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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병 전우회의 '국가유공자 승격 요청' 민원제기에 대한 국방부의 회신내용. 국방부는 "전시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이라며 소년병 강제징집을 합리화했다.
ⓒ 6·25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 제공
흔히 '소년병'이라고 하면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실제 다수의 소년병들이 재학 중 자발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그 숫자가 2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강제로 징집돼 사선을 넘나들었던 소년병들도 적지 않다.

'6·25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소년병전우회)에서 펴낸 자료집(<우리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2005년)에 따르면, 증언자 42명 중 5명이 강제징집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18세 미만인 이들의 강제징집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준법자'인 국가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당시 전시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라며 사실상 불법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이에 늦었지만 정부가 소년병 강제징집이 불법이었다는 점을 공식 인정하고,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노력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5살 소년병, 두 번 강제징집에 두 개의 군번

박필로(74)씨는 청주중 5학년 때 한국전쟁을 맞았다. 충북 육상대표선수로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했던 박씨는 경기 도중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낙동강전투가 치열해지자 부산으로 이동했다가 강제징집됐다. 16살의 어린 나이였다.

"대구를 떠나 계속 이동해 밀양에 도착했을 때 가두 징병모집에서 입대권유를 받았으나, 학생증을 제시해 연령 미달이 확인돼 징집을 모면하고 계속 남하해 1950년 9월 8일 부산진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가두모병에 걸려 이번에는 학생증에 표시된 연령을 무시하고 징집되는 바람에 아버지와 헤어져 끌려갔다."

당시 강제징집이 기준도, 원칙도 없이 전시상황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박씨는 휴전 이후인 1953년 10월 육군소위로 임관해 4년 뒤 예비역 중위로 예편했다.

최복룡(73)씨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두 번이나 강제징집돼 두 개의 군번을 받았다. 최씨가 처음으로 징집된 곳은 피난지 대구였다.

"나는 혼자서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걸렸는지도 모르고 노숙하면서 거의 굶다시피 대구까지 가서 달성공원에서 거지처럼 지냈다. 1950년 8월 중순경 4명의 현역군인이 트럭을 가져와서 마구잡이로 데려갔다. 많은 학생들과 함께 화물자동차에 실려 사복차림으로 낙동강 방어전투에 투입됐다."

최씨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일제 38식 소총만 지급받고 전투에 참가했다. 강제로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첫 번째 군번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나이가 어리다며 귀가 조치됐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징집됐다.

"10월경 어느 날 경기도 어느 곳에서 갑자기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귀향하라는 명을 받고 고향이 서울인지라 서울에 돌아왔다. 그러나 서울에서 가족들도 찾지 못해 다시 남쪽으로 걸어가던 중 대전 이남으로 기억되는 어느 지점에서 군인들에 의해 또다시 강제동원돼 화물차에 실려 부산으로 갔다."

이후 최씨는 며칠 동안 교육받은 뒤 두 번째 군번을 받았다. 두 차례의 강제징집을 통해 최씨는 총 5년의 세월을 군에서 보내야 했다.

▲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만 14세 이상의 남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긴급명령 9호'(비상시향토방위령)를 내렸다. 하지만 비정규군을 동원하는 조치였던 긴급명령 9호도 소년병 징집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모병관 "자랑스러운 군인들이여, 죽음을 안타까워 마라"

당시에는 가두에서 강제징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현석(73)씨도 대구 명신중 3학년 때 가두모병관에 붙들려 강제징집됐다. 당시 김씨의 나이 15살에 불과했다.

"1950년 8월 10일 거리의 모병관에게 붙들려 대구 동인동의 어느 공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8월 13일 대구역에서 열차로 부산까지 갔고, 다시 부산항에서 선박으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출발해 17일 새벽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후 육로로 후지산 밑에 주둔한 미 7사단에 도착했다."

김씨는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9·28 수도탈환작전에도 참가했고, 백마고지전투에서는 포탄에 부상을 입어 3개월 동안 치료받기도 했다.

경찰관에 붙들려 강제로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1·4후퇴 당시 서울로 피난 왔던 김근식(75)씨가 그런 경우다.

"김포에 고향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가던 중 동대문구 성동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경찰관이 불러서 갔더니, 현재 사태가 좋지 않으니 군에 가야 한다며 동대문경찰서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후 김씨는 대구의 한 교육대에서 교육받은 뒤 미 2사단 38연대 소속인 '한국특공대'(ROCK RANGE)에 배치됐다. 중국군에 포위되는 등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김씨는 1956년 무사히 제대할 수 있었다.

가두징집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학교에 비상소집해놓고 집단적으로 입대시킨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장성곤(75)씨는 전쟁이 일어나 휴교 중이던 어느 날 학교 직원이 집에 찾아와 "학교로 당장 오라, 만약 오지 않으면 총살당할 수도 있다"고 말해 학교로 갔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줄어들고 어디선가 큰 엔진소리가 들리기에 모두 뒤를 돌아보니 GMC(미제 승합차) 1대가 학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곧바로 GMC가 멈추고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내렸고 모두 승차하라는 큰 소리와 함께 우리는 GMC에 강제 승차됐다. (중략) 나는 이렇게 17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징병됐다."

장씨를 비롯한 어린 학생들을 강제로 승차시킨 사람은 국민방위군 소속 장교였다. 장씨는 이들을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 하차시킨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했다. 자랑스러운 군인들이여, 나라를 위해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마라."

▲ 16살의 어린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년병 박필로씨. 박씨는 "학생증에 표시된 연령을 무시하고 강제징집됐다"고 증언했다. 사진은 소년병 전우회에서 펴낸 자료집 <우리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에 실린 내용.
ⓒ 6·25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 제공

국방부 "전시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

그렇다면 정부는 이렇게 강제징집된 소년병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특히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강제징집한 불법성은 인정하고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소년병전우회의 '국가유공자 승격 요청'에 대한 국방부의 회신내용(2006년 6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시상황에서 징집은 호적부나 오늘날 주민등록에 근거한 징집이 아니라 거주지별 필요병력을 충원하다 보니 징집된 사례가 있을 수 있으며 많은 어린 학도병, 청소년들이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하다 보니 이중 군 복무 또는 강제복무한 사례들이 일부 발생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국방부가 강제징집은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적극 인정하기보다 '강제징집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18세 미만 아동을 강제징집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데 인색한 것이다.

계속되는 국방부의 회신내용이다.

"미흡하지만 현재 참전유공자예우법에 의해 명예(회복)와 보상을 해드리고 있다. 당시 국가가 전시상황 하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별도의 보상법을 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제한이 있다."

여기에는 소년병들의 강제징집을 바라보는 국방부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즉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년병 징집의 불법행위를 따지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소년병 강제징집을 합리화하고 있다.

진진화 국방부 인사관리팀장(중령)은 22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국가가 징집할 수 없는 소년들을 징집한 것은 법적 절차 측면에서 분명히 잘못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국가가 잘못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병역정책을 맡고 있는 김덕인 인력관리팀 사무관은 "전시에는 동원령이 떨어지면 모든 사람이 동원되는 체제"라며 "소년병 징집에 대한 법적 근거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김 사무관은 구체적인 근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할 수 없게 돼 있다"며 "공보팀을 통해 공식으로 질의하라"고 언급을 피했다.

▲ 1996년 소년병 전우회를 설립해 '소년병 재평가'와 '국가유공자 인정' 운동을 펼쳐오고 있는 박태승 회장(오른쪽)과 심상은 수석부회장.
ⓒ 오마이뉴스 구영식

소년병전우회 "국가공권력 남용이자 인권탄압"

소년병전우회는 국방부의 민원회신 내용과 관련, "절대적으로 부족한 필요병력의 충원수단으로 어린 학도병, 청소년, 일반시민이 맨주먹으로 적과 싸웠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대통령 긴급명령 제9호라는 법적 근거 아래 이뤄진 합법적인 국가공권력의 행사이지만, 소년병 참전은 이와 그 시작과 과정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가나 사회가 보호해야 할 아동들을, 국방부에서 병역의무가 없는 어린 소년들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지원 또는 강제로 입대시켜 3년 전쟁을 치르고도 휴전 이후 1~2년씩 더 복무시켰다"며 "아동으로서 3년 전쟁을 치르면서 육체적, 정신적, 학문적으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희생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은 "국가에서는 아동들이 자원입대했더라도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당시 전황이 위급했기 때문에 그리했다고 한다면 여기까지는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서도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1951년 3월 15일 2차로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이 안정을 회복하자 정부에서는 3월 31일 대통령령으로 학도의용군·학도호국대·유격대 등을 귀가·복교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선후를 가리자면 소년병들을 우선적으로 귀가(제대)시켜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소년병들이 3년 전쟁을 다 치르도록 방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가공권력의 남용이요, 아동학대요, 인권탄압이다."

박태승 회장은 "국방부가 한 것이라곤 소년병 수기집을 발간했을 때 5000만원 도와준 것밖에 없다"며 "말로는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노력하는 흔적은 전혀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어 "18세 미만 아동은 민주주의가 옳은지, 공산주의가 옳은지 판단할 수 없는 나이"라며 "강제징집이든 자발적 지원이든 아이들을 군인으로 만든 불법행위를 국방부가 공식으로 인정하고 명예회복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한수 사무총장도 "육본 군사편찬연구실에서 <학도의용군집>을 만들어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에 대해선 정의를 내렸지만 공식으로 군번을 받은 17세 이하 소년병들에 대한 (연구나) 기록은 전혀 없다"며 "한국전쟁사에도 소년병은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가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서 이걸 모면하기 위해 소년병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며 "이는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를 은폐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한편 <오마이뉴스>는 조만간 김장수 국방부장관 앞으로 소년병 강제징집의 법적 근거 등을 묻는 질의서를 보내 국방부의 공식답변을 요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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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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