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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군사전문 출판사 오스프리의 D-day 관련 서적에는 소련군 중앙아시아 공화국 출신이라는 설명으로 소개되어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이 사진은 여러 서적에 인용되고 있지만 자신을 ‘코리언’이라고 밝혔다는 언급은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 <디데이(D-day)>에 실려있다.
ⓒ Osprey
작가 조정래는 인터넷을 할까? 신작 <오 하느님>을 읽고 떠올린 의문이다. 이 소설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미군에게 포로가 된 독일군복을 입은 아시아인.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코리언'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작가 조정래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 사진의 주인공을 소설로 찾아 나선다.

조정래를 자극한 이 사진 한 장은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 이 사진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고 2차대전을 다룬 여러 책에 인용되었지만, 우리에게 이 사진의 존재를 알린 사람들은 이른바 '밀리터리 마니아'라 불리는 이들이었고 그 통로는 인터넷이었다.

'노르망디 코리언'의 진실은?

군사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차대전을 필수과목처럼 거쳐 가게 마련이다. 2차대전은 여러 격전을 품고 있지만 그 이름도 아예 'D-day'인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격전으로 기억된다.

특히 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선보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에 불을 당겼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두 주역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의기투합해서 2001년에 선보인 미군 공수부대원들을 다룬 10부작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열기를 이어간다.

밀리터리 마니아들이 노르망디에 한국 사람이 있었다"며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기 시작하고 그 진위를 따지는 토론이 벌어진 것도 대략 이 시기다.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을 '코리언'이라고 밝혔다는 언급이 있는 책이 바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자인 스티븐 앰브로스의 <디데이(D-day)>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국내 방송되고 한국어판도 출간되자 그의 다른 저작들을 찾아보던 이들이 이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노르망디에서 포로로 잡힌 아시아계 독일군 병사에 대해, 대부분 책들은 그를 '소련 중앙아시아공화국 출신 병사'라고 적고 있다.

'D-day 기념관장'을 역임할 정도로 이 분야에 전문가라 할 스티븐 앰브로스는 그가 자신을 '코리언'이라 말했다고 소개했고, 이를 근거로 군사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선 그가 정말 '코리언'인지 다양한 토론이 오갔다.

'노르망디의 코리언'은 군사 관련 인터넷 사이트들을 벗어나 몇몇 인터넷 뉴스에 보도되면서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2005년 12월에는 SBS에서 2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2006년에 모 영화사가 한미합작 영화로 기획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소수의 마니아들에게서 시작된 관심이 인터넷을 통해 증폭되면서 주류 매체에 수용되는 하나의 보기라고 할까?

총살당하는 신길만 혹은 살아남는 마대산

▲ 2005년 12월에 방송된 SBS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언>은 이 사진과 관련된 자료들을 집대성했지만 끝내 사진 속 인물의 행방을 밝히지는 못했다. 인터넷에서 소수 커뮤니티에서만 떠돌던 토론이 주류 매체에 영향을 준 사례다.
ⓒ SBS
작가 조정래는 이 사진을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되었을까? 최근 <오 하느님>과 관련된 인터뷰나 기사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기자의 견해로는 SBS 다큐멘터리 방송 이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터넷에서 주류 매체로 옮겨진 뒤가 조정래 본인이나 측근이 이 사진을 접한 시기일 것이라는 추정은 소설이 나온 시기를 봐도 설득력 있다.

그런데, 작가 조정래가 어떤 사람인가? 새로 들인 며느리에게 <태백산맥>을 원고지에 베껴 써오는 숙제를 내줬다는 '구식(나쁜 뜻은 아니다)'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던 조정래가 이 사진을 발견하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다.

조정래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오 하느님>보다 2년 앞서 이미 노르망디의 코리언을 다룬 소설이 있었다.

2005년 9월에 출간된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이 그 주인공으로 군사 관련 사이트에서 연재된 것을 전자책으로 출판한 것이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인터넷에서 연재를 하며 리플을 통해 고증을 보강하고 작품을 수정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은 <노르망디의 조선인>이 <오 하느님>과는 사뭇 다른 출신임을 말해준다.

같은 사진에서 출발했지만 <오 하느님>과 <노르망디의 조선인>을 견주어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원고지와 인터넷, 종이책과 전자책이라는 차이처럼 둘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오 하느님>의 신길만은 비운의 인물이다.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것을 시작으로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되며 끝내 소련으로 돌아가 총살당한다. 작가 조정래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신길만을 혹독하게 몰아치는 강대국들의 아귀다툼이며 신길만의 고난으로 압축되는 민족의 수난이다.

<노르망디의 조선인>의 마대산은 살아남고 살아남는다. 그는 포로로 잡히지만 능동적으로 생존을 모색하는 인물이며 끝내 한국으로 살아 돌아와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이 된다. 장웅진이 관심을 두는 것은 그가 어떻게 여러 전쟁터를 거치게 되었는지 군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민족의 운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각 전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그 곳에서 싸우고 살아남았던 한 병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쪽 소설을 좋게 읽은 이는 다른 쪽에는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오 하느님>은 민족의 비극은 잘 드러나 있지만 개연성은 좀 부족하고 <노르망디의 조선인>은 노르망디에 가기까지는 나름의 고증이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 이후는 힘이 빠진다. <오 하느님>은 시대의 모순과 인간에 관심을 두었고 <노르망디의 조선인>은 전쟁의 재구성에 관심을 두었다. 하여 <오 하느님>의 전체를 보는 시각과 <노르망디의 조선인>이 가진 세부에 대한 연구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외국보다 앞서간 한국의 '팩션'들

▲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과 소련으로 떠도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민족의 비극을 살피고 있다.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했지만 <짝코>, <길소뜸> 등 분단을 다룬 걸작들을 쓴 송길한의 각본이 돋보였던 영화였다.
ⓒ 지미필름
한 장의 사진을 단서로 상상력을 펼친 사뭇 다른 세계의 두 소설을 보면서 오세영을 떠올린다. 소설가 오세영? <베니스의 상인>이라면 들어는 보셨을 것이다. 1993년에 선보인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라는 그림 하나에서 출발해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잡혀간 조선 사람이 베니스까지 흘러가 상인으로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빈치 코드> 이후로 '팩션'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었지만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이야말로 앞서간 한국형 팩션이라 하겠다.

사실 하나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당시에 보기 어려웠던 인상적인 시도였고 최인호의 <상도>나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TV 광고를 비롯한 공격적인 마케팅이 더해져 200만 부 이상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조정래의 <오 하느님>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지만 대작을 마친 뒤에도 끊임없이 써내려가는 그 모습 하나로도 가르침이 된다.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은 흥미로운 시도였지만 무엇보다 소설은 이야기 자체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과제를 드러냈는데 이것은 그뿐 아니라 인터넷과 함께 자라온 동세대 작가들에게도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오세영은 최근에도 정조대왕의 납치 시도를 다룬 <원행>을 발표하는 등 한국형 팩션을 이어가고 있다.

▲ 사뭇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모두를 ‘한국형 팩션’이라는 이름으로 아우를 수 있지 않을까? <노르망디 조선인>은 고증, <오 하느님>은 시각,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재미가 강점이다.
ⓒ 문학동네 外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문학동네(2007)


태그:#조정래, #장웅진, #오세영, #오 하느님, #노르망디의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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