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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맞수 한 프랑스 화가가 지난달 말 니스 카니발에서 사용될 대중운동연합 후보 사르코지(왼쪽)와 사회당 후보 루아얄의 얼굴 모형을 만들고 있다.
ⓒ AP=연합뉴스
지난 1988년 대선 1차전을 나란히 통과한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당시 총리는 2차전을 앞두고 한 TV 토론회에서 격돌했다. 여기서 시라크는 제안한다.

"오늘 저녁 당신은 공화국 대통령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등한 두 후보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을 미테랑씨라 부르겠습니다."

미테랑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당신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총리."

'시라크씨'가 아니라 '총리'라는 이름을 말미에 붙임으로써 미테랑은 시라크를 한 방 먹이는데 성공했다.

미테랑과 시라크가 남긴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역시 대선후보로서 TV 토론회에서 만난 두 사람. 공격적인 시라크는 1986년 말 파리 테러에 연루된 이란 외교관을 미테랑 정권이 엄호했다고 다그친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부인해보세요."

진지한 시라크가 가소로운듯 미테랑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 눈을 똑바로 보고 부인합니다."

결국 미테랑(54.02%)이 시라크(45.98%)를 누르고 재선됐다.

사르코지 vs 루아얄, 2인전 혹은 2중주

@BRI@프랑스의 대선은 '말' 싸움이다. 말은 유행어를 낳고 유행어는 종종 비아냥으로 응용된다. 그리고 유행어를 읽으면 현재 프랑스의 대선이 보인다.

2007 프랑스 대선이 한 달 반여 앞으로 다가온 지금 각 대선후보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이 같은 도식 속에서 도태되거나 부각되고 있다. 물론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52)와 제 1야당인 사회당(PS)의 세골렌 루아얄(53)이 그 중심에 있다.

지난해 11월말 한 지방신문을 통해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사르코지는 이날 인터뷰에서 '프랑스 사회의 활동을 재가동 시킬 것'과 '(프랑스를)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새로운 사고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프랑스 사회의 활동을 재가동 시킬 것'. 이것은 루아얄의 대선 쟁점과 정확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루아얄이 종종 인용하는 '부적'과도 같은 표현이다. '미래의 욕망'이라는 루아얄의 인터넷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여러분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경선 기간 동안 루아얄은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새로운 사고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루아얄을 그대로 흉내낸 사르코지의 화법은 급기야 루아얄의 동거인이자 사회당 제 1서기 프랑수아 올랑드를 자극했다. 지난해 11월 30일 올랑드는 힐난했던 것이다.

"사르코지는 사회당 후보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두 후보의 상호 모방이 극에 달한 지점은 지난달 11일 루아얄이 대선공약을 발표하던 시점. 이날은 한꺼번에 두 개의 '조약'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사회당 공식 대선후보로 선출된 지난해 11월부터 루아얄은 참여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전국을 돌며 국민과의 만남을 가졌다.

총 6천여회에 걸쳐 루아얄이 들어온 국민의 목소리는 지난달 11일 100대 주요정책으로 나타났고 여기에 '대선조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같은 날 사르코지는 '공화국조약'을 발표했다. 대선조약과 공화국조약이 맞선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두 후보가 동시에 조약을 들고나온 것.

▲ 여당인 대중운동연합(UMP) 후보 사르코지의 공식 홈페이지.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라고 적혀있다.
대선조약 vs 공화국조약

이와 관련해 각종 인터넷 대화방은 누리꾼들의 토론으로 뜨거웠다. 그 중에 눈에 띈 것은 프랑스인 특유의 비아냥이 묻어나는 분석이다. 한 누리꾼이 물었다.

"루아얄은 왜 조약이라는 말을 썼나?"

그 밑에 배를 잡게 만드는 댓글이 있었다.

"브라비튀드(bravitude)라는 말 기억하니? 이번에도 실수한 거야."

올해 초 중국을 공식 방문한 루아얄의 실언을 조롱한 '분석'이었다. '용맹, 용감, 용기'를 뜻하는 불어 '브라부르(bravoure)'를 써야할 곳에 루아얄은 '브라비튀드'라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씀으로써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던 것. 이후 루아얄의 신조어 '브라비튀드'는 유행어가 돼 적시적소에서 웃음을 유발하곤 한다.

"사르코지는 또 왜 조약이라는 말을 썼을까?"

이 질문에 따른 대답도 가관이다.

"통합정보부(RG)가 루아얄을 도청하고 있거든."

지난 2월 초 내무장관 사르코지가 루아얄의 정치자금을 조사해줄 것을 통합정보부에 의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을 환기시키는 대답이다. 이른바 도청이 아니었다면 같은 날 루아얄이 조약을 발표한 직후 사르코지의 입에서도 조약이 나올 수는 없었을 거라는 조소.

조약은 불어로 팍트(pacte)라 하며 라틴어 팍투스(pactus)에서 나온 말이다. '화해'의 의미를 담은 이 말은 시민과 대표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시민이 정치 전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말. 시민이 제안하고 대표가 합의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두 후보가 공약이 아닌 조약이란 단어를 쓴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 현재 우파정권 하의 프랑스와 결별을 선언한 루아얄, 그리고 침체된 프랑스를 변화시키겠다는 사르코지의 슬로건 '조용한 단절'은 과거를 마감한 '새 것'을 의미한다.

대선조약과 공화국조약 사이의 공통분모는 그러나 조약이라는 이름 뿐이다. 이 단어를 꾸미는 형용사는 판이한 것. 대통령으로서 역량에 의문이 제기됐던 루아얄은 형용사 '대선'을 선택했다. '긍정적 차별'과 '비종교성'을 설파해온 사르코지는 '공화국'이라는 형용사를 선호했다. 두 후보가 지향하는 대통령상이다.

▲ 사회당 후보 루아얄의 공식 홈페이지. '더욱 정의롭게, 프랑스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이것은 최근에 바뀐 슬로건으로 올 초까지는 '여러분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프랑스의 국모 vs 프랑스의 얼굴

이날 연설에서 두 후보가 사용한 어휘를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루아얄이 '나는'이라는 주어를 총 214회에 걸쳐 남발해 강력한 리더십을 강조한 것. '우리는'이라는 주어는 총 69회, '여러분'은 67회씩 각각 사용해 자신의 참여민주주의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말은 5차례에 그쳤다. 반면 지금까지 정치연설에서는 드물었던 '어머니'라는 표현으로 루아얄은 프랑스의 국모를 자처했다.

한편 사르코지는 강력한 대통령을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열린'이라는 말을 5번, '화해'라는 말을 12번 사용해 자신의 개방적 성향을 앞세웠으나 '강력한 행정'에 방점을 찍어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했다. 사르코지가 '나는'이라는 말을 쓴 것은 총 175회였다. 그리고 '우리는'은 10회, '여러분'은 8회에 그쳤다. 말하자면 사르코지에게 중요한 것은 국민의 직접 참여가 아니라 국민의 '욕망'을 구현할 대통령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에 걸맞게 총 33회에 걸쳐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발음한 사르코지는 12회에 걸쳐 '의지'를, 56회에 걸쳐 '맹세'를 반복했다.

"대통령은 프랑스의 목소리요 얼굴이다."

사르코지에게 대통령은 어머니가 아니라 프랑스 자체였던 것. '운명의 남자'와 국민의 만남이라는 사르코지의 전통주의와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낼 루아얄의 참여민주주의는 이렇게 나뉘고 있었다.

진짜 좌파, 진짜 우파 논쟁 역시 이들의 언어에서 불거졌다. '정의로운 질서'의 신봉자인 루아얄은 이를테면 범죄 청소년 계도를 위한 군대식 환경에 호의적인 발언과 함께 '권위'라는 주제에 전략의 일부분을 배치했다. 이것은 사회당 지지자들로부터 우파화라는 비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리오넬 조스팽 전 사회당 총리가 주도한 정부의 개혁 핵심이었던 주 35시간 노동에 '삶의 질'을 강조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해 다시 한 번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 사회주의의 두 거인 장 조레스와 레옹 블륌의 이름을 거론하며 '노동자의 프랑스'를 역설한 사르코지는 프랑스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전통적 우파 메데프(MEDEF)를 일러 '깡패 경영자'라 힐난하는데도 서슴치 않았다. 결국 두 후보의 연설을 듣고있자면 이것이 우파 후보인지 좌파 후보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가짜 우파 vs 가짜 좌파 = 중도파?

▲ 중도파인 프랑스민주연합(UDF) 바이루 후보
ⓒ AP=연합뉴스
"좌파에 아부하는 사르코지는 가짜 우파요 미 특공대 장교인양 하는 루아얄은 가짜 좌파다."

프랑스의 '진짜' 극우파 국민전선(FN)의 대선후보 장-마리 르펜(78)의 일갈이 공허하지만은 않은 이유다.

지난해 11월 16일과 올해 1월 14일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각각 대선후보에 선출된 루아얄(60.61%)과 사르코지(98.1%)는 상대의 표밭을 공략하느라 정체성 위기까지 불러오고 있는 것. 좌파가 우파를, 우파가 좌파를 끌어들이자니 전장은 당연히 회색지대다. 중도파 흡수 여부가 대선 승리를 결정 짓는다는 계산일 터.

"나는 루아얄을 원한다."

지난해 사회당 경선 시기 사르코지는 '세고 마니아' 열풍을 일으키며 인기몰이를 하던 루아얄을 자신의 대선 상대로 지목한 바 있다. '작은' 후보와 싸우기 보다는 강력한 두 후보가 대선 1차전을 일단 통과한 뒤 본격적인 선거전으로 승부를 겨루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두 후보 간의 대립일 뿐만 아니라 나머지 군소 후보들을 철저히 고립시키려는 두 후보의 연합전선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때문에 양대 후보의 어휘력 전쟁은 '이인전'이라기 보다 '이중주'라는 혐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두 후보의 대구법이 확대재생산되는 현상은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이들이 독차지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 그리고 이 전략은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2007 프랑스 대선의 다크호스 프랑스민주연합(UDF)의 프랑수아 바이루(55) 효과만 없었더라도.

사르코지와 루아얄, 2인전으로 인식돼온 2007 대선에 예상치 못한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바이루는 좌우 논쟁이 필요없는 중도파다. 사르코지, 루아얄 양대 후보에 회의를 품는 유권자들의 표심이 바이루로 몰리고 있는 것. 어부지리라 할까.

이같은 현상은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5일 프랑스의 여론조사기관 < LH2 >에 따르면 바이루(55)가 마침내 20% 지지선을 돌파했다. 지난달 23, 24일 조사결과와 비교해 3%P가 증가한 수치다. 반면 줄곧 1위를 달려온 사르코지는 2%P가 감소한 28%, 루아얄은 변화없이 27%대를 지켰다. 그 뒤로 극우당 국민전선의 르펜이 1%P 증가한 14% 지지도를 얻은데 반해 나머지 후보들은 2.5%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응답자의 42%만이 '더 이상 결정을 바꾸지 않겠다'고 대답하는데 그쳐 나머지는 여전히 유동표로 남아있다. 대선까지 한 달 반, 후보들의 발걸음은 바쁘지만 여론은 신중하다. 치명적인 실언 하나로도 엘리제(대통령궁)행이 좌절되기에 넉넉한 시간이기도 하다.

태그:#프랑스, #대선, #미테랑, #사르코지, #루아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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