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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병 전우회에서 발굴한 '소년병 전사자' 명단. 1933년생과 1934년생이 가장 많고, 간혹 1935년생도 징집됐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년병'(child soldier)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소년병 전우회)에서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약 2만5000명의 소년병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개전 당시 육군의 병력이 9만4000여명(8개 사단)이었다는 점을 헤아린다면, 이는 상당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오랫동안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참전유공자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소년지원병'이라는 용어를 공식 사용하며 그 실체를 인정했다.

정부가 '소년지원병'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

@BRI@국제적으로 18세 미만 소년병의 징집은 금지돼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징집대상은 18세 이상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전쟁 초기 병력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15∼17세(1933년∼1935년생)의 소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다수는 자원입대했다고 하지만, 적지 않은 소년병들이 강제 징집됐다.

법률상으로 '소년지원병'은 '18세 미만의 병역의무가 없는 자로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의 사이에 국군·국제연합군 또는 전투경찰대에 지원 입대해 6·25사변에 참전하고 제대된 자'로 규정돼 있다.

정부가 '6·25 참전 소년지원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원 입대"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강제징집'이라는 그늘을 가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영옥 경기대 교수(한국보훈학회장)은 <6·25 참전 소년병의 국가유공자로서의 당위성>(2006년 5월)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당시 6·25 참전 소년지원병들의 입대 유형은 주로 자원입대와 강제동원자로 분류할 수 있으나, 병적서류 어디에도 구분 명기가 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지원병이란 명칭을 택한 이유는 국가가 사리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철부지 아동들을 국가의 공권력으로 강제로 입대시켜 인권을 탄압하고 아동을 학대한 수치스러운 행위가 국제사회에 조명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유 교수는 "대부분의 소년병들은 지원에 의해 입대했으나 극히 일부는 강제로 징집되었는데 이 경우도 지원의 형식을 취했다"며 "정부는 국제적으로 국가의 위상과 국내적으로 국민에 대한 정서를 고려해 소년지원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태승 소년병전우회 회장은 "소년병은 교과서나 국방전사에도 없는 말"이라며 "국제법은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규정하고 있어 '아동병'이 적당한 용어겠지만 국가에 욕을 안 먹이기 위해 우리가 처음으로 '소년지원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17살 때 경북지역에서 입대했던 박 회장은 육군본부 직할 수색대대에 배치돼 평양까지 북진한 경험을 가진 소년병 출신이다. 그는 소년병으로 치른 '3년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모든 전화번호 뒷자리에 '0625'나 '6250'을 쓰고 있다.

소년병들은 1950년 8월부터 1951년 1월 사이에 가장 많이 징집됐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치러졌고, 북진하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때였다. 미 국방성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전사자는 3만7000여명에 이르렀다. 병력손실이 컸던 만큼 병력보충이 시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년병 전우회가 발굴한 '소년병 전사자' 명단(2464명)에 따르면, 1933년생(17살)과 1934년생(16살)이 가장 많았고, 간혹 1935년생(15살)도 징집됐다. 이들은 국군 외에도 경찰이나 미군에도 배치됐다.

▲ 16살이던 1950년 12월 강제징집된 소년병 김만호씨(아랫줄 맨 오른쪽). 그는 전방에서 전투도 치렀고 후방에서 '공비'도 토벌했다.
ⓒ 김만호씨 제공

한국전쟁 당시 소년병 징집, 법적 근거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징집할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있었을까? 소년병 징집의 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정부 쪽에서는 '국가비상동원령'(1950년 7월)과 대통령 긴급명령 제9호(1950년 8월)를 '간접적 근거'로 들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7월 국가비상동원령을 선포하고 18세∼30세의 청·장년을 징집했다.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도 국가비상동원령을 근거로 청·장년들을 징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모병관은 포고령을 펼치며 이렇게 말한다.

"작금의 국가적 위기 사태에 처하여 1950년 7월 18일부로 만 18세 이상 30세 이하 장정들을 국가비상동원령에 의거, 전원 현역 소집한다. 법령이 정한 결격사유 외 모든 장정들은 즉각 소집에 응해야 하고 이를 불복하거나 기피할 경우 전시비상조치에 따라 즉결처분에 처한다."

하지만 국가비상동원령 어디에도 18세 미만 소년들을 징집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다. 그래서 이것 역시 소년병 징집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법적 근거는 1950년 8월 4일 내려진 대통령 긴급명령 제9호다. 긴급명령 9호에 따라 정부는 만 14세 이상의 남자들을 '동원'(긴급명령 어디에도 '징집'이란 용어는 찾아볼 수 없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긴급명령 9호가 '정규군'을 동원하는 조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긴급명령 9호는 "경찰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부락단위로 죽창과 곤봉을 들고 경비하며 공산화 방지와 공공안녕질서를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종의 비정규군(향토방위대)을 동원하는 조치였던 셈이다. 긴급명령 9호 제2조와 제3조에도 '만 14세 이상의 국민은 모두 공산사상의 방지를 위해 향토방위의 의무를 진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그래서 긴급명령 9호는 '비상시향토방위령'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었다.

소년병이 정식 군번을 받아 전투를 치른 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비정규군을 동원했던 긴급명령 9호도 소년병 징집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결국 국가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틈타 '소년병 징집'이라는 '불법행위'를 자행한 셈이다.

박태승 회장은 "국방부는 2만5000명의 아동을 데려다가 총알받이로 만들었다"며 "국방부는 18세 미만 소년병을 입대시킨 법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긴급명령 9호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민간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합법이지만 18세 미만 아이들을 군인으로 만들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며 "정부가 법적 근거도 없이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만든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3월 16일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 '종군학생 복교령'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정규군이었던 소년병들은 이 조치에서도 제외됐다.

박태승 회장은 "종군학생이란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 즉 군번을 안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며 "정식으로 군번을 받은 우리는 복교령 조치에서도 제외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복교령 조치 후 30세 이상 고령자들도 제대시켰다"며 "무조건 아이들을 우선해서 돌려보냈어야 했다"고 정부의 잘못을 질타했다.

▲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만 14세 이상의 남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긴급명령 9호'(비상시향토방위령)를 내렸다. 하지만 비정규군을 동원하는 조치였던 긴급명령 9호도 소년병 징집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정부가 소외시켜온 소년병들...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소년병들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야 참전유공자법에 의해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입대한 지 반세기 만에 이뤄진 조치였다.

하지만 소년병들은 달마다 나오는 7만원의 '참전명예수당'은 받지 못했다. 참전유공자법이 참전수당 지급대상을 '70세 이상'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에야 지급대상이 '65세 이상'으로 확대되면서 매월 7만원의 수당을 받게 됐다.

소년병들은 정부가 재일학도의용군과 광복군 복무자(6개월 이상)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예우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2004년 12월 장윤석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유공자법 개정안에 담겨 있다. ▲소년병의 국가유공자 인정 ▲연금지급 대상 포함 ▲당사자와 유족의 교육·취업 지원 등을 핵심으로 한 개정안은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 법률심사소위에 계류돼 있다.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법 노력은 16대 국회 때부터 이뤄졌다. 당시 안경률 한나라당 의원이 국가유공자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폐기되고 말았다. 당시 안 의원의 보좌관으로 개정안 발의의 실무를 맡았던 류재택 현 새중구포럼 이사장의 증언이다.

"당시 국가보훈처가 강하게 반대했다. 보훈처는 국가유공자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당시 140만명이 국가유공자로 들어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보훈처는 가능한 그 물꼬를 안 트려고 한 것이다. 보훈처는 소년병들은 참전유공자법으로 예우하고 있다고 둘러댄다. 그런데 보훈처는 국가유공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대상을 넓혀줘야 하는 조직 아닌가. 16대 국회 당시 개정안은 법안심사소위에 계속 계류돼 있다가 회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아마 소위 위원들 사이에서 자동 폐기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인 것 같다."

그는 "6·25 전쟁 당시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날라주고 완장을 찬 사람도 국가유공자 반열에 올라 있다"며 "징집대상도 아닌 중 3, 고 1 학생들이 교복을 벗어던지고 군복을 입었는데 그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태승 회장은 "아이들이 3년 전쟁을 치르며 사선을 넘나들었다"며 "우리가 재일학도의용군이나 광복군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심상은 수석부회장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노근리 사건, 북파공작, 삼청교육대, 5·18 등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해주는 특별법들이 생겨났다"며 "총알받이로 들어가 살아 나온 우리가 그들보다 못할 게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소년병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소년병들에게 기합당할 것"이라며 명예회복 추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유영옥 교수는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정부가 전시에 권력을 남용해 인권을 무시하고 어린 소년들을 강제로 동원했으나, 그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고 사과나 반성도 하지 않으며 국가유공자로서 명예를 회복시키고 응분의 대우를 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들은 6·25 참전유공자이지만 그 이전에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아동 신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소년지원병에 대한 평가는 재고돼야 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 1996년 소년병 전우회를 설립해 '소년병 재평가'와 '국가유공자 인정' 운동을 펼쳐오고 있는 박태승 회장(오른쪽)과 심상은 수석부회장.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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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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