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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문 사이로 달빛이 흐른다. 밤하늘에 별들도 졸고 있는 야심한 밤. 오랜만에 고국의 손님을 맞이한 학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노인네를 맞아 곤혹을 치렀지만 방원도 싫지만은 않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웠지만 대화가 통하는 노인이었다.

"당서를 읽어보셨는지요?"

당서(唐書)는 당나라 건국에서 패망까지 290년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방원도 읽어본 기억이 있는 책이었다. 선비는 당서는 물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기본적으로 읽는 역사책이다. 당서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가 있다. 구당서는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것에 이의가 없었지만 신당서(新唐書)는 송(宋)대에 고쳐 지었기 때문에 조선 선비들은 신당서의 신뢰도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은 책이었다.

"읽어 봤습니다만…."
학사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묻는지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정기(李正己)가 제(齊)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다고 '구당서. '이정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이 달려 4대 55년 만에 망하고 말았지만 중국 땅에서 독립국을 유지했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를 고국에서 몰라주니 안타깝습니다."

중국 땅에 독립국을 세운 이정기를 아시나요?

놀라운 발견이었다.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춘추 전국시대의 제(濟)나라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 이정기가 당나라와 당당히 겨뤄 중국 땅에 제(齊)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유학을 공부했고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선비라고 자부하던 자신이 이정기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정기가 산둥성과 허난성에 세운 제나라는 신라보다 더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국호와 연호를 스스로 정해 독립국임을 천명했으니까요. 신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었지만 제나라는 통일신라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며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습니다."

노인네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학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그 때 신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나라가 철령 이북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정기 장군이 고구려 장졸출신과 유민들로 구성된 정예군 2만 명을 이끌고 산동성에 상륙했을 때 이곳 고구려 유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북방 지린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대조영보다도 당나라의 수도를 공략하려는 장군에게 고구려의 영광이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가 컸지요.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났습니다. 금가락지 은비녀 다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지요."

"유민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은 이정기 장군은 이곳 유민들을 규합하여 대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저희 윗대 할아버지도 자발적으로 군사가 되었지요. 그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정기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지요."

"장안으로 가는 길목 조주와 서주 등 15개주를 평정했습니다. 하북과 안휘성도 물론이구요. 15개주라면 조선반도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큰 땅덩어리이지요. 고구려를 패망시킨 당나라를 궤멸시키기 위하여 당나라 목줄인 대운하 영제거를 손아귀에 넣고 낙양과 장안을 공략하다 49세의 나이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고구려의 영웅이지요."

중원을 호령하다 49세에 죽은 고구려의 영웅

고구려의 영웅이라는 노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목울대에서 더운 김이 솟구쳐 올라왔다. 형언할 수없는 감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중원을 호령하던 이정기 장군의 환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말발굽 소리와 피워 오르는 흙먼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틈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호롱불이 살랑거린다. 꺼질 듯이 꺼질듯이 흔들리지만 꺼지지 않았다. 꺼져버리고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혼이 여기 이곳에 살아있다니 경이로웠다. 잊혀진 제국 고구려가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니 놀라웠다. 밤공기를 가르는 바람이 시원하다.

"고선지는 당나라 휘하의 장수가 되었지만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는 독립국을 경영했습니다. 나으리와 내가 앉아 있는 이 땅에 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던 이정기를 모른다면 후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랬다.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은 사대국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유민들을 애써 외면했다. 당서만이 아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책부원구(冊府元龜) 그리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도 기록되어있다.

야사(野史)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하드라도 중국의 정사(正史) 당서에 기록된 이정기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거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론 자체를 스스로 금기시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랬고 5백년 조선시대 선비들도 그랬다. 공자 맹자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학문을 창조한 훌륭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중국 역사 속에 기록된 고구려인을 끄집어 내지 않았다. 그것은 사대하는 나라의 선비로서 사대국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황제에게 불경 한다는 정서였다. 이것이 바로 사대주의의 한계다.

고구려의 혼을 모르면 부끄러운 후손

조선시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많았지만 이정기를 담론화 한 학자는 없었다. 몰랐는지 알고도 모른척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이정기를 최초로 거론한 인물이 육당 최남선이다. 그것도 '이정기는 북 지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조선이 패망한 이후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잠식하는 오늘날에도 고구려와 고려를 계승했다는 집단도 함구무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정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을 되살려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후손들이다.

"당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당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씨를 말린 것이지요. 똘똘 뭉치는 고구려 유민들의 결집력을 두렵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남아서 이렇게 뭉쳐 살고 있습니다. 조국이 중국 속의 고구려 유민을 외면해도 우리는 고구려의 혼(魂)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학사의 잔잔한 외침이 밤공기를 갈랐다. 허공에 메아리쳤지만 울림이 있었다. 학사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절규가 흐르고 있었다. 방원은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고 학사의 말이 방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충격이었다. 학사가 돌아간 이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6백 년 전. 죽음과 함께 역사에 묻힌 인물 이정기가 환생하여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반도(半島)에 갇혀 아귀다툼 하지 말고 대륙을 보아라'고 꾸짖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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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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