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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1 기이1에 나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일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사회의 중심적 가치관이기도 하다. 현행 교육기본법 제2조도 교육의 기본이념을 '홍익인간의 이념'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인간은 분명 지구의 지배자이지만, 모든 인간이 다 그런 지위를 향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생물들이 인간의 거주지 밖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생물에 대해 지배자 행세를 하기가 어렵다.

@BRI@수많은 생물 중에서 인간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고작 개나 고양이 정도일 것이다. 인간이 소나 돼지를 잡아먹기는 하지만, 지배-피지배는 공존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소나 돼지에 대해 지배자 행세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지배-피지배 관계는 인간 상호 간에서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인간 대부분은 다른 생물에 대한 지배자로서보다는 다른 인간의 피지배자로서 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이념인 것이다.

이처럼 홍익인간은 인간의 행복과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논리인데, 이 이념이 과거 한국의 수구세력에 의해 다소 변질하였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박정희식 개발독재 이래로 한국의 수구세력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면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정신으로 환경을 마구 파괴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수구세력은 홍익인간 이념을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자'는 쪽으로 축소 해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자'는 수구세력의 태도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인간 전체에게 그리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들이 추진한 개발독재는 독재정권과 재벌세력만 살찌웠을 뿐이다.

그리고 홍익인간이 독재정권의 비(非)인간적 지배를 은폐하는 이념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이 경제개발을 위해 국민을 동원하는 논리가 된 측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종전에 한국 국민들은 '널리 인간(국민)을 이롭게 하는 길'이라기에 독재정권에 동원되어 산을 깎고 길을 뚫고 바다를 막는 일에 아무 거리낌 없이 참여하였다. '우리(국민)가 잘살 수 있는 길이라면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는 정신이 한국 사회에 만연하였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동식물이 하나둘씩 멸종되어도 또 결과적으로 인간 자신이 병들고 죽어 가도, 내 통장에 숫자만 늘어나면 그것으로써 '만사 OK'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가 잘 웅변하고 있듯이,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자'는 개발독재식 태도는 한반도의 환경을 오염시켜 인간의 생활여건을 더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 그로 인한 '떡고물'도 인간 전체가 아닌 극소수의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만 떨어졌을 뿐이다.

널리 인간만이라도 이롭게 하는 일인 줄 알았지만, 실상은 널리 인간마저 이롭게 하지 못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자는 것'은 '널리 인간만 해롭게 하자'는 것과 실상은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2002년 촛불시위, 2004년 탄핵반대시위 등의 주요 변혁기에 수구세력의 입지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자'는 그들의 태도 역시 사회적 정당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바다를 메우고 하천을 메우고 산을 깎는 일이 아무런 도덕적 공격을 받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 국민들은 그것이 결국 인간 자신에게 유해한 일임을 깨닫고 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기반을 파괴하는 일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분별한 개발은 시민사회의 강력한 저항에 번번이 부딪히고 있다.

이러한 환경 대개발의 패러다임 대결은 지율 스님과 KTX의 관계에서 상징적으로 잘 드러났다. 육체적으로 연약한 스님 한 분이 거대한 KTX의 전진을 지연시키고 또 그것이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과거 박정희·전두환 치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대결에서 대한민국 공권력이 주춤거렸다는 것은 진보적인 환경세력이 수구적인 개발세력을 능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국민경제를 위한 일인데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국민 즉 인간만을 위하는 것이 결국에는 인간에게 해로운 일'이라는 인식에 도달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였던 것이다.

개발세력은 속도를 중시한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들의 인식 수준은 '완행열차'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주변의 환경까지 위할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한국 수구세력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개발독재의 관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을 배려하는 것은 인간사회 내의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배려하는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배층이 지배층 자신만을 위하고 모든 사회적 가치를 독점하려고 하면, 피지배층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반역'으로 연결되고 만다. 그러므로 지배층만 위하는 것은 결국 지배층 자신에게도 불리한 일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 자신만 위하고 다른 생물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일시적으로는 인간이 더욱더 많은 가치를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국 '환경의 반역'으로 연결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지배권도 종식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만 위하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국민경제를 위해서는 저 산을 뚫고 저 바다를 메워야 한다는 주장이 이제는 쉽게 통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들이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인식은 분명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개발독재 정권이 이미 오래전에 붕괴 되고 시대는 이미 21세기로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개발독재의 망령이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철도가 뚫려 있는데, "새로운 길을 확 뚫어 버리자!"는 개발독재식의 구호가 아직도 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구호의 주창자들은 '국민'을 위한 길 혹은 '인간'을 위한 길이라며 자신들의 주장을 포장하고 있다.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살아 있어, 무조건 뚫자 하면 국민들이 쉽게 동원될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통해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바와 같이,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개발은 인간 자신에게 결코 이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 수익이 발생한다 해도 그것은 개발독재의 주도 세력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떡고물'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수혜자가 독재정권과 재벌뿐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국 수구세력처럼 홍익인간 이념을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자'는 쪽으로 해석하면, 결국 환경도 망치고 인간도 망치는 공멸의 길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 환경과 우주 만물을 이롭게 하자는 쪽으로 확대·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결국 나를 배려하는 길이듯이, 환경을 배려하는 것이 결국 인간 자신을 배려하는 길이 될 것이다.

작은 도롱뇽 한 마리 앞에서 거대한 고속열차의 핸들을 틀 수 있어야, 인간은 환경의 반역을 예방하고 지구의 지배자 권좌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을 다 죽인다면, 지배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도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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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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