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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선생은 지난해 50여년간의 연구와 집필생활을 마감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연희동 자택 인터뷰 당시 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제 산본 시내에 볼 일이 있어 가다가 리영희 선생님을 만났다. 우체국에 가는데 운동 삼아 걸어가는 길이라 했다. 선생님의 불편한 걸음으로 집에서 40분은 족히 소요되는 거리다. 선생님은 평소에도 매일 이렇게 수리산 산책로를 걷는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은 팔순을 앞둔 평범한 노인이었다.

어제(3월 1일) <동아일보>에서 선생을 비판하는 글을 보았다. 경기대 조성환(정치학) 교수가 <시대정신>이라는 잡지에 썼다는 글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리영희론, 우상 파괴자의 도그마와 우상'이란 글인데, "리씨의 사상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고발하는 데는 탁월했으나 모든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또 다른 독단에 빠졌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또 "리영희의 실존과 글쓰기의 정수는 '이성'에 의한 우상 파괴다. 그러나 미국과 대한민국은 '계몽의 이성'으로 부정하고 북한은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기준을 적용해 관대해진다면 이는 이성도 아니요, 진보도 아니다. 그것은 우상이요, 시대착오다"라고 했다.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현실은 확대했지만 정작 실체를 있는 그대로 종합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 '돋보기'에 비유했다. 그 돋보기가 중국의 문화혁명이나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비추는 확대경이 되지 못했다는 점도 여지없이 비판받았다"고 평가했다.

보수적 지식인들의 느닷없는 '리영희 비판'

@BRI@왜 느닷없이 보수적 지식인들이, 세상일에 개입하지 않고 노년을 평안하게 보내고자 하는 선생을 모독하는지 알 수 없다. 물론 공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런 비판에 대해 응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선생은 건강상 복잡한 생각을 피하기 위해 신문도, TV 뉴스도 보지 않는다. 글로써 자신의 논리를 방어한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8일자 <중앙일보>에 장황하게 소개된 한신대 윤평중 교수의 '리영희 비판'에 이어 또다시 허무맹랑한 논리로 선생님을 비판하니 대신 반박하기로 한다. 당시 <중앙>의 배영대 기자는 기사에서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글을 쓰기가 어려운 상태다. 그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배웠던 후학들이 대답해야 할 차례다"라고 주문한 바 있다.

윤 교수의 주장은 "그가 남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 우리 사회 시장맹·북한맹 만들어"라는 기사 제목에 압축돼 있다. 윤 교수는 냉전 반공주의의 우상을 폭로한 리영희 교수의 공은 인정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좌편향'으로 밀고 나간 게 문제라고 했다.

<중앙>은 윤 교수를 '중도적 시각의 칼럼니스트'로 소개했다. 그놈의 '중도'. 중도가 좌와 우를 배제하고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가치일까? 왜 그런 가면을 써야 할까? 우익 반공주의도 나쁘지만 좌편향의 리영희(진보)도 나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보수도 중도, 개혁도 중도, 진보도 중도. 모두가 중도를 주장한다. 기만이다.

조성환 교수의 글은 '윤평중 따라잡기' 수준이다. 조 교수의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기준으로 볼 때 리영희 교수는 "모든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시킨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던가. 조 교수는 중국의 문화혁명과 북한에 대해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내가 볼 때는 아니다. 윤평중·조성환 교수의 글이나, 그런 글을 싣는 잡지나, 또 그런 글을 기사로 포장하는 신문이나 지적 태만의 극치를 본다. 부끄럽지도 않을까?

오늘(2일) <중앙일보>는 정권을 다 잡은 듯이 들떴다. 올 대선은 7가지가 다르다나? 그 중 하나가 '보수가 진보에 이념 공세'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느닷없이 애매한 노교수를 비판하는 게 보수가 진보에게 이념 공세를 가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학문의 이름을 빈 정치 공세인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무개 목사도 아니고 학인(學人)의 품위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리영희 교수 대신 답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비로소 사회과학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내가 아는 선생은 신문 칼럼의 한 줄을 쓰면서도 철저하게 자료를 확보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객관적 근거와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은 글은 쓰지 않는다. 선생은 절대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기준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조 교수는 리 교수의 글 가운데 객관성을 상실하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시킨 게 있으면 증거를 대야 한다. 찾지 못하면 사과하라.

선생은 1998년 평양을 다녀온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문익환 목사처럼 낭만주의자가 못 되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다만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지. …임재경씨는 내가 그냥 본 것을 인상만이라도 쓰면 의미가 다르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러나 나는 무슨 글이든 깊이가 있고 핵심을 포함하지 않은 글이나, 피상적인 관찰로 끝나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어요."(<대화>, 681쪽)

문화대혁명에 대한 시비도 그렇다. 윤평중은 "리영희는 자신이 이념적으로 선호한 중국의 이미지에 도취해 마오쩌둥이 추진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무자비한 권력투쟁적 성격을 경시했다"고 비판했다. 문화혁명을 미화하고 독자와 후학들을 오도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선생의 글을 읽어나 보고 비판을 하는지 의심스럽다. 선생의 다음과 같은 대답을 요약하니 전문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공부 좀 해라.

"다른 외국의 학자들에 비해서 월등히 열악하고 한정된 범위의 정보밖에 없던 나에게는 그 후 알려진 이른바 '홍위병'의 반문화적 파괴행위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부정적 사실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어요. …

즉, 중국의 전통적 지배계급에 대한 인민대중노선, …인텔리의 개인적·집단적 권위주의에 대한 민중적 생활가치의 존중,…. 이러한 것들에 대한 나의 글은 무조건적 공감이나 편애(偏愛) 때문에 쓴 것이 아니었어.

나는 모택동 말기의 '문화혁명'을 추상적·철학적·이론적 측면에서 관념화하는 학자간 토론과는 반대로, 구체적 생활조건과 중국민중의 생존적 환경에서 오랜 제도·관습·인습·신앙·가치관을 뒤엎는 실제적 목적과 효과에 연구의 중심을 두었던 거요. 진정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중공의 문화혁명을 남한사회의 독자들에게 전할 때 자본주의사회의 병든 생활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겁니다."(<대화>, 43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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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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