공자 예우 주장에 관해 의견을 밝혔다.

"어린 나이에 6·25 전쟁에 참전하신 소년지원병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신체적 희생을 입지 않으셨고, 뚜렷한 무공이 없음에도 18세 미만의 나이에 입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반 참전자에 대한 예우를 넘어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연금을 지급해 달라는 요구는 국가보훈의 기본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많은 주장이다."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의 조건'으로 "국가를 위한 희생이 특별하거나 공훈이 현저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즉 한국전쟁 참전자 중 전사했거나, 신체적 희생이 있었거나, 개인의 무공이 뚜렷해야 국가유공자로 예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소년병 징집의 불법성 문제는 먼저 소관부처인 국방부에서 6·25 당시 소년병 징집의 실태와 불법성에 대한 조사와 입증절차가 선행돼야 한다"며 "그 결과에 따라 국가책임의 범위와 배상수준 등이 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강제징집 책임을 국방부에 떠넘겼다.

국방부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방부는 '6·25참전 소년지원병전우회'(소년병전우회)의 민원제기에 대한 회신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에 대한 보훈심의는 국방부가 아닌 보훈처 관할사항으로 국가보훈처로 문의하기 바란다"며 국가보훈처로 공을 넘겼다.

국방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참전소년병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며 그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음에도 그 평가에 걸맞은 조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

국방부나 국가보훈처는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참전유공자법에 따라 소년병들을 예우하고 있는데 또 무슨 예우를 해달라는 것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정부가 참전유공자법에 소년병을 포함시키고 소년병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것은 최근(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의 일이다. 소년병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그들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 소년병전우회에서 발굴한 '소년병 전사자 명단'이다. 적지 않은 소년병들이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됐다.
ⓒ 오마이뉴스

소년병들의 증언 "요즘 같으면 정신병원에 보내졌을 것"

그렇다면 과연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년병들에겐 국가유공자로 예우 받을 만한 '희생'이나 '공헌'이 없었던 것일까? 특히 강제징집 등으로 입은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참전유공자법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국가보훈처의 해명 앞에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소년병은 주로 15∼17세의 어린 나이에 징집됐다. 15∼17세라면 국제법상 '아동'에 속한다. 즉 국가가 전시를 틈타 '아동'들을 군인으로 동원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피해는 수치화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박태승 소년병전우회장의 얘기다.

"먼저 신체적 희생이 있었다. 24kg의 군 장비를 짊어지고 3년 동안 고지를 누볐으니 정상적으로 성장, 발육할 수 없었다. 또 정신적 희생도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동이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과 언어·행동이 거친 전시 병영에서 심성과 정신이 건전할 수 없다. 게다가 학문적 희생도 있었다. 배움의 황금기를 놓쳤으니 일생을 인생의 낙오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쟁 후유증을 호소하는 소년병들이 적지 않다. 어린 나이에 치른 전쟁이라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16살 때 입대한 윤용갑씨는 전투 중에 다리뼈가 부러져 두 차례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 윤씨는 완치 후에도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불가피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다 보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고,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으며, 대인관계를 기피하게 돼 아직도 군에 가지 않은 친구 만나기를 꺼리게 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도 눈에 살기가 도는 나를 대하기가 무섭다고 피했다. 요즘 같으면 아마 정신병원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이것이 너무 어린 나이에 참전한 후유증이 아닐까?"

박영근(소년병전우회 전미주지회 수석부회장)씨는 17살 때 자원입대했다. 박씨는 한국전쟁 중에 중국군의 포로가 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박씨의 증언이다.

"제대 후 덕수상업고등학교 3학년에 복교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생긴 전투 시 공포증과 포로 당시 공포증 때문에 안정적이고 원활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유영옥 한국보훈학회장은 "국가는 막연히 소년지원병을 참전유공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아동복지법과 국제아동보호관계법 등을 감안해 국가에 공헌하고 희생당한 것으로 평가해 그들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국가가 보호해야 할 아동을 전쟁에 내세운 책임을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6살이던 1950년 12월 강제징집된 소년병 김만호(아랫줄 맨 오른쪽)씨. 김씨는 전방에서 전투도 치렀고, 후방에서 '공비'도 토벌했다.
ⓒ 김만호씨 제공

"대한민국 수호에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현저한 무공'을 국가유공자 예우 기준으로 내세웠다. 아마도 '현저한 무공'이란 적을 많이 죽이는 것 등을 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적을 많이 죽이는 것만 전쟁의 공은 아닐 것이다.

박태승 회장은 "당시 '참전은 곧 죽음'이라고 해서 건장한 청장년들도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 다니는 상황에서 아동들이 군인이 돼 싸운 그 자체가 공헌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소년병전우회의 추정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2만5000여명의 소년병이 참전했다. 이는 당시 국군 병력(약 20만명)의 12%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러니 "아동이 군인이 돼 싸운 그 자체가 공헌"이라는 박 회장의 지적이 일리 있게 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수의 소년병들(전우회 추정으로는 90% 이상)이 가장 치열했다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 등에 투입됐다는 점도 헤아려야 한다. 유영옥 한국보훈학회장은 "소년병의 정상적 입대 시기는 휴전 후에 해당하나, 이들의 90% 이상은 3년 전쟁 중에서도 가장 위급하고 희생이 많았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등에 투입됐다"며 이렇게 밝혔다.

"총 병력의 12%에 달하는 2만5000여명의 소년병이 낙동강 방어선 반격과 두 번의 서울 수복,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은 분명하다. 그 당시 상황은 '입대는 곧 죽음'이었다. 당연히 입대해야 할 청장년도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 다니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런 시기에 이들이 입대해 조국을 큰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큰 기여를 했음은 분명하다."

특히 소년병들은 재일학도의용군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소년병전우회는 "6·25 당시 똑같이 병역의무가 없는데도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과 6개월 이상 근무한 광복군은 국가유공자로 예우 받고 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소년병들은 아동 신분으로 현역군인이 돼 3년 전쟁을 다 감당했다. 정부는 1951년 3월 31일 일체의 참전 학도병, 학도의용군, 유격대 등에 소속된 학생들에게 귀가 및 복교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유독 (정규군이었던) 소년병만은 제외했다. 그런데도 (재일학도의용군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면서) 소년병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 않는 것은 법 적용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다."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의 애국 정신을 기려 나라에서 유공자나 그 유족에게 훈공에 대한 보답을 하는 일"을 맡은 곳이다. '과거'의 공적을 잊지 않고 그것을 '현재'에 보답해주는 일을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명함 맨 위쪽에 '국가보훈은 과거-현재-미래'라고 새긴 것이다.

정말 그런 곳이라면 국가보훈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돌아봐야 한다.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국가보훈처의 역할은 국가유공자를 더 많이 발굴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보훈처가 예산문제 등을 들어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해야 옳다.

특히 국가보훈처는 한국전쟁 당시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 즉 '소년병 강제징집'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라도 소년병들이 국가유공자로 예우 받을 수 있도록 소임을 다해야 한다. 물론 국회도 상임위에 계류된 국가유공자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래야 70대 고령인 그들이 외로운 싸움에서 내려와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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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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